영원한 집을 사모하며 (고후5:1~10) 말씀: 이재훈 목사님
▶우리가 성경을 통해 배우는 믿음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세상에서 배우는 만사형통이 아니라, “절망하지 않는 방법”을 배우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 절망하지 않는 믿음을 발견하고, 그런 사실을 깨달아 알게 되어,
“우리가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진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바울, 그는 매우 절망스런 험한 인생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런 혹독한 고난 속에서도 가장 큰 기쁨을 느꼈고, “그는 주 안에서 행복했다.”고 고백하는 모습에서
우리는 바울의 담대함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어떻게 그런 담대한 믿음을 가졌을까요?
그는 어려운 고난을 받을 때, 하나님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잠시 당하는 일시적인 고난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우리들은 보이는 현실에 연연하며 살지만, 바울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상상하면서,
“고난을 일시적인 고난이라“고 여겼습니다.
올해가 기축년(소의 해)라서, 모든 인사말의 끝이 ”◯◯소“로 끝납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소!, 건강하소!, 행복하소!.
우리도 소처럼, 보고 느끼는 것에 만족하지만, 죽음을 생각하면 절망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고난 속에서도 낙심하지 않았고, 죽음 앞에서 절망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십자가만 생각하면, 모든 것을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바울이 가진 믿음의 확신은 무엇입니까?
바울은 ”죽음을 지나가는 통로“라고 생각하고, 그로 인해서 ”담대한 믿음을 소유하게 되었다.”고 고백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바울이 가졌던 담대한 믿음을 우리가 경험해야 합니다.
바울이 이 편지를 썼을 때, 그는 많은 고초를 당하여, “온 몸이 망가졌다.”고 추정합니다.
바울은 자기가 가진 질병을 ”사탄의 가시“라고 표현하며, ”이런 질병을 고쳐 달라.“고 기도하며,
”이러한 가시 때문에 “자기가 곧 무너질 것이라“고 느껴졌습니다.
그러면서도 고린도교인들에게 이런 담대한 믿음을 전해주려고,
아픈 상태에서도 고린도 전서와 후서를 기록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인생에서 가장 확실한 것은 죽음입니다.
지금, 미국에서 유행하는 말이 세상에 가장 확실한 것은 ”죽음과 세금“뿐이라고 합니다.
▶죽음은 무엇일까요?
죽음은 출생보다도 더 확실한 것입니다.
세상에 태어나는 모든 생명은 모두 다 죽게 되는데, ”네 종류의 사람이 있다”고 합니다.
① 지옥처럼 살다가 천국에 가는 사람과 ② 천국처럼 살다가, 지옥에 가는 사람과
③ 이 땅에서 지옥처럼 살다가, 지옥에 가는 사람과 ④ 천국처럼 살다가 천국에 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천국은 “이 땅에서 기쁨과 평안을 느끼며 사는 사람”을 말합니다.
그러나 천국에 대한 오해도 많이 있습니다.
천국은 상상 속에 있는 그림의 떡이 아니라, “종교적인 산물이라“고 느끼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영향력을 끼친 사람들은 현실 속에서 열정적으로 사는 사람들입니다.
▶세상에서 열정적으로 살았던, 이들의 공통점은 무엇일까요?
역사적으로 중요한 사람들은 ”천국을 바라보고 살았다.“는 것입니다.
로마 제국을 극복한 사도들이나, 복음을 전도한 사람들의 공통점은
”모두 다 동일하게 천국을 바라보았다“는 것입니다.
CS 루이스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역사를 더듬어 생각해 보면, 이 세상을 위해 가장 많이 일한 사람은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이들은 바로 다음 세상에 대해 가장 많이 생각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이 다음 세상에 대하여 더 이상 생각하지 않게 되면서,
기독교는 세상에서 그 힘을 잃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천국을 향한다면, 그들은 세상을 덤으로 얻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세상을 향하면, 둘 다 잃을 것입니다. - CS 루이스 -
다시 본문으로 돌아와, 바울은 죽음에 대하여 이해하면서,
“어떻게 살았는지?”를 3가지 이미지로 설명합니다.
(1) 첫 번째, 의미로 죽음을 “집의 의미”로 설명합니다.
죽음은 ”일시적인 장막“에서 ”영원한 집“으로 옮겨지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5장 1절의 말씀을 읽으십시오.
”우리는 땅 위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닌,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고후5:1)
바울의 직업은 장막을 만들어 파는 직업인데, 장막은 오늘의 텐트를 말합니다.
그런데 그것은 부업이고, 본업은 ”복음을 전하는 사도“입니다.
바울은 사람들의 오해를 벗기 위해, 순수하게 자비량으로 사역을 했습니다.
그렇게 열심히 전심으로 사역을 하다 보니, 드디어 그의 몸이 망가졌습니다.
그렇게 망가지는 데는 그렇게 큰 힘이 필요한 게 아니고, 아주 작은 것에도 무너졌습니다.
지금의 코로나가 그렇듯이, 아주 작은 병균이 세상 사람들을 괴롭히고 있습니다.
우리의 몸은 무너지는 장막이라면,
하나님이 지으신 영원한 집은 결코 무너지지 않는 ”빌딩“과 같은 집입니다.
▶그 영원한 집은 어떤 집입니까?
그것은 부활의 몸을 의미하는 영원한 집으로, 바울은 그 말씀을 믿었던 것입니다.
인간은 죽음을 준비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죽음을 영원한 집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2) 둘째로, 죽음은 ”옷의 의미“로, ”덧 입혀지기“를 간절히 사모했습니다.
2절의 말씀에, ”우리는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의 집으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며
이 장막 집에서 탄식하고 있습니다.“(고후5:2)
이제는 장막 집이 무너지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옷으로 갈아입듯이, ”덧입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 말씀은 ”새로운 정체성을 가졌다”는 의미로, “새로운 옷을 입는다.”고 표현했습니다.
지금의 몸은 흙으로 만들어 진 옷이지만, “새 옷으로 덧 입혀지기”로 소원했습니다.
그 말씀을 ▶ 2-5절 말씀에서 말하려는 것은 무엇입니까?
① 2절에서, “덧 입혀지기를 간절히 소원했다.“는 것이고,
② 3절에서, ”벗을 지라도 발견되지 않았을 것“이고,
③ 4절에서, ”벗고자 하는 것이 아니고, 덧입고자 한다.”는 것입니다.
④ 5절에서, “이것을 보증해 주신 분이 성령님이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현재 입고 있는 옷 위에다 “옷을 덧입는다.“고 설명하면서,
죽음 이후에 ”곧 바로 부활의 몸으로 간다.”고 설명을 합니다.
바울은 죽음을 뛰어 넘어서, 생각했던 것입니다.
이것을 바울은 이 기간을 중간 상태라고 말하는데, 사람들은 여러 가지 이론이 존재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죽은 다음에, 주와 함께 하므로, “부활의 몸으로 기다리게 되다가,
예수님의 재림과 함께 부활의 몸으로 변화될 것이다.”라고 설명합니다.
사람이 죽으면, 몸과 영혼이 분리되어, 육체는 흙으로 돌아가지만,
영혼은 주와 함께 주님이 오시기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 사이에 간격이 있는데, 바울은 “영원의 세계에 들어간다.”고 설명합니다.
그래서 죽음 이후에, 바울은 “덧입기를 사모하였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 장막이 무너지는 것은 “벗고자 하는 것”이 아니고, “덧입고자 하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래서 과거의 종교개혁자들은 자기가 죽기 직전에, “수도사들이 입었던 옷들을 구입하여 입었다.“고 전해 집니다.
그것은 ”심판 날에 좀 더 나은 대접을 받을 것이라”고 착각을 했던 까닭입니다.
(3) 세 번째로, 죽음을 “씨앗의 의미“로 해석합니다.
그것은 죽음이 ”새로운 시작“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 의미는 고린도후서 5장 4절의 말씀에 나옵니다.
“그것은 죽을 것이 생명에게 삼켜지게 하려는 것입니다.”(고후5:4)
이 말씀을 쉬운 말로 표현하면, 몸을 벗고 싶어서가 아니라, 하늘의 몸을 입어서
”죽을 몸이 영원히 살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그렇게 만들어 주신 분이 성령님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그런 확신 가운데 살기를 바랍니다.
다시 말해서, 바울은 ”죽을 것이 영원한 생명으로 삼켜진다.“고 설명했습니다.
바울은 이미 고린도전서 15장 54절 말씀에서, 이것을 미리 말했습니다.
고린도전서 15장 54절의 말씀을 다시 확인해 보면,
”이런 일이 일어 날 때에는 ‘승리가 죽음을 삼켜 버렸다‘라는 성경 말씀이 이루어 질 것입니다.“(고전15:54)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죽음을 삼켰다.“는 말씀은 이사야 25장 8절을 말씀에서 인용한 것입니다.
이사야 25장 8절의 말씀은 ”그는 죽음을 영원히 삼킬 것이다. 주 여호와께서 모든 사람의 눈물을 닦아 주시며,
온 세상에서 자기 백성의 수치를 없애버리실 것이다. 이것은 여호와의 말씀입니다.“(사25:8)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 땅에서 죄를 씻어내기 위해, 죽음을 영원히 삼키실 것입니다.
이것은 큰 물고기가 작은 물고기를 삼키어 버리듯이, 죽음을 인정하지만,
”그 죽음이 소멸되는 것이 아니고, 생명의 일부가 되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몸은 죽음 자체를 삼킴으로,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씨앗으로 설명하는데, 씨앗은 죽어야 ”다시 살아“나는 것입니다.
씨앗이 ”씨앗 그 자체“로 그대로 있으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씨앗은 죽어야 새 생명으로, 다시 살아나는 것입니다.
그것이 여기서 말하는 ”생명이 죽음을 삼키는 것“입니다.
그것은 씨앗 안에 있는 생명이 ”죽음을 삼키어서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이렇게 죽음을 보는 시각이 다른 것입니다.
이렇게 ”죽음을 삼키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 복음입니다.
그래서 죽음을 통과하는 것이 ”믿음을 증거한다.”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 성도가 죽을 때, 이런 것을 올바르게 깨닫는 것이 오로지 성경 밖에 없습니다.
불교에서는 무소유를 말하며, “아무 것도 없는 세상이라”고 말을 하지만,
그러나 성경은 “그 안에서 죽음은 생명을 삼키는 것”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5장 5절 말씀을 보면,
“우리를 위해 이것을 이루어 주시고, 우리에게 성령이라는 보증을 주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고후5:5)
이런 것을 우리에게 마련해 주신 하나님은 그것에 대한 보증으로, 우리에게 성령을 주셨습니다.
우리 사회에서도 보증금을 받으면, 확실하게 안심이 됩니다.
▶바울은 담대함을 세 가지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① 6절 말씀에서, 담대함으로 ”몸 안에서 믿음으로 거한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담대합니다,
우리가 몸 안에서 거하는 동안에 주에게서 떠나 따로 거한다는 것을 압니다.”(고후5:6)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확신 가운데 살고 있습니다.
우리가 육체의 집에 사는 동안에는 “주님이 계시는 곳에서 떨어져 있다“는 것을 압니다.
그것은 우리가 보이는 것으로 살지 않고, 믿음으로 살기 때문입니다.
② 8절 말씀에서, ”몸을 떠났을 때, “주와 함께 거하는 담대함“이 있습니다.
”우리가 담대하게 원하는 것은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것입니다.“(고후5:8)
우리가 확신하고 원하는 것은 차라리 몸을 떠나 주님과 함께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몸을 떠나기를 사모했지만, 실제로는 ”주님을 기다렸다.’는 말입니다.
바울이 몸을 떠나려는 것은 주님과 함께 하는 “담대함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우리의 몸이 없어도, 주님과 함께 거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우리에게는 이런 담대함이 필요합니다.
③ 9절 말씀에서, 그리스도 심판대 앞에서도 우리는 담대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몸 안에 있든지, 몸을 떠나 주와 함께 있든지 주를 기쁘게 하려고 힘습니다.
우리 모두가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각기 선악 간에 몸으로 행한 것에 대해, 보응을 받게 될 것입니다.”(고후5:9~10)
그래서 우리가 이 육체의 집에 머물러 있든지, 떠나든지, 주님을 기쁘게 하는 것을 우리의 목표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서 심판을 받아야 합니다.
그것은 자기가 행동한 대로 선한 일을 한 사람은 상을 받고, 악힌 일을 한 사람은 벌을 받게 될 것입니다.
▶왜, 그렇게 될까요?
그것은 그리스도 심판대 앞에서는 “공정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는 언젠가는 그런 심판대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그럴 때에 우리는 당당하고, 담대한 마음으로 서야 합니다.
▶우리의 삶이 행복하지 않은 것은?
그것은 주님을 기쁘게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지니고 있는 믿음의 비밀은 무엇입니까?
바울의 목표는 “주님을 기쁘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주님을 기쁘게 하는 것”이 우리 삶의 목표가 되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죽음이 영원한 생명으로 삼켜질 때, 우리는 그 때에, 영원한 집
에 머무르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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