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 말씀

영광에서 영광으로 (고후3:7~18) 2021.01.24

다이나마이트2 2021. 1. 24. 18:55

영광에서 영광으로 (고후3:7~18)            말씀: 이재훈 목사님

 

코로나의 팬대믹 으로 어려움을 겪는 것은 ”우리에게 회개하라“는 의미입니다.

이 땅에 만연하고 있는 거짓과 죄악이 없어지고, 하나님 앞으로 나가야 합니다.

 

이 시대의 특징은 하나님을 가볍게 여깁니다.

하나님과의 만남을 사람과의 만남]보다 더 가볍게 여기는 것이 문제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그 무엇보다도 ”비교할 수 없이 크다“는 것입니다.

히브리 원어에도 영광이라는 단어는 ”무겁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인간의 결정은 무게가 있는 쪽을 선택하지만, 하나님의 존재는 모든 것 보다 뛰어나신 분이고,

모든 것 보다도 무게가 있는 분입니다.

 

시편 19편 1절 말씀에도,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창공이 그 손으로 하신 일을 보여 줍니다.“(시19:1)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창공이 그의 놀라운 솜씨를 나타내는 법입니다.

하나님은 그 존재 자체로 영광스럽지만, 세상을 창조하심으로 ”더 영광스럽게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히브리서 1장 3절 말씀에도, “그 아들은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이시며, 하나님 본성을 나타내시는 분입니다.

그분은 능력 있는 말씀으로 만물을 보존하시며, 죄를 깨끗케 하시고,

하늘에 계시는 위대하신 하나님 오른 편에 앉으셨습니다.”(히1:3)

 

인간의 타락으로 잃어버린 것이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로마서 3장 23절 말씀에도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합니다.”(롬3:23)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인간이 죄를 지음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본능적으로 영광의 무게가 더 해져야 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그 영광의 무게를 다른 것으로 대체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많은 소유를 꿈꾸며, 명예를 추구하면서 대체하고 있으니까, 문제가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광은 그 어떤 것으로도 대체할 수 없습니다.

고린도후서 4장 4절 말씀에도, “이 세상의 신이 믿지 않는 신인 사탄이 사람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해서,

하나님의 형상인 그리스도의 영광스런 복음의 빛을 볼 수 없게 만들었습니다.”(고후4:4)

 

예수님은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셨습니다.

그것은 고통스런 [십자가]를 지심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요한복음 17장 24절 말씀에도,

“어버지여,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사람들이 내가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게 하소서.

그래서 세상이 생기기 전부터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내게 주신 영광을 그들이 보게 하소서.”(요17:24)

 

예수님의 기도는 지금도 드려지고, 지금도 응답되고 있습니다.

그것에 대한 본이 된 사람이 사도 바울입니다.

 

바울이 고린도후서에서 고백하는 것은 “자신이 돌아 본 영광”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구약에 뿌리를 두고, 그것을 영광으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거의 매 구절마다 영광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데,

“자신의 자격은 하나님으로부터 왔고, 새 언약의 일꾼이 되었다”고 고백합니다.

 

그래서 자신의 직분이 “스스로 영광스럽다“고 말을 합니다.

이렇게 모세가 받은 직분] 대조하며, 설명하고 있습니다.

 

유대 사람들은 모세의 율법에 메여있기 때문에, [바울]을 오해한 것입니다.

바울은 모세의 직분을 영광스런 직분이라고 밝히면서도,

자신이 맡은 ”새 언약의 직분이 더욱 더 영광스럽다“고 알려 줍니다.

 

이것을 표로 표시를 한다면,

①구약은 모세를 통한 옛 언약]이고,---> 신약은 그리스도를 통한 새 언약이다.

②구약은 문자의 직분이고(3:7)---> 신약은 영의 직분이다.(3:8)

③구약은 정죄의 직분이고(3:9)---> 신약은 의의 직분이다.(3:9)

④구약은 사라져 버릴 영광이고(3:11)---> 신약은 영원한 영광(3:11)입니다.

 

옛 언약의 전달자인 모세의 직분도 영광스런 직분입니다.

그것은 모세가 시내 산에서 율법을 받을 때, ”그의 얼굴에서 광채가 났다”는 것입니다.

 

그의 얼굴에서 신비로운 광채가 나타나서 “얼굴을 직접 볼 수가 없어서, 수건으로 얼굴을 가렸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서는 수건을 벗고, 백성들 앞에서는 ”수건으로 가렸다”는 말입니다.

 

바울은 이것을 비유하여, 구약에 사로잡힌 사람들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3장 13~14절을 읽으면, 그런 배경이 나옵니다.

 

“모세는 자기 얼굴에서 광채가 사라지는 것을 이스라엘 사람들이 보지 못하도록 수건으로 그의 얼굴을 가렸으나,

우리는 그렇지 않습니다. 사실 이스라엘 사람들의 마음은 둔했습니다.

오늘 날까지도 그들은 옛 언약의 말씀을 읽을 때, 그 수건이 벗겨지지 않고 그대로 있는데,

그 수건은 그리스도 안에서 없어질 것입니다.”(고후3:13~14)

 

모세가 수건을 쓴 것은 얼굴의 광채로 백성들이 두려워했기 때문인데, 계속 쓰는 이유는 또 다른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없어질 결과를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모세도 처음에는 인간적인 마음으로 생각했으나, 그러나 없어질 결과에 주목하지 않도록 “수건으로 가렸다,“는 것입니다.

 

▶왜, 얼굴에 광채가 났습니까?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전해준 말씀이 초자연적인 역사이니까, 그걸 보고 신적인 권위를 보이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광채가 없어지면, 율법에 대한 경외심을 잃어버릴 수 있으니까, 긍정적으로 해석하신 것입니다.

 

그렇게 하신 것은 옛 언약이 존속되기를 바라면서 예언적이고, 상징적으로 보이도록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여기에서 공통적으로 하신 것은 영광스런 광채도 일시적인 것이고, 수건도 더 이상 필요가 없게 되었습니다.

 

▶왜, 수건이 필요 없어졌나요? 그것은 예수님이 오셨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자신을 공격하는 사람들에게 대하여 3장 15~16절 말씀과 같이 대답합니다.

 

”오늘 날까지도 모세의 글을 읽을 때마다 수건이 그들의 마음을 덮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로 돌아갈 때마다 수건이 벗겨질 것입니다. “(고후3:15~16)

 

모세의 수건은 영광의 광채를 가리기 위한 수건이지만, 오늘날 까지도 그렇게 수건을 쓰는 사람들이 있으니까,

바울이 ”그것을 없애야 한다“는 주장입니다.

 

수건을 얼굴에 두르고 사물을 보면, 답답합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우리가 예수를 받아드리면, ”수건을 벗는 것과 같다”는 의미입니다.

 

▶여기서 수건은 무슨 의미입니까?

수건은 하나님의 구원계획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으로, 잘못된 세계관과 잘못된 율법주의를 가리킵니다.

 

도덕적인 명령은 문자적이지만, 성령 안에서 사는 사람은 달라야 합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신 “피를 먹지 말라”는 것도 문자적으로 해석하면서, 먹지 않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반드시 “먹지 말라“는 것은 아닙니다.

 

아주 오래전에 제가 전도사로 있을 때, 수련회를 끝마치고 아침에 해장국을 먹으려고 하는데, 선지국이 나욌어요.

맛있게 먹으려고 하는데, 어떤 분이 ”그걸 먹으면, 어떻게 해요?“라고 하니까,

목사님의 딸이 ”아빠, 먹어도 돼요?“라고 물으니까, 지혜로운 목사님이 ”선지만 걷어 내고 먹으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수건을 쓰고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구약으로 돌아가는 것이니까, 해석을 제대로 해야 합니다.

지금 바울에 대한 오해와 불신은 바로 이런 것입니다.

 

바울은 ”그렇다고 나는 의로운 사람이 아니고,

그들이 그렇게 빠져 있는 문제점들을 드러내고 있는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당신들이 마음에 수건을 덮고 있으니, 그 수건을 벗고, 복음을 읽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수건을 벗을 수 있나요?
그것은 ”주님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오늘에 마지막 말씀인 18절 말씀을 함께 읽으십시오.

”우리가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듯이, 주님의 영광을 보게 되면,

점점 더한 영광으로 주님의 모습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 영광은 영이신 주님에게서 나옵니다.“(고후3:18)

 

바울은 ”수건을 벗는 것이 주님에게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수건을 벗는 것이 ”주의 영광으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예수 안에서 자유를 누릴 수 있는 방법“입니다.

자유는 할 수 없는 것을 하는 게 자유가 아닙니다.

여거서 말하는 자유는 ”그분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고, ”그런 자유가 있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럴 때 일어나는 변화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는 사람은 “자신도 영광스런 모습으로 변화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운동을 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운동을 자기보다 잘하는 사람과 같이 운동을 하면, 자신도 기량이 늘게 됩니다.

 

공부도 마찬가지입니다.

믿음의 원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영광스런 사람과 같이 있다면, 나 자신도 그런 사람의 영향으로, 영광스럽게 변화됩니다.

바울은 그런 소망을 가지고, 7장 12절 말씀에서 이렇게 설명합니다.

 

”내가 여러분에게 편지를 쓴 이유는 불의를 행한 사람이나 불의를 당한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에 대한 여러분의 간절함이 하나님 앞에서 여러분에게 밝히 드러나게 하려는 것입니다.“(고후7:14)

 

그것은 땅의 소망이 아니라, 하늘의 소망입니다.

최근에 사업을 하는 사람의 말인데, ”돈이란 있어도 필요하고, 없어도 돈이 필요하다“고 말을 합니다.

그것은 돈이 많은 사람은 많이 있으므로 돈이 더 필요하고, 적은 사람은 적은 대로 꼭 있어야 하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부모로부터 재산을 물려받은 갑부의 재벌도 ”빚에 찌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귀영화는 어떤 방법으로도 영광을 채울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스스로 수건을 벗으므로 영광스런 모습으로 변하고,

소망의 복음을 품으므로 ”영광에서 영광으로 나가는“ 여러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