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시의 고난 영원한 영광 (고후4:7~18) 말씀: 이재훈 목사님
우리는 요즘에 고린도후서의 말씀을 통해, 고난 속에서도 낙심하지 않는 바울의 믿음을 배우고 있습니다.
고린도후서는 사도 바울의 ”신앙 고백서“입니다.
많은 서신서가 ”문제해결을 위한 해설서”이고, 교회 안에 문제를 설명하지만,
고린도후서는 사도바울의 개인적인 여정 속에서 ”성령을 이겨낼 수 있는가?“를 고백하는 신앙의 고백서입니다.
바울은 극심한 고난 속에서도, 낙심하거나 절망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그가 바라보는 것이 다른 사람과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는 스스로 말하기를 ”자신은 영광스런 직분을 받은 사람이라”고 말했습니다.
그 직분은 나의 의지와 결심으로 받은 게 아니라, “하나님의 자비하심으로 세워진 직분으로 받았다“고 말했어요.
오늘 본문에 나오는 4장 7절의 말씀을 먼저 읽어보십시오.
”우리는 질그릇 같은 우리 속에 이 보화를 가진 것은 그 엄청난 능력이 하나님에게서 난 것이지,
우리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한 것입니다.“(고후4:7)
바울은 우리를 질그릇에 비유하고, 우리가 갖고 있는 보화는
”하나님에게서 난 것이지, 우리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현재 겪고 있는 우리의 고난은 “영광에 이르게 하는 과정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러니까 영광을 바라보면, ”절대로 낙심할 수 없다”고 단언합니다.
고린도후서 4장 17-18절 말씀을 읽으십시오.
“우리가 잠시 당하는 가벼운 고난은 그 무엇과도 비교될 수 없는 크고 엄청난 영원한 영광을
우리에게 가져다 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보이는 것을 바라보지 말고,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봐야 합니다.
보이는 것은 잠깐이지만,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하기 때문입니다.”(고후4:17~18)
바울은 그가 당하는 고난은 “잠시 당하는 가벼운 고난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보기에는 가벼운 고난이 아닌데, ”그는 가벼운 고난이라“고 말합니다.
그것은 ”생각의 차이“입니다.
▶바울이 받은 고난을 어떻게 생각했습니까?
바울은 더 나아가 ” 보이지 않는 고난“을 생각했기 때문에, ”현재의 고난이 가볍다“고 생각합니다.
믿음은 ”그가 무엇을 바라보느냐?”에 따라서 달라집니다.
믿음은 영혼의 눈입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무엇을 주목해야 합니까?
이 세상에 모든 문제가 보이는 것은 잠깐이고,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하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이지 않는 것”에 주목을 하면, 바울처럼 잠시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어려운 고난을 잠시라고 생각을 했을까요?
그것을 우리는 보배가 아니고, “질그릇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아까 읽었던 4장 7절의 말씀에서 보배는 금이나 다이아몬드처럼 보석을 말합니다.
▶보석이 왜, 귀하고 가치가 있을까요?
그것은 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영광도 변하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영원토록 변하지 않으니까, 복음이 변하지 않는 것입니다.
보배로운 말씀을 전하는 사도는 “질그릇처럼 연약한 사람”이지만,
그러나 오직 보배로운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내야 하는 사람“입니다.
▶왜, 우리는 낙심합니까?
우리는 질그릇같이 연약하니까, 낙심합니다.
바울은 말하기를 ”이것을 깨닫게 하는 과정이라”고 고백을 합니다.
바울은 “나는 보배가 아니고, 보배를 담고 있는 질그릇에 불과하다”고 말합니다.
지금 전 세계에 퍼지고 있는 코로나 팬데믹도 이런 것을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
지금 상황을 우리 인간의 힘으로는 어떻게 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역사에는 끝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하나님의 싸인입니다.
우리는 보배가 무엇인지 확인하고, 썩어질 육신을 내 세우지 말고, “영원한 승리기 무엇인지?“를 먼저 알아야 합니다.
이 재난이 통과하고 나면, ”교회는 문을 닫을 것이다”라고 말하는 것은 사탄의 생각입니다.
교회는 성도들의 선행으로 복음이 전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는 선행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로 인해 발전해 나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선행을 실천하면서, 자기를 드러내는 인간이지만, 선행은 남모르게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거기서 머물지 않고, 적극적으로 보배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참여하려고 합니다.
8-9절 말씀은 질그릇 인생의 고백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방으로 환난을 당해도 절망하지 않고, 답답한 일을 당해도 낙심하지 않습니다.
핍박을 당해도 버림받지 않고, 넘어뜨림을 당해도 망하지 않습니다.”(고후4: 8~9)
“자신이 보배”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낙심 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 사람은 자기가 대접받지 않으면 분노하지만, 질그릇 인생은 그렇지 않습니다.
▶복음의 본질은 무엇입니까?
복음의 본질은 그리스도의 죽음에 참여하여, 그분의 생명이 우리에게 나타나야 합니다.
10-11절 말씀을 보면, “우리는 항상 예수의 죽으심을 몸에 짊어지고 다닙니다.
이는 예수의 생명 또한 우리의 죽을 육체 안에서 나타나게 하려는 것입니다.
우리 살아있는 사람들이 항상 예수 때문에 죽음에 넘겨지는 것은 예수의 생명
또한 우리의 죽을 육체 안에 나타나게 하려는 것입니다.”(고후4:10~11)
바울에게 고난의 의미는 예수의 죽음에 참여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왜, 우리가 두려워합니까?
그것은 우리가 죽을 까봐 두려운 것입니다.
“고난의 종착역”이 죽음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에 우리가 연합하면, “우리에게 생명이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결코 낙심하지 않습니다.
고대 사회에서 사람을 죽일 때, “죽은 시체와 함께 말아서 죽이는 방법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것은 죽은 시체의 독기가 그 사람에게 전해지도록 하는 잔인한 방법입니다.
▶질그릇 안에 있는 보배는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생명이 우리 안에 다시 살아나는 것입니다.
신약 성경 직후에 아그나티우스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수리아의 안디옥교회에 파송한 분입니다.
그 당시의 핍박은 바울의 고난보다도 더 심각한 핍박이 있었습니다.
1세대 사도들은 모두 돌아가시고, 그 다음 세대가 교회를 이끌어 가야 하는데,
거짓 선지자들과 이단들이 많이 있었어요. 그 때는 종교다원주의였기에, 구별하기가 어려웠어요.
로마 제국의 조직적인 박해로 잔인하게 진행되어, 그는 결국에 순교했습니다.
그 분이 순교한 것은 오늘의 본문에 나오는 ”생명이 역사했기“ 때문입니다.
그 어떤 정치적인 세력도 이기지 못하는 박해를 받으며, 죽기를 각오하고 순교의 제물이 되셨기에,
결국에는 승리한 삶을 사신 것입니다.
어차피 죽게 되었으니, 비겁하게 피하지 말고, ”장렬하게 죽자”는 각오입니다.
우리가 질그릇 같이 부서질 인생이라면, 그 질그릇을 보관할 것입니까?
아니면, 그 질그릇을 깨부수고, 끝내겠습니까?
우리는 이그나티우스정도의 순교는 아니더라도, “그냥 죽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12-13절 말씀에 나오는 ”여러분“이라는 단어에 집중하십시오.
”죽음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여러분 안에서 역사합니다.
성경에 기록되기를 ‘내가 믿었으므로 말했다‘고 한 것처럼,
우리는 바로 그 믿음의 영을 가지고 있으므로 우리도 믿고, 또한 말하기도 하는 것입니다.“(고후4:12-13)
이 말씀은 선교적인 의미로 해석해서, ”우리는 죽을 위험을 당하지만, 여러분은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내가 믿었으므로, 여기서 ”말 하였다.“는 것은 성경의 말씀대로
우리도 그와 같은 믿음의 정신으로 믿고 말한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 한 분의 죽음으로 모든 사람의 통로가 되었듯이,
또한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하는 통로가 돤다.’는 말씀입니다.
16절 말씀에서 ”우리는 낙심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겉 사람은 쇠할지라도 우리의 속사람은 날마다 새로워지고 있습니다.“(고후4:16)
여기서 겉 사람은 타락한 우리의 육체를 말하고, 속사람은 날마다 새로워 질 우리의 영혼을 가리킵니다.
즉, ”새 생명으로 거듭난 사람“을 말합니다.
골로새서 3장 10절을 읽으십시오.
”이제는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 새 사람은 여러분 안에 새 생명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모습을 따라,
끊임없이 새로워져서, 참된 지식에 이르도록 새롭게 되었습니다.“(골3:10)
여기서 [새 사람]은 ”새로 살아난 사람이 우리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상처를 입은 피부가 시간이 지나면, 딱지가 되어 떨어져 나가듯이, 새살이 돋아나는 이치와 같습니다.
우리 안에는 그런 옛 사람과 새 사람이 공존합니다.
그러니까 겉 사람만 붙잡고 살면 절망이지만, 우리는 속사람과 함께 살아야 합니다.
사도바울은 이런 속사람을 보고 있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겉 사람만 보면 절망하지만, 속 사람을 보면 희망이 생깁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겉 사람을 보지 말고, 속 사람을 보고 사십시오.
▶왜냐하면?
그 속 사람 안에 예수의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17절의 말씀으로 결론을 맺습니다.
”우리가 잠시 당하는 가벼운 고난은 그것 모두를 능가하고도 남을,
영원한 영광을 우리에게 이뤄 줄 것입니다.“(고후4:17)
고난의 무게가 아무리 무거울 지라도, 영광의 무게를 감당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고난의 무게에 짓 눌려 살지 말고, 믿음으로 사시기 바랍니다.
모든 고난은 잠시 나타나는 고난이지만, 우리 모두 영원히 살아 있는 영광을 생각하면서
날마다 새로운 속 사람으로 승리하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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