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 말씀

죽음의 냄새인가, 생명의 향기인가 (고후2:12~17) 2021.01.08

다이나마이트2 2021. 1. 10. 13:14

죽음의 냄새인가, 생명의 향기인가  (고후2:12~17)  말씀: 이재훈 목사님

 

날씨가 갑자기 추워졌습니다.

그러나 주의 은총이 충만한 복된 주일이 되시기 바랍니다.

 

어떤 나라에 가면, 나무들이 자라지만, ”열매가 맺히지 않는 나무들이 있다‘고 합니다.

그것은 그 나라에 “겨울이 없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고난의 겨울은 고통스럽지만, 하나님은 “겨울을 통해서 열매를 맺게” 하십니다.

요즘, 우리 교회는 90일의 기적이라는 캠패인을 벌리고 있는데, 그것은 절망을 소망으로 바꾸기 위한 것입니다.

 

18세기에 윌리암 쿠퍼는 찬송 시를 작곡하신 분인데, 영적 부흥에 쓰임 받았던 분입니다.

그의 시에서 발견하는 것은 ”두려워하는 성도들이여, 새로운 용기를 가지라.

그대들이 그토록 두려워하지만, 그분은 자비로 가득 차 있고, 언젠가는 흩어져서 그대들에게 축복을 내려 주실 것입니다.

결코 그르침이 없는 솜씨로 이룩한 무한한 보고(寶庫)속 깊이 찬란한 계획을 쌓아 두시며,

높으신 뜻을 이룩하십니다. 그러니 연약한 감각으로 주님을 판단하지 말라.

그분이 은혜 주실 것을 믿어라 그분은 언짢은 섭리 뒤에, 미소 짓는 얼굴을 숨기시고 계십니다.

그분의 목적은 빠르게 이루어지리다. 매 시간마다 펼쳐지리라.

싹은 쓰디쓰지만, 그 꽃은 달콤하리라. 그러니까 맹목적인 불신은 정녕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그의 솜씨를 헛되게 살필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나름의 해석자로 그것을 뚜렷하게 풀어 주십니다.“

- 윌리암 쿠퍼 -

 

이 분이 쓰신 ”주 하나님의 크신 능력“이라는 노래의 가사를 음미해 보십시오.

① 주 하나님 크신 능력, 참 신기하도다. 바다와 폭풍 가운데 주 운행하시네.

② 참 슬기로운 그 솜씨, 다 측량 못하네. 주님 계획한 그 뜻은 다 이뤄지도다.

③ 검은 구름 우리를 뒤 덮을지라도, 그 자비하신 은혜로 우리를 지키네.

④ 어둠에서 소경같이, 나 헤멜지라도 주 나를 불쌍히 보사 앞길을 비추리. –아멘-

 

그가 깊이 있는 시를 작사한 것은 그가 젊은 시절에 ”깊은 고난을 겪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절망 가운데서, 그 고난을 통해서, ”연약함이 무엇인가?“를 고민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작은 자임을 고백하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주십니다.

자식이 없는 사라를 통해서 자녀를 주셨듯이, 우리에게도 주실 것입니다.

 

바울은 고난을 받았기에, 고난을 기쁘게 감당했고, 복음을 붙잡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바울을 ”신비로운 길“로 인도했고, ”크신 능력“을 체험하게 하셨습니다.

 

고린도후서에 나타난 바울의 고백들은 매우 솔직합니다.

각장 마다 어려움을 느낄 수 있었기에, 더욱 가치가 있는 책입니다.

 

그는 살 소망까지 끊어졌지만, 복음의 능력으로, 건져 줄 것을 기대했습니다.

이것이 그에게 나타난 역설이었습니다.

 

이것이 바울의 영적 체험을 실제적으로 나타낸 것입니다.

바울은 자기가 당한 환란을 작은 것이고,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는 크다”고 말합니다.

그는 약한데서 온전케 하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이다“라고 주장합니다.

 

고린도후서는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보낸 편지입니다.

고린도전서는 바울이 도덕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보낸 편지이고,

고린도후서는 고린도교회와 우호적인 관계를 회복하게 된 것을 기뻐해서 보낸 편지입니다.

 

고린도후서 2장 13절의 말씀을 읽으십시오. “나는 내 형제 디도를 만나지 못하므로,

내 심령이 편치 않아, 그들과 작별하고, 마케도니아로 갔습니다.”(고후2:13)

 

여기서 “마음이 편치 않다”는 말은 깊은 절망으로 “마음에 충격을 받았다“는 말입니다.

그 내용은 지난주에 제가 말씀을 드렸지만, 바울을 대적하는 성도들이 있었는데,

심지어 ”사도될 자격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이 때, 더 큰 충격을 받았고, 2장 14절과 같이 눈물의 편지를 보냅니다.

여기서 바울은 또 다른 역전을 맛보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로 그리스도 안에서 항상 승리하게 하시며, 우리를 통해서 모든 장소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낼 수 있게 하시는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고후2:14)

 

이 말씀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승리하게 하신다.“는 구절에 주목하십시오.

여기에서 핵심은 ”승리하게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원문에는 승리라는 단어가 아니고, ”인도하신다.“고 쓰여 있습니다.

이 말은 ”승리의 개선 행진에 참여한다.”는 의미로 쓰여 진 단어입니다.

 

그 말 속에는 ”승리에 행진에 참여하고, 우리를 인도하신다.“는 표현입니다.

이 말 속에는 로마의 개선장군들이 승리하고 행진하는 장면을 떠올리게 됩니다.

그런 이미지로 바울은 자신감에서 나온 자신의 표현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참고로, 로마의 행진은 어떻게 진행 되었을까요”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습니다.

”승리한 장군의 개선행진은 다음과 같은 순서로 로마 거리를 지나갔습니다.

그들은 주피터 신전이 있는 카피톨리누스 언덕으로 행진했고, 맨 앞에는 주 행정관과 원로원이 섰고,

그 다음에는 나팔수들이 섰고, 그 뒤에는 점령지에서 가져온 전리품들을 든 사람들이 따라갔습니다.

 

그 다음에는 사로잡힌 군주들, 지도자들, 장군들이 사슬에 묶여 걸어갔습니다.

그 뒤에는 행정관들, 곤봉을 든 관리들이 있었고, 수금을 든 약사들이 그 뒤를 따랐습니다.

그 다음에 제사장들이 향기로운 향이 타고 있는 향로를 흔들면서 따라 갔습니다.

그 다음에 사두마차 위에 서 있는 개선장군들이 나타났습니다.

그 뒤에는 가족들이 타고 있었고, 마지막으로 온갖 장식을 한 군대가 승리의 구호를 외치며 따라 갔습니다.“

 

이런 개선장군들의 행진하는 모습을 보면서, 바울도 따라갔습니다.

바울의 생각으로는 승리한 장군이 예수 그리스도인데,

개선장군들이 거리를 휩쓸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그것은 장군들이 ”승리감에 도취된 모습“이 아니고, 포로로 잡힌 모습일 것입니다.

오히려 ”그리스도의 포로“가 된 바울이 자신의 모습을 그리고 있었을 것입니다.

 

개선장군이 앞장서서 뽑내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 뽐내야 마땅합니다.

우리의 사령관 되시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이끌고 계시는 모습을 상상했을 것입니다.

 

우리의 사령관 되시는 그리스도가 이끌어 가야 하는데, 개선 장군들이 활보하는 것이

마치 사탄의 장난으로 보였을 것입니다.

 

그것은 잘못된 승리주의 때문입니다.

▶십자가만 내 세우면, 승리하는 것입니까?

승리주의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그런 의식이 중요한 것입니다.

 

십자가가 ”부적“이 되면, 절대로 안 됩니다.

바울은 잘 못된 승리주의가 아니고, 반 승리주의로, 포로 된 종의 어리석은 모습으로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이 개선 행진을 따라가면서, 무엇을 상상했을까요?

그것은 나를 이끌고 계시는 ”그리스도를 따라가다 보면, 승리한다.”는 것입니다

 

자신을 “그리스도의 전리품”으로 여기고, “그리스도를 따라 가는 것”을 상상했을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승리의 행진이 아니라, “따라가는 의식”입니다.

이 의식에서 중요한 것은 “향기로운 향로를 흔들면서” 나가는 의식입니다.

 

그것은 승리를 체험하게 만드는 의식으로, 냄새는 승리를 나타내는 의식입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승리를 후각으로 맡으면서, “앞으로 나가는 의식”이 되는 것입니다

 

▶바울이 여기서 착상한 것은 무엇입니까?

이런 의식을 통해, 그리스도를 알게 하고, 그리스도의 냄새를 맡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리스도의 향기가 퍼지도록 하는 것입니다.

 

승리의 개선행진이 지나가는 곳마다, 냄새를 맡으면서 느끼도록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개선장군과 같이, 본인의 사역에 적용하려고 상상을 했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15절에서, “우리는 구원받는 사람에게나 멸망 받는 사람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입니다.”라고 고백합니다.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우리 모두가 그리스도의 향기“로 보입니다.

그리스도의 향기는 바울 자신의 향기가 아니고, 그리스도께서 내는 향기를 말합니다.

 

우리 한국 사람들은 어디를 가나 마늘 냄새와 김치 냄새를 풍깁니다.

우리도 유럽에 가면, 치즈 냄새를 맡게 되듯이, 외국 사람들이 한국인을 만나면, 금방 그런 냄새를 맡게 됩니다.

 

미국에서 목회할 때, 그 냄새가 문제가 되니까, “밥을 먹지 말고, 커피 스낵으로 바꾸자“는 제안이 나와서 바꿨더니,

주변에서 아주 좋은 반응으로 환영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들도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살고 있으니까, 그리스도의 냄새가 나야 합니다.

그것은 ”나 자신의 냄새“가 아니고, 그리스도의 향기가 나야 합니다.

 

교회는 건물도 아니고, 조직도 아니고, 사람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교회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의 모임이고, 구원받은 사람들이 모이는 장소입니다.

교회 지도자인 사도 바울은 "교회는 그리스도의 향기"라고 얘기했습니다.

그러니까 교회에서 사랑스런 냄새가 나타나야 합니다.

 

아마도 바울은 구약의 향기를 기억했을 것입니다.

[레위기]의 제사 중에 5가지가 있는데, 향기로운 제사는 번제와 소제, 그리고 화목제입니다.

 

이 3가지 제사는 ① ”향기로운 제사“이고, ② 자원해서 드리는 제사입니다.

이렇게 자기가 원해서(자원해서) 드리는 제사가 향기로운 제사입니다.

 

그러나 ①강제로 드리거나, ②법적으로 묶여서, 드리는 속죄제나 속건제는 향기로운 제사가 아닙니다.

 

빌립보서 4장 18절에, 향기로운 제물이 나옵니다.

”지금 나는 여러분에게 모든 것을 받아 넉넉합니다.

여러분이 에바브로디 편에 보낸 것을 받아서 풍족하게 살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보낸 선물은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실 향기로운 제물입니다.“(빌4:18)

 

이 말씀에서 사도 바울이 빌립보 교인들이 보낸 헌금]에 적용한 말씀입니다.

바울의 재정원칙은 우선 자비량입니다.

 

자신의 선교비를 자신이 스스로 부담하고, 자신의 돈으로 해결 했습니다.

그런데 예외적으로 빌립보 교인들의 헌금을 받아 드린 것입니다.

 

빌립보 교인들은 가난 속에서도 헌신했기 때문에, 바울이 받은 것입니다.

그렇게 헌신했기 때문에, 헌금은 향기로운 제물이 되는 것입니다.

 

그는 고린도교회에서는 오해를 받았지만, 흔들리지 않고 사역을 했습니다.

그것은 자신을 포로 된 종이라고 했지만, 그리스도의 향기를 드러내는 일을 했기 때문입니다.

 

16절말씀을 읽으십시오. ”그러나 어떤 사람에게는 죽음에 이르게 하는죽음의 냄새가 나고,

어떤 사람에게는 생명의 이르게 하는 생명의 냄새가 납니다.

그렇다면 누구에게 이런 냄새가 나겠습니까?“(고후2:16)

 

이 말씀은 ”멸망을 받을 사람에게는 죽음의 냄새가 나고,

구원을 받을 사람에게는 생명의 냄새가 난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십자가의 도가 구원의 능력이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거부하는 사람도 있다‘고 합니다.

빛이 비춰지면 나오는 생물이 있고, 반대로 빛이 비춰지면 들어가는 생물도 있습니다.

 

그와 같이 생명과 죽음의 문제는 선택하는 일입니다.

거기에는 죽음의 냄새도 있고, 생명의 냄새도 있습니다.

 

▶바울의 이런 고백이 얼마나 안타까운 고백입니까?

바울이 물어 보기를, ”누가 이것을 감당하겠습니까?”라고 안타깝게 묻고 있습니다.

이것은 교만이 아닙니다.

이런 말은 바울 만이 할 수 있는 말입니다.

 

바울은 “나 만이 감당한다.”고 교만을 부린 것이 아니고,

자신도 고통스런 상황이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승리한다.“는 고백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나를 하나님 앞에 제물로 드리는 것이니까,

그러므로 “나는 결코 절망하지 않는다.”는 말이고, 자신감에서 나온 메시지입니다.

 

▶왜, 그런 생각을 했을까요?

그것은 오직 그가 그리스도의 향기이기 때문에, 나온 말입니다.

바울의 마음에는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 만 존재하기 때문에, 그런 마음을 품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에 성도가 많다”고 승리하는 것이 아닙니다.

겉으로는 어리석어 보이지만, 자신감을 가진 바울의 모습이 승리자인 것입니다.

 

약할 때 더욱 강해지는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우리의 절망을 소망으로 바꾸기 위해,

사도 바울처럼 승리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