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추천인가, 하나님의 부르심인가 (고후3:1~6) 말씀: 이재훈 목사님
오늘도 복된 주일이 되시기 기원합니다.
어려운 시국이지만, 하나님 안에서 소망을 품으시기 바랍니다.
▶참된 신앙인은 어떤 사람입니까?
장 칼벵은 참된 신앙인이란, “하나님을 알아가는 동시에, 자신을 알아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자기를 안다”는 것은 서로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참된 신앙인이 되려면,“자신을 먼저 알아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자신을 알 수 없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자신의 정체성을 알기 위해서는 먼저 하나님을 아는 것이 “참된 신앙인의 시금석이라”는 것입니다.
사람에 따라서는 “자신의 생각이 옳다.”고 확신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자신을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고 자신을 우월하게 느끼는 사람도 있지만,
반대로 자신을 낮추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렇게 “자기를 낮추는 사람”도 물론 자기 사랑을 갖고 있겠지만,
“자신을 높이는 사람”도 자기 사랑을 갖고 있습니다.
이것은 모두 다 왜곡된 모습입니다.
자아를 보는 데는 두 가지로 보는 시각이 있습니다.
①하나는, 하나님이 기뻐하는 방법으로 자기를 보는 사람입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우리 인간이 회복 되어야 할 대상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람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나를 대신하여 죽으시기 까지 나를 사랑했으므로,
내 몸같이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들입니다.
②또 다른 하나는, 우리 안에 “옛 자아는 완전히 죽어야 한다.“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잠시도 내 세울 수 없는 사람이니까, 옛 자아는 죽여야 합니다.
이것은 사도바울이 내 세우는 삶으로, 너무 과도한 자기 확신입니다.
그런 사람은 누군가로부터 부담을 느꼈거나, 사람과의 갈등을 느꼈던 사람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자아를 ”영원히 꿈틀거리지 못하게 죽여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입니다.
사도 바울이 그런 “갈등의 위기 속에서” 놓여 있는 상황입니다.
그것은 고린도교회 성도들한테서 지도자로써의 자격에 대한 비판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자아는 서로 사랑받고, 존경 받아야 하는 자아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교인들로부터 “지도자로써의 자격”을 의심을 받았으니,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과거에 사람을 평가할 때에, 평판이 좋은 분이 써 주는 추천서를 사용했는데,
요즘에는 자신의 실력이 중요한 시대가 되었습니다.
과거에는 그 사람을 모르니까, 추천서를 써주는 문화가 있었으니까,
그런 추천서가 없으면, 사람대접을 하지 않던 관습이 있었습니다.
그 당시 초대교회에도 순회 전도사들이 추천서를 가지고 다니며,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러나 거짓 선지자들은 그것을 이용하여 활용하였으나, 바울은 그렇게 하지 않았기 때문에, 오해를 받은 것입니다.
그런 불신 가운데서, 고린도교인들은 ”그런 추천서가 없다“고 바울을 의심하고, 공격했던 것입니다.
바울은 그런 공격이 ”어리석은 짓“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자격에 문제를 삼는 것은 ”소모적인 논쟁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때부터 ”자신을 자랑해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입니다.
바울이 많은 고생을 겪었지만, 이런 소모적인 공격을 받을 때에는 절망감을 느꼈을 것입니다.
▶바울은 ”추천서가 필요 없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①첫째로, 그는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곧 그리스도의 추천서”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고린도후서 3장 2-3절 말씀을 읽으십시오.
”여러분은 모든 사람들이 알고 있고, 우리 마음에 기록되어 있는 것이 우리의 편지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우리의 사역(섬김)을 통해,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입니다.
이 편지는 먹으로 쓴 것이 아니라, 살아계신 하나님의 영(=성령)으로 쓴 것이며,
돌판에 새긴 것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 판에 새겨진 것입니다.“ (고후3:2~3)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자기의 마음 판에 새겨진 편지“이고, 고린도 교인들이 곧,
추천서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바울의 마음에는 ”당신들이 추천서를 원한다면, 나는 얼마든지 교인들을 보여 주겠다“고 생각하면서,
자신 있게 확신하는 사람입니다.
▶여기에서 ”그리스도의 편지”라는 것은 무얼 의미합니까?
“그리스도께서 직접 쓰신 편지”를 말하는데, 그것이 “바로 당신들(고린도 교인)이라”는 것입니다.
바울의 추천서는 “종이 추천서”가 아니라, 성도들 자신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면서 세 가지 중요한 단어로 설명합니다.
①첫째로, “살아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되었다“는 것입니다.
고린도라는 지역은 음란하고 퇴폐적인 우상이 성행하는 도시이니까, 범죄자도 많이 있는데,
복음이 들어와서 성령의 역사로 변화되고 있으니, 그게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영적인 사역자의 기준으로 보면, 바울은 세상적인 스팩이 아니고,
”그리스도의 영(= Sprit)으로 이루어졌다”고 보는 것입니다.
②두 번째로, 성도들 가운데 “마음의 섬김을 통해서 나타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는 섬김을 통하여 나타나는 것입니다.
반대로 성령의 통로가 막히면, 그릇된 열매가 맺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의 은사가 나타나면, ”종으로 섬기는 마음“이 나타나니까,
바울을 통해서 신비로운 역사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종으로 오신 것은, 성육신(인간의 육체로 태어나신) 그 자체가 역사적인 사건이 되고, 그 자체가 섬김입니다.
예수님은 병든 자를 고쳐 주셨고,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셨습니다.
이것을 Title이 아니고, Towel이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이것은 수건을 들고,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는 모습에서 ”[섬김]이 나타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③세 번째로, 성령의 역사는 “육체의 마음 판에 쓰여 있다“는 것입니다.
과거에 모세를 통하여 돌판에 새겨 주었지만, 지금은 마음 판에 새겨주고 있습니다.
옛 언약은 인간의 마음을 변화시키지 못했지만, 지금 나타나는 성령의 역사는
육체의 마음 판에 쓰여 있어서, 역사하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3장 6절 말씀을 함께 읽으십시오.
”그분은 우리로 하여금 문자가 아니라, 영으로 말미암는 새 언약의 일꾼이 되기에, 충분한 자격을 갖추도록 하셨습니다. 문자는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고후3:6)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문자는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바울은 영광스런 자신을 표현하기를, 새 언약의 일꾼으로 불렀습니다.
그러니까 모세가 ”옛 언약의 일꾼“이라면, 바울은 ”새 언약의 일꾼“입니다.
▶바울 자신이 갖고 있는 정체성은 무엇입니까?
자신은 마음속에서 역사하는 영의 사역을 하기 때문에, ”자기는 추천서가 필요 없다”고 주장합니다.
이런 근거는 하나님께 기원을 두고 있는 사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2) 두 번째로 설명하는 이유는 자신의 자격은 “오직 하나님에게로 부터 나온다.“고 설명합니다.
바울은 고린도후서 3장 5절 말씀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무엇이 우리에게서 나온 것처럼 ‘스스로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자격은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나옵니다.“(고후3:5)
우리의 자격은 ”오직 하나님께로 부터 나온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분명하게 자신을 돌아다보았을 것입니다.
그것은 자신이 그런 오해를 받고 있으니까 절망감을 느끼고 있겠지만,
그래도 아무리 생각을 해도 ”내 스스로 없는 자격을 부여한 것“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께로 부터 나온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진짜로 ”자격이 있는 사람“은 본인이 ”스스로 자격이 있다”고 얘기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자격이 없는 사람”이 그런 자격에 대해 민감한 것입니다.
▶여기에서 두 가지 단어에 주목하십시오.
①하나는 “하나님께 대해”이고, ②또 다른 단어는 “하나님께로 부터”입니다.
이 두 단어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따라 행동한다.“는 말입니다.
바울은 누구의 말에 흔들리지 않지만, 하나님의 이름으로 불리는
①”하나님께 대해”서나, ②“하나님께로 부터”라는 생각이 우선하기 때문입니다.
이 단어는 자신의 연약함을 드러내는 말이지만,
자신의 정직하고 솔직한 고백으로 확신에 찬 “자기 소신에서 나온 말입니다.
▶확신이라는 말은 어떤 때, 사용합니까?
확신은 “충분하고, 차고 넘친다.”는 표현인데, 자기 스스로 만든 확신은 언젠가는 무너지지만,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확신”은 결코 무너지지 않습니다.
스스로 조작된 확신은 어려움을 헤쳐 나갈 수 없지만,
그러나 “하나님께로 부터 나오는 확신은 결코 무너지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이 단어를 개역개정 성경에서는 ”확신을 만족이라”고 번역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만족은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나오기 때문에” 그렇게 번역한 것입니다.
바울은 “사람의 추천서”가 아니라, “마음에 있는 추천서“를 말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런 오해와 비난 속에서도 “올바른 분별력”을 가지고,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었습니다.
선한 목자교회 유기성 목사님이 신학 석사학위를 포기한 이유를
“하나님께로부터” 나오는 충만함은 스팩이 아니고,
“하나님께로 부터 나오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교회가 때로는 공격을 받기도 하지만, 최근에 감사원장도 “그분께서 충분한 생각을 하셨기에“,
원전에 대한 감사를 진행하는 것입니다.
이런 무너지지 않는 확신은 ”하나님께로부터“ 나오는 확신이 있어야, 흔들리지 않는 것입니다.
교회는 ”좋은 일을 하자“고 만든 것이 아닙니다.
교회는 ”사람들께로 부터“ 만든 조직이 아니라, “하나님께로 부터” 만든 조직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만족은 “나로부터”가 아니고, “하나님께로 부터”나와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생각으로” 사는 게 아니고, “하나님이 주시는 생각”으로 살아야 합니다.
우리의 자격은 “오직 하나님으로 부터” 나오는 것이어야 합니다.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 곳에서 일하는 선교사는 이런 확신이 없으면, 떠날 수 없습니다.
이런 부르심의 확신이 우리에게 있어야, 어려운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바울의 흔들리지 않는 확신을 우리가 본받을 때, 우리가 “사람의 생각으로 사는 사람인지?”
아니면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사는 사람인지?“를 판단하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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