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 말씀

넘치는 위로, 굳건한 소망 (고후1:1~11) 2021.01.03

다이나마이트2 2021. 1. 3. 21:31

넘치는 위로, 굳건한 소망  (고후1:1~11)      말씀: 이재훈 목사님

 

2021년 새해의 첫 번째 주일입니다.

오늘부터 매 주일에, 주일예배의 설교를 “고린도후서의 말씀”을 전하려고 합니다.

 

고린도후서는 바울이 쓴 서신서입니다.

그런 서신서를 읽어보면, “복음의 진수”를 발견하게 됩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역사가 그대로 담겨 있습니다.

바울은 아시아와 유럽을 다니며 교회를 세웠고, 가는 곳마다 고난을 당했습니다.

 

그가 복음을 전하는 모습을 서신서를 통하여, 우리는 볼 수 있습니다.

만약, 바울의 사역이 없었다면, 우리가 이런 복음을 알 수 없었을 것입니다.

 

바울의 여정가운데 가장 어려웠던 곳이 에베소와 고린도지역입니다.

이곳이 도시지역이기 때문에, 그곳에 영적 전쟁이 더 심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그곳에서 고난도 받았지만, 한편으로는 열매도 있었습니다.

당시에 에베소는 우상의 도시이기 때문에, 복음이 들어가면 우상이 무너집니다.

 

복음이 들어가면, 막의 세력이 무너집니다.

바울은 가는 곳마다 “사람이 만든 신은 신이 아니다”라고 말을 했기에,

바울이 간느 곳 마다 술렁거렸고, 많은 소요가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폭동이 일어났으므로, 에베소를 떠나게 됩니다.

 

그 다음으로 간 곳이 그리스의 중심 지역인 고린도지역입니다.

고린도 지역은 음란한 도시이기에, 더욱 더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고린도교회의 문제는 교인들끼리 다투고 싸우는 상황입니다.

 

고린도교회의 성도들은 서로 나뉘어서, 갈등을 일으키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복음을 전달하는 일보다, 성도들에 대한 갈등이 더 어려웠습니다.

 

나중에는 거짓 선지자들에 의하여, “사도로써의 자격이 없다”는 공격을 받음으로,

엄청난 충격을 받게 됩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곳 성도들에게 더 가까이 다가갑니다.

 

고린도후서를 자세히 읽어보면, 복음의 위대한 능력을 발견합니다.

이번 기회에 고린도후서에 나타난 복음의 능력을 체험하시기 바랍니다.

 

고린도후서는 고린도교인에게 보내는 편지입니다.

고린도전서 1장 11절을 보면, ”내 형제들이여, 글로에의 집을 통해 여러분에 대한 말,

곧 여러분 가운데 다툼이 있다는 말을 내가 들었습니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고린도전서 7장 1절에 ”이제 여러분이 써 보낸 질문에 대해, 말하겠습니다.

남자가 여자를 성적으로 가까이 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라고 응답합니다.

 

지금 고린도교회 성도들은 서로 싸우고, 다투고 있습니다.

이들은 서로 ”바울파, 아볼로파, 게바파, 그리스도파”라고 다투고 있습니다.

 

이런 분쟁으로 인하여, 서로가 ”치리해야 할 사람“이라고 주장하는 형편입니다.

바울은 그 교회에서 양육을 했지만, 공개적으로 빈대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엄청난 충격을 받습니다.

 

이어서 고린도전서 7장 5-6절 말씀에도 ”부부 간에 서로 멀리하지 마십시오.

단 기도에 전념하기 위해, 얼마동안 떨어져 있기로 합의한 경우에는 예외입니다.

그러나 그 후에 는 다시 합하십시오.  여러분이 절제하지 못하는 틈을 타서,

사탄이 여러분을 유혹할까 염려되기 때문입니다.

지금 내가 하는 말은 권면이지, 명령은 아닙니다.“(고전7:5~6)라고 구체적으로 얘기해 줍니다.

 

고린도후서 2장 4절 말씀을 보면,

”내 말과 내 선포는 지혜롭고 그럴듯한 말들로 한 것이 아니라, 성령의 능력이 나타낸 증거로 한 것입니다.“(고후2:4)

 

바울은 마음에 고통이 있지만, 성령의 능력을 받아서 한 말입니다.

그리고 그는 고린도 교인을 사랑하기 때문에, 충심으로 전하는 말입니다.

 

고린도후서 2장 12-13절 말씀에서도

”우리는 세상의 영을 받지 않고, 하나님께로부터 온 영을 받았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의 선물들을 깨달아 알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선물에 대해 말하는 것은 사람의 지혜가 가르쳐 준 말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가르치신 말씀들로 하는 것입니다. 곧 신령한 말로 신령한 일들을 설명하는 것입니다.“(고후2:12~13)

이라고 말을 전합니다.

 

고린도후서의 내용은 바울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예수님의 진리를 전파하는

사명을 맡긴 것은 고린도 교회가 자신을 확신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모든 영관을 하나님께 돌리고, 사람들이 자신에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독록 행동을 합니다.

 

고린도후서 1장 3-6절을 말씀 읽어보면, ”하나님, 곧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자비의 아버지이시며,

모든 위로의 하나님께서 찬양받으실 분입니다. 그분은 우리의 모든 환란 가운데서 우리를 위로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위로하시기 때문에, 우리도 환난 가운데 있는 사람들을 위로할 수 있게 하십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 생활에 넘치듯이, 우리의 위로도 그리스도를 통해서 넘치고 있습니다.

우리가 고난을 받는 것도 여러분을 위로하고, 구원하기 위함이요,

우리가 위로를 받아도 여러분을 위로하기 위한 것입니다. 이 위로가 여러분 가운데 역사함으로,

여러분이 우리가 당하는 것과 같은 고난을 견뎌내는데 도움이 됩니다“(고후1:3~6)

 

이 말씀에서, 바울은 ”넘치는 위로를 받았다”고 합니다.

여기서 위로라는 단어가 여러 번 나옵니다.

 

그것은 “자신이 받았던 고난“과 그리스도의 고난을 비교 할 수는 없지만,

그 고난 속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위로를 경험했다.”고 고백합니다.

 

▶바울은 왜, 그런 말을 했을까요?

그것은 고린도교회를 걱정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그 고난 속에서 하나님을 새롭게 만났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고난도 없고, 위로도 없는 삶을 선택합니다.

우리 모두가 같은 생각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렇지 않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은 “하나님의 위로가 반드시 온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모든 고난을 이길 수 있는 “힘을 주신다.“고 생각을 확신합니다.

 

여기서 위로라는 단어는 ”보혜사 성령님“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보혜사 성령님이 ”위로자로 오셨기 때문입니다.

 

▶누군가를 위로 할 때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진정한 위로는?

① 첫째로, 먼저 위로 할 때는 “그 사람의 옆에서”, 위로해야 합니다.

위로하는 사람이 멀리 떨어져서 위로하는 게 아닙니다.

 

② 위로자는 “그 사람과 함께” 위로를 나누어야 합니다.

위로자이신 성령님은 우리 마음속에 계시니까, 우리 안에서 위로하십니다.

 

② 위로자는 “그 사람의 입장에서” 위로해야 합니다.

성령님이 위로자이니까, 누군가에게 위로자가 되게 하십니다.

 

인도에서 어느 원주민 여인에게 “늘 슬픔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 여인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는데, 모두 그만 여인을 떠났습니다.

 

어느 날, 그녀를 바라보던 선교사님이 “저는 당신과 똑 같이, 두 아들을 잃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 두 사람은 하나님의 위로를 받을 것입니다.”라고 말을 하니까,

 

그녀는 “그때부터 말을 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 말을 듣고서 여인이 달라져서 ”그 동네 사람들과 교제를 나누었다”고 합니다.

그 때부터 그녀가 상황을 받아 드려서, ”복음의 동역자로 활동했다”고 합니다.

 

(2) 둘째로, 바울은 고난을 통해서, 굳건한 소망을 경험했습니다.

 

고린도후서 1장 7-10절의 말씀을 천천히 읽으십시오.

“여러분에 대한 우리의 희망이 확고한 것은 우리와 함께 고난을 당한 것처럼, 우리와 함께 위로도 받을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힘으로 견뎌내기 어려운 고생을 겪었으며, 마침내 살아날 희망도 버렸습니다.

우리 마음에는 사형선고를 받은 것 같은 느낌이 들었지만,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을 의지하도록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토록 큰 죽음의 위험에서 우리를 건져 주셨으니, 앞으로도 건져 주실 것이며,

또 건져 주시리라 믿습니다.“(고후1:7~10)

 

이 말씀은 바울을 통해, 굳건한 소망을 경험하는 내용입니다.

 

분명한 것은 환란이 오더라도 바울은 ”마음에 사형선고를 받은 느낌“이라고 했는데,

자신은 스스로 죽고 싶었지만, ”하나님의 소망으로 이겼다“는 말씀입니다.

 

그것은 자신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만 바라보니까, “이길 수 있었다”는 고백입니다.

이 고백은 바울이 “자신의 의지를 완전히 죽이는 모습”입니다.

 

사람들은 “환경의 문제“라고 탓하지만, 그게 아닙니다.

▶확실한 것은 “내 자아가 무너지는 것”이 문제입니다.

 

바울은 나중에 말하기를, “자기 자신과의 싸움이 가장 무서웠다“고 회고합니다.

그때, 바울은 ”자기 자신에게 사형선고를 내렸다”고 말했습니다.

 

자기 자신에게 사형선고를 내리지 않았으면, “견딜 수 없었다.“고 회상합니다.

그것은 ”자기 자신에 대한 소망의식이 없었다.”는 말입니다.

 

“소망이 없을 정도“라는 것은, 절망적인 상태를 말합니다.

그러나 허물 많은 우리들은 이럴 때에, 얼마나 회개할까요?

 

그럴 때는 자기 의지와의 싸움이니까, 자기를 버리기 위해, 자신에게 사망선고를 내려야 합니다.

그런 각오가 있어야 하고, 그런 결기가 있어야 살아납니다.

 

코로나로 인한 고통은

우리를 죽이는 것이 아니라, ”살아 날 수 있다”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바울은 환란 가운데 에서도 소망의 하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바울이 쓴 로마서 15장 13절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이제 소망의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믿음 생활가운데 기쁨과 평강을 충만하게 하셔서,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흘러넘치게 하시기를 바랍니다.”(롬15:13)

 

바울은 어려운 환란 속에서도 “소망의 하나님을 바라보았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똑같은 환란을 당하지만, 어떤 사람은 믿음으로 받아드리고,

소망의 하나님을 경험했기 때문에, ”소망을 포기하지 않았다”고 간증합니다.

 

▶믿음의 삶이란 무엇입니까?

고난을 소망으로 “바꾸는 능력으로 사는 삶“ 말합니다.

바울처럼, 하나님을 의지하면, 믿음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이런 위로와 소망을 품으시며, 하나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