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의 전쟁 (고후10:1~6) 말씀: 이재훈 목사님
사람은 누구로부터 공격을 받을 때, 그 사람의 진가가 나나타납니다.
그것은 공격을 받을 때에 “그 사람 안에 있는 생각”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공격을 받는 상황에서 해명을 할 때, “왜 그랬는지?“ 그리고 ”어떤 동기로 그렇게 했는지?“를 설명하기 때문입니다.
사도바울도 그렇게 공격을 받으니까, 오히려 바울 안에 숨어있던 복음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것이 고린도후서를 통해서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자기를 공격하는 대적자들의 공격에도 굴하지 않고, 그것은 나 스스로 만든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세워졌기 때문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오히려 바울은 자기가 예수님 때문에, 죽음에 넘겨지는 것을 “영광스럽고 자랑스러운 일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그는 공격하는 사람들을 비난하지 않고, 낙심하고, 무너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대적자들과 화목하게 지내려고 우선적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는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으니, 대적자들에게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다.”고 생각하며,
자신을 포함하여 가깝게 지냈습니다.
7장에서는 위로를 받았지만, 8-9장에서는 예루살렘교회의 구제헌금에 참여하고,
10장에서는 강한 교훈과 훈계와 책망을 합니다.
고린도후서에서 바울의 복잡한 심정을 역사학자들은 과거를 재구성하려고 하지만,
편지 자체만 보더라도 정말로 하고 싶은 얘기를 먼저 하지 않고, 뒷부분에서 거론합니다.
오늘의 본문인 1-2절을 함께 읽으십시오.
“여러분과 얼굴을 마주 대하고 있을 때는 유순하나, 떠나 있으면 여러분에 대해 강경한 나 바울은
이제 그리스도의 온유와 관용으로 친히 여러분에게 권면합니다.
내가 여러분에게 요청하는 것은 내가 여러분에게 갈 때, ‘우리가 육체를 따라 행한다’고 여기는 사람들에게
내가 단호히 대처하는 것같이, ‘여러분을 강경한 태도로 대하지 않도록 해 달라’는 것입니다.”(고후10:1~2)
여기서 말하는 우리는 “바울과 그 동역자들“을 말합니다.
바울은 대적자들을 가리켜, “육체대로 행한다.”고 표현했습니다.
▶왜, 그렇게 표현했을까요?
그것은 그 당시에 가장 세속적인 방식으로 표현하고, 행동한 것이 “육체대로 행한다.”는 어구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그 이유를 4가지로 설명합니다.
(1) 첫째로, 바울이 ”여행 계획을 변경하는 것”에 대하여, 사람들은 “그를 신뢰할 수 없다.“고 비난을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변경하는 것은 ”나는 그렇게 계획을 했지만,
성령님의 인도하심으로 육체를 따라 간 것이 아니라.”고 설명을 합니다.
(2) 두 번째로, 사도로써 무자격자라는 비난과 “추천서가 없다.“는 것에 대하여,
그는 ”사도들에게서 받은 것은 없지만, “나는 주님께서 직접 받았기 때문이라”고 설명을 합니다.
(3) 세 번째로, 예루살렘교회을 위한 구제 헌금을 모금한 것에 대하여,
자기는 자비량으로 내가 여행 경비를 대고, 이 일을 하고 있으니, “위선자가 아니다”라고 사유를 설명합니다.
(4) 네 번째로, 대면하면 부드럽지만, 멀리 떨어져서 편지를 하면, 강경한 것에 대하여,
“이중인격자가 아니라“고 설명을 합니다.
바울은 대면할 때에는 유순한 사람인데, 편지를 하면 ”교리에 관한 것이니까, 강경한 어조를 나타낸다.“고 말하고,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온유와 관용으로 너희들을 기다린다.“고 설명을 합니다.
4-5절 말씀을 읽으십시오.
”우리가 가지고 싸우는 무기는 육체에 속한 것이 아니라, 견고한 요새를 무너뜨리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우리는 모든 궤변을 무너뜨리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대적해서, 스스로 높아진 모든 주장을 무너뜨리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께 복종시킵니다.“(고후10:4~5)
여기에서 바울은 요새라는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원래 요새는 ”전쟁에 사용하는 단어“인데, 아주 비장한 마음으로 ”견고한 요새를 무너뜨리는 힘은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주장합니다.
여기서 바울은 겉의 문제가 아니라, 영적인 문제를 거론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대적하여, 우리 각 사람에게 생각의 요새가 있는지?”를 밝히라고 요구합니다.
사람들은 각자 “생각의 요새에 갇혀 있다.”는 것입니다.
그 보이지 않는 생각의 요새가 사람들을 붙잡고 있으니까, 거기서 벗어나야 합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생각의 요새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까?
그것에 벗어나기 위해서는 생각의 요새를 무너뜨려야 합니다.
그 방법으로 ”그리스도에게 복종해야, 변화가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스스로 “자기의 생각이 자유롭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자유로운 것이 아니라, ”자기 생각에 매여 있는 것“입니다.
자기 생각에 묶여 있으니까, 그 생각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무신론입니다.
▶무신론은 무엇입니까?
무신론은 가장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입니다.
무신론은 ”자기의 생각을 믿음“으로 만든 주장이 무신론입니다.
이런 무신론이 인간 안에 갇혀 있다가, ”스스로는 자유롭다”고 생각을 하지만,
그것은 사탄의 생각으로 갇혀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편견이고, 선입견입니다.
그러니까 “이성과 과학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교만입니다.
천문학자라고 우주의 비밀을 다 알 수 없는 것입니다.
의사라고 해도 생명의 원리를 모두 다 알 수 없습니다.
모두 다 교만의 요새에서 갇혀서, ”자기가 안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성도 중요하지만, “이성 위에 있는 또 다른 것“은 알 수 없는 것이므로,
하나님의 권위 안에 있을 때에, 우리는 가장 자유로워지는 것입니다.
▶어떤 권위가 ”가장 참된 권위“입니까?
가장 참된 권위는 ”따르는 자에게 자유를 보장해야“ 합니다.
지도자를 ”자연스럽게 비판할 수 있는 자유“를 주어야 합니다.
따르는 자에게 ”비판 할 수 있는 자유“가 있어야, 진정한 자유입니다.
▶하나님의 권위가 왜, 진정한 권위입니까?
그것은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태초의 인간인 아담과 하와에게 자유 의지를 주어서, ”선택하도록“ 만드셨습니다.
선악과 열매를 먹는 것은 그들의 ”자유로운 선택“ 입니다.
그렇게 선택하도록 만들었기 때문에, ”하나님은 권위 있는 존재“가 되셨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이성이라는 것을 주어서,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누리도록 하셨습니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를 뱀이 꼬이고, 타락한 천사가 부추겨서, 하나님을 떠나도록 한 것입니다.
이것이 죄입니다.
▶그럼, 견고한 요새를 어떻게 무너뜨릴 수 있습니까?
그것은 ”그리스도에게 복종하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이단 이후에 모든 인간은 본능에 갇혀서, 자유를 느끼지 못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죄와 거짓에 속아서, 자유를 잃어버린 것입니다.
자유란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실제로 진정한 자유란 “무엇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입니다.
내가 음식을 “더 먹고 싶다.“고 느낄 때, 중지하지 못하는 것이 ”자유하지 못한 것“입니다.
또 화를 내고 싶은데, 화를 내는 것이 자유가 아니라, 그것을 중지하지 못하는 것이 자유입니다.
우리들은 이런 상상의 요새에 갇혀있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 요새를 무너뜨리고, 옛날에 왕정시대에 왕에게 복종하듯이, 모든 생각을 그리스도에게 복종해야 합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렇게 하기 위해, 내 생각의 요새를 무너뜨리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고, 그리스도에게 복종해야 합니다.
매일 큐티하면서 우리는 생각이라고 하지만, 하나님이 보실 때에는 행동으로 보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생각뿐만이 아니라, 모든 생각에도 모두 다 적용하여, 그리스도께 복종해야 합니다.
만약에 우리가 그렇게만 할 수 있다면, 가장 어려운 고난도 하나님의 영광으로 기쁨으로 충만할 것입니다.
그것이 그리스도께 복종하는 방법입니다.
그러므로 오직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만이 내 생각을 무너뜨리고, 그리스도께 복종하도록 도와 줄 것입니다.
그럴 때에, 우리의 마음속에 그리스도의 은혜가 충만할 것입니다.
그러한 여러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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