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이레, 90일의 기적, 사순절 회개 기도회

희생을 통한 영광을 알지 못하는 제자들 (마20:17~34) 2021.03.05

다이나마이트2 2021. 3. 5. 22:21

희생을 통한 영광을 알지 못하는 제자들 (마20:17~34)     말씀: 김홍주 목사님

 

오늘의 말씀에는 3가지 장면이 나옵니다.

①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데, 갑자기 “죽음을 예고하는 말씀”을 하십니다.

② 예수님이 요한과 야고보에게 ”무엇을 원하느냐?“고 물으니까, 청탁하는 장면이 나오고,

③ 갑자기 찾아 온 두 명의 소경을 만나서, 고쳐주는 장면이 나옵니다.

 

(1) 예수님은 갑자가 자기 죽음을 예고하는 말씀을 하십니다.

 

먼저 18-19절의 말씀을 읽으십시오.

”보라. 우리는 지금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고 있다.

거기서 인자는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넘겨질 것이고, 그들은 인자에게 사형선고를 내릴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인자를 이방 사람들에게 넘겨주면 그들은 인자를 조롱하고 채찍으로 때리고 십자가에 못 박을 것이다.

그러나 인자는 3일째 되는 날에 다시 살아날 것이다.(마20:18~19)

 

이미 예수님은 자기가 받게 되는 고난을 이미 다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죽음을 예고하고, 거기에 따를 고난을 미리 예견하십니다.

그러나 그 당시의 정치 체계상 유대인에게는 사형을 집행할 수 없으니까, “로마인에게 넘겨진다.“고 예고하십니다.

 

여기서 저는 여러 가지 의문이 생깁니다.

▶예수님은 어떻게 그런 일들을 어떻게 미리 알고 계셨을까요?

 

요한복음 10장 18절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습니다.

“누가 내게서 생명을 빼앗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내놓는 것이다. 나는 그것을 내 놓을 권세도 있다.

이 계명은 내가 내 아버지께로부터 받은 것이다.”(요10:18)

예수님은 자기 생명을 어쩔 수 없이 빼앗기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내 놓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왜? 예수님은 생명을 걸으려고 했을까요?

그것은 아버지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는 역사적인 운명을 뒤 바꾸게 하는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여기에는 예수님의 자발적인 순종이 필요해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기꺼이 자발적으로 따랐습니다.

 

요한복음 4장 34절 말씀에도,

“내 양식은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행하고, 그분의 일을 완성하려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하고, 인간을 구원하려는 하나님의 계획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스스로 자발적으로 십자가를 향해서 나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세 번씩이나 그런 말씀을 하셨을까요?

아마도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 안에서, “모든 것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알았으니까,

그 아버지의 뜻을 거역하지 않고, 동참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십자가를 이해한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요?

그것은 나중심의 삶이 아니고, 하나님 중심의 삶을 안다는 것입니다.

 

“나 중심의 삶으로 살아야 할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 중심의 삶을 살아야 하는지?“를 결단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거기에 자발적인 참여가 필수적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역사하고 계시는데, 이런 뜻을 가진 사람들에게 나타나십니다.

 

저는 인도네시아에서 선교활동을 했는데, 저를 겸손하게 하는 현지인들을 만났습니다.

이들은 파송하는 교회도 없고, 고정적으로 후원하는 단체도 없습니다.

 

이들은 정글의 깊은 곳에 있는 이슬람 지역으로 들어가서, 예수님을 모르는 영혼들을 구원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제가 만난 자매는 처음에는 아름다운 처녀였지만, 이제는 중년이 되도록 오랜 세월동안 묵묵히 시골 아이들과

무슬림들에게 성경을 가르치고, 복음을 전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이런 사람들을 만나면서 스스로 숙연해 지고, 겸손해 집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에게는 ”가치가 있는 일“이 되는 것입니다.

(2) 두 번째 장면은 예수님이 고난을 예견하는데, 제자들은 엉뚱한 얘기를 합니다.

 

20-21절 말씀을 다함께 읽으십시오.

”그때 세베대의 아들들의 어머니가 자기 아들들과 함께 예수께 다가와 무릎을 꿇으며 간청했습니다.

수께서 물으셨습니다. ‘무엇을 원하느냐’ 그 여인이 대답했습니다.

‘주의 나라에서 제 두 아들 중 하나는 주의 오른 편에, 다른 하나는 왼편에 앉게 해 주십시오’“(마20:20~21)

 

이 말씀 속에는 코미디 같은 장면이 나옵니다.

예수님은 진지한 얘기를 하는데, 어머니는 엉뚱한 얘기를 합니다.

”제 아들들을 하나는 주의 오른편에, 다른 하나는 왼편에 앉게 해 달라“는 청탁을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아마도 이 어머니의 마음에는 예수님이 메시아이니까, ”주님이 주님의 나라를 세우면,

자기들도 영광을 차지할 것“으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군림할 것으로 생각했으니까,

베드로 같은 사람보다도 ”자리를 빼앗기지 않으려고, 미리 청탁을 하는 의도“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22절에서 단호하게 질타하십니다.

”너희가 지금 무엇을 구하고 있는지 모르는 구나, 내가 이제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겠느냐?“라고 질책하지만, 그들은 그 말의 뜻은 모르고, 그들은 ”할 수 있다.”고 대답합니다.

 

예수님이 마시려는 잔은 고난의 잔이고, 죽음의 잔인데, 요한과 야고보는 영문도 모르고, “할 수 있다.“고 대답합니다.

그들은 영광의 잔을 생각하면서, 따라 다녔을 것입니다.

 

▶혹시 여러분의 생각은 그렇지 않습니까?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는 영광은 ”고난과 희생을 통한 영광”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요한은 이렇게 세속적인 모습을 보였지만,

그 후에 모든 사도들 중에서 가장 앞장을 서서 고난을 당하고, 요한복음을 쓰는 놀라운 변화를 보입니다.

 

예수님이 주는 영광은 “세상적인 영광”이 아니라, “대가를 지불할 가치가 있는 영광”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제자들을 보면서, “공동체가 어떻게 달라져야 하는지?“를 설명해 줍니다.

25-27절을 말씀을 읽으십시오.

”너희도 알듯이 이방 통치자들은 자기 백성을 위에 군림하고, 그 고관들도 권력을 행사한다.

너희는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누구든지 너희 중에서 큰 사람이 되려는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돼야 하고,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는 사람은 너희의 종이 돼야 한다.“(마20:25~27)

 

세상에서는 위 사람이 군림하지만, 교회공동체 안에서는 그렇지 않다.

교회 안에서 첫째가 되려는 사람은 ”종이 먼저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들도 그렇게 하면, 세상이 바뀌게 됩니다.

예수님 자신도 이 땅에 오신 목적이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야 말로, 창조주이시고, 주인이기 때문에, 섬김을 받기에 합당하신 분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발적으로 종이 되셨고, 섬기는 삶을 사셨습니다.

 

우리들도 하나님의 형상을 본받았으니, 그런 모습으로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살려면, 자기의 권리를 내려놓고, 다른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합니다.

 

저는 온누리교회에 와서 놀라운 것은 우리 교회에 ”대단한 사람들이 많이 계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그런 놀라운 분들이 “곳곳에서 섬기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는 사실에 더 놀랬습니다.

(3) 이제 세 번째로, 소경의 눈을 뜨게 하십니다.

 

29~30절 말씀을 읽으십시오.

”그들이 여리고를 떠날 때에 큰 무리가 예수를 따랐습니다.

눈먼 사람 두 명이 길가에 앉아 있다가 예수께서 지나가신다는 말을 듣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다윗의 자손이신 주님, 우리를 불쌍히 여기십시오,’“(마20:29~30)

 

예수님이 여리고를 떠나 예루살렘으로 출발하려는데, 소경이 소동을 벌립니다.

그때 사람들이 그들에게 ”조용히 하라“고 꾸짖음에도, 소경들은 절박하게 외칩니다.

 

그것은 예수가 “눈먼 사람에게 눈을 뜨게 한다”는 소문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여러분이 예수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저 같으면, 이 상황을 곤란해 하면서, 귀찮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에게는 너무나 중요한 시간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수행하러 가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어떻게 보면, 미리약속한 사람이 아니니까, 그냥 무시하고 지나칠 수도 있지만,

예수님은 걸음을 멈추고, 그들에게 주목합니다.

 

32~34절을 보면, “예수께서 걸음을 멈추고, 그들을 불러 물으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무엇을 해 주기 원하느냐?’ 그들이 대답했습니다.

‘주님, 우리 눈을 뜨게 해 주십시오’ 예수께서 그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그들의 눈에 손을 대셨습니다.

그러자 그들이 곧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예수를 따랐습니다.”(마20:32~34)

 

그들의 요청은 “눈을 뜨는 일“입니다.

이때, 예수님은 연민의 정을 느끼고, 소경인 거지에게 ”손을 대자“ 그들은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그 순간에 육체의 눈을 뜨게 되었고, 동시에 영적인 눈도 떳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연히 찾아 온 사람들에게도 정성을 다해 돌보십니다.

 

저는 이런 장면을 보면서, 목회자로써 때로는 부끄러움을 느낍니다.

나는 내 안에 이런 불쌍한 사람을 보면서, ”정말로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품고 있는가?”에 대해 돌아보게 됩니다.

 

우리들이 그런 사랑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돌보는 마음을 품으며,

그 사랑이 그 사람에게 흘러가기를 우리가 함께 느끼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