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이레, 90일의 기적, 사순절 회개 기도회

불신 세상을 향한 성도의 책임과 특권 (마17:14~27) 2021.02.25

다이나마이트2 2021. 2. 25. 22:23

불신 세상을 향한 성도의 책임과 특권 (마17:14~27)      말씀: 임용성 목사님

 

오늘은 간질병을 치유하시는 예수님과 메시아로써 고난을 받는 내용이 나옵니다.

24~27절 말씀을 읽어 보십시오.

”그들이 가버나움에 도착했을 때, 2드라크의 세금을 걷는 사람들이 베드로에게 와서 물었습니다.

"당신네  선생님은 2드라크마를 안 내십니까?’ 베드로가 대답했습니다. "내십니다." 베드로가 집으로 들어가니

예수께서 먼저 말을 꺼냈습니다. "시몬아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이 세상의 왕들은 누구로부터

관세와 주민세를 거두느냐? 자기 아들들이냐? 다른 사람들이냐? 베드로가 대답했습니다.

"다른 사람들로부터 거둡니다."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그 아들은 세금이 면제된다.

하지만 그들의 비위를 건드리지 않도록 바다에 가서 낚시를 던져라. 처음 올라온 고기를 잡아 입을 벌려 보면,

1세겔짜리 동전 한닢이 있을 것이다. 그 동전을 가져다가 나와 네 몫으로 그들에게 주어라.”(마17:24~27)

 

여기에서 예수님은 성전 세를 말씀하시고, 1박 2일 동안 리트릿을 갔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으로부터 치유의 능력을 받고 떠났는데, 그들에게는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런 치유의 능력은 예수님 만 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그 당시에 히브리 민족에게 간질병은 흔한 질병으로, 그것을 고치는 것은 꼭 필요한 은사입니다.

 

▶왜, 이것이 중요합니까?

예수님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재자들도 하기를 “원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아버지로부터 유업을 받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도 이런 동일한 선물(은사)을 받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너무나 당연히 “그 일을 감당할 수 있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에게는 그런 치유의 능력이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제자들은 이 일로 얼마나 위축되었겠습니까?

기원전에 간질병은 “거룩한 질병”이라고 불렸습니다.

 

그것은 “거룩한 사람이 걸리는 병”이 아니라, “종교적으로 치유해야 하는 병“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간질병은 ”어둠(달)의 영향을 받는 “미친병이라”고 부릅니다.

 

그래서 17~18절 말씀에서, “예수님은 ‘아 믿음이 없는 타락한 세대여,

도대체 내가 언제까지 너희들과 함께 있어야 하느냐? 내가 언제까지 참아야 하느냐?

아이를 데려 오너라. 그러고서 예수께서 귀신을 꾸짖으시자,

귀신이 그 아이에게서 나가고, 바로 그 순간에 그 아이의 병이 나았습니다.”(마17:17~18)

이것은 제자들에게 한 말씀이 아니고, 현장에 있는 사람들에게 한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이들에게 믿음은 아예 없고, “타락한 세대“라고 나무라십니다.

 

여기서 말하는 세대는 특정 그룹이 아니고, ”전 세대에게” 하는 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기네가 선택된 민족(선민)이라고 생각하는데, 자기들 모두를 향하여,

“모두 다 타락한 세대”라고 질타하신 것입니다.

 

18절 말씀에서 하신 일은 “메시아만 하실 수 있는 일”입니다.

그래서 어렵게 고생하는 간질병이 낫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풀이 죽은 제자들에게 20-21절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너희 믿음이 적기 때문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만 있어도, 이 산을 향해, ’여기서 저기로 옮겨 가거라. 하여도 그대로 옮겨 갈 것이다.

그러니 너희가 못할 일이 없을 것이다.”(마17:20~21)

 

제자들은 상황에 함몰되어, 약해지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러니까 아주 적은 겨자 씨만한 믿음이 있어도, 해결될 수 있는 것을 하지 못한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여기서는 상황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믿음이 중요한 것입니다.

▶왜, 제자들은 권능을 받았는데, 능력이 나타나지 않았을까요?

그것은 권능은 공식적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고, 뜻이 있어야 나타납니다.

 

믿음은 ”나의 영역”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역“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하나님의 은혜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엉뚱한 생각을 했습니다. 만약에 ”이 세상이 믿는 대로 된다면, 어떻게 될까요?“

우리의 기도가 100% 응답이 된다면, 이 세상은 천국이 아니라, 지옥이 될 것입니다.

 

만약에 그렇게 되면, 천국은 필요 없는 세상이 되니까, 문제가 심각해집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믿음은 당연히 필요합니다.

 

그러나 믿음은 공식적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포함되어 나타나는 것입니다.

웃으게 소리로, 우리가 좋아하는 방이 한방이고, 좋아하는 빵이 안전 빵입니다.

 

우리가 착각하는 것은 믿음을 ”분량이나, 능력으로 착각했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믿음을 바라보는 시선이 없고, 그저 기적만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22절 말씀에 ”인자가 사람들의 손에 넘겨질 것이라”고 했는데, 그게 무슨 의미입니까?

이 말씀은 충격적 말씀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죽음에 대한 예고“입니다.

 

이런 예수님의 말씀을 제자들은 영적인 얘기이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어요.

우리가 그것도 이해가 가는 것은 갑자기 ”예수님이 죽는다“고 얘기하고, ”또 3일 만에 다시 살아난다.“고 얘기 하시니,

누가 예수님의 그 말을 믿겠습니까?

 

성도 여러분, 여러분들도 세상적인 관점에서 보지 말고, 영적인 관점에서 보십시오.

오늘 여기에서 새벽 기도를 드리는 사람들은 모두 다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것입니다.

 

▶믿음의 증거는 무엇입니까? 그것이 응답입니까? 그것이 기적입니까?

믿음의 증거는 ”무너지지 않는 것“입니다.

 

바울은 빌립보서 4장 11-12절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습니다.

나는 궁핍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고 있습니다.

나는 배부르든 배고프든 풍족하든 궁핍하든, 모든 형편에 처하는 비결을 배웠습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분 안에서 내가 모든 일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빌4:11~13)

 

사도 바울은 자신을 자족함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처음부터 자족한 것은 아닙니다.

처음에 그는 ”쟁취형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인정받고 사랑받기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3년간의 은둔 생활에서 도피형이 되었고, 자신의 존재를 족보,

가문, 학력, 재산, 지위로 채우려 했던 모든 것이 헛된 노력임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을 배설물로 여기고, 바울은 은둔 생활을 통해,

자신의 빈 마음을 하나님 말씀 앞에 펼치게 되었습니다.

 

믿음의 증거는 바울과 같이 ”무너지지 않는 것“입니다.

나에게 어떤 일이 있어도, 무너지지 않아야 합니다.

 

그 길은 ”꺾어진 무릎“이 아니라, ”털고 일어서는 것“입니다.

무너지는 것같이도, 다시 일러서는 ”메시아를 바라보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저도 처음에 파트전도사가 로 시작할 때, 매주 교회를 버스 타고 다녔는데, 통신카드를 제시했더니,

”잔액이 없습니다.“라는 멘트가 나왔습니다.

그래서 당황하여 ”하나님, 도와주세요?“라고 속으로 기도했는데, 버스 운전사는 ”빨리 내리라.“고 소리를 칩니다.

 

할 수 없이 내려서 30분을 걸어갔던 기억이 납니다.

그러면서 속으로 ”하나님, 저의 슬픈 마음을 위로해 주시느라, 눈이 오네요.“라고 기도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그게 아니고, 저는 ”제가 분명히 아이들을 섬기려고 가는데, 이건 아니지 않습니까?“라는 원망이 내 입에서 나왔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사명자로 살아도, 모든 게 잘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피할 길을 주십니다.

 

거기에 가장 무서운 것은 경제가 아니고, 신뢰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우리에게 겨자 씨 하나만한 믿음이 있다면, 다 해결되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씨앗은 성장하기 때문에, 우리가 겨자 씨만한 믿음이 있다면, 해결됩니다.

 

씨앗은 “기초”이고, 열매 보다 더 크게 됩니다.

열매는 셀 수 있지만, 씨앗은 얼마나 커질지를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창조의 섭리는 씨앗이 먼저이고, 그 기초를 흔들지 못하게 합니다.

 

우리의 눈에는 기초가 믿음입니다.

그런 갈망이 있기에, 기적의 시초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에 맞으면, “산이라도 옮겨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일들이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혹시 코로나 때문에, 믿음을 잊어버리신 분이 있다면,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내어 주신 주님을 생각하고, 돌아오기를 바랍니다.

 

22-24절 말씀을 읽으십시오.

”그리고 그들이 죽일 것이다. 그러나 인자는 3일 만에 살아날 것이다. 그러자 제자들은 큰 슬픔에 잠겼습니다.

그들이 가버나움에 도착했을 때, 2드라크마의 세금을 걷는 사람들이 베드로에게 와서 물었습니다.

당시네 선생님은 2드라크마를 안 내십니까?“(마 17:22-24)

 

여기를 보면, 예수님이 과거에 하지 않던 말을 충격적으로 합니다.

그것은 ”자기의 죽음에 대한 예고“ 입니다..

 

이런 예수님의 말씀을 제자들은 영적인 얘기이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어요.

아직도 제자들은 영적인 생각이 전혀 없어서, 알아듣지 못합니다.

 

그것도 이해가 가는 것은 갑자기 ”예수님이 죽는다.“고 얘기하고,

”또 3일 만에 다시 살아난다.“고 얘기 하시니, 누가 예수님의 그 말을 믿겠습니까?.

 

26절 말씀에서 ”베드로가 대답했습니다. 다른 사람들로부터 거둡니다.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그 아들들은 세금이 면제된다,“(마 17:26)

 

예수님은 성전의 주인이니까, 세금을 낼 필요가 없는데, ”성전 세를 낸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아버지와 관계를 말씀하십니다.

 

”성전 세는 강한 권한을 부여한 것이니까, 여기서 말하는 물고기는 “무씨트”라는 물고기를 말하는데,

아랍어로 빛이라고 부릅니다.

 

이 무씨트라는 물고기는 산란을 할 때, “물고기 입에서 알을 품고 다닌다.“고 합니다.

이 물고기는 그런 버릇이 있어서 ”입에 무언가를 물고 다녀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동화 같은 이야기가 아니고, “예수님이 실제로 그런 일을 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하나님은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이니까, ”새끼를 품고 있는 무씨트 물고기와 같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기업을 받았으니, 우리들은 하나님이 끝까지 책임을 지십니다.

 

▶그럼, 우리들은 무엇을 해야 하나요?

우리들은 하나님의 일을 계승 받아야 합니다.

 

아들이 하는 일을 보면, “아버지가 무슨 일을 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하는 일을 보면, ”메시아를 드러내는 일“을 하십니다.

 

우리들은 이런 관점에서, 이 일을 해석해야 합니다.

나는 하나님이 원하는 일을 하고 있습니까?

그런 일을 위해, 우리는 일을 해야 합니다.

 

▶저와 여러분이 해야 하는 일은 무엇입니까?

이 험한 세상에서 성령의 능력이 내 능력이 되게 하고, 하나님의 성품이 내 성품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