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이레, 90일의 기적, 사순절 회개 기도회

영광의 자리에서 고난과 사명의 자리로 (마17:1~13) 2021.02.24

다이나마이트2 2021. 2. 24. 18:38

영광의 자리에서 고난과 사명의 자리로 (마17:1~13)        말씀: 노규석 목사님

 

주님의 평강이 여러분과 함께 하기 바랍니다.

오늘은 예수님이 변화 산에서 변하신 모습으로 말씀을 나누는 장면을 보게 됩니다.

 

예수님은 갈릴리 북쪽 가이샤랴 빌립보 지역에서 남쪽으로 내려오는데, 변화되는 모습을 보입니다.

그때가 공생애 3년 중에서 마지막 부분입니다.

 

이제 예수님이 산에서 내려오면, 예루살렘으로 가셔서  십자가를 지실 예정입니다.

그런 때에, 예수님의 대화에는 “예수님이 누구신지?“에 대해 드러내고 있습니다.

 

어제 말씀에서, ”제자들에게 “내가 누구냐?”고 물으니까, “랍비”라고 대답하기도 하고,

“주님”이라고 대답하는 것을 보면, 제자들도 서로 헷갈리는 반응을 보이고 있습니다.

 

제자들도 랍비에서 --> 주님으로, --> 하나님의 아들로 변합니다.

베드로는 얼떨결에 자기도 모르게 순간적으로

“주는 그리스도이시며,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리고 도마는 ”주는 살아계신 나의 하나님이라”고 대답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아들에서 심지어는 하나님까지 발전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들도 하나님을 하나의 위인정도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3명의 제자들 앞에서 “본인의 진짜 모습인 신성”을 드러내고 보이 십니다.

 

오늘의 말씀인 마태복음 17장 1~2절 말씀을 먼저 보십시오.

“그리고 6일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야고보의 동생 요한을 데리고, 높은 산으로 올라 가셨습니다.

예수께서는 그들 앞에서 모습이 변모 돼, 얼굴이 해처럼 빛나고, 옷이 빛처럼 새하얗게 됐습니다.”(마17:1~2)

▶우리가 여기서 배울 것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제자는 12명인데,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만이 예수님과 함께 산에 올라갔습니다.

 

우리들도 제자로만 머물지 말고, 예수님을 따라 다니세요.

예수님 옆에 있어야, 중요한 사건들을 목격하게 됩니다.

 

그러나 놀라운 것은 예수님이 산에 올라가자마자, 예수님은 순식간에 모습이 변했습니다.

예수님의 얼굴이 “해처럼 빛나고”, 예수님의 옷이 “빛처럼 하얗게” 변했습니다.

이것은 마치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천상의 모습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이미 보여주셨던 “오병이어의 기적”이 질량의 법칙을 초월한 것이라면,

“물위를 걸었던 것”이 중력의 법칙을 초월한 것입니다.

지금의 변화된 모습은 그런 법칙을 포함해서 모든 것을 초월하시는 분입니다.

 

성경의 곳곳에서 그런 모습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분은 단순히 선생이나 랍비가 아니고, 한 인간으로 신성을 지니신 분입니다.

 

오늘은 모세와 대화를 나누는데, “무슨 대화를 나누었는지?”는 기록이 없어서 우리는 모르지만,

그러나 아마도 모세와 율법에 대한 대화를 했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제자들 중에서 베드로가 “베드로가 예수에게 ’주여, 우리가 여기 있으니, 참 좋습니다.‘

주께서 원하신다면 제가 여기에다 초막 셋을 만들어 하나는 주를 위해, 하나는 모세를 위해,

하나는 엘리야를 위해 세우겠습니다.”(마17:3~4)라고 말을 합니다.

바로 그 자리에 예수님은 모세와 엘리야 3사람이 모여서 얘기하고 있습니다.

이런 자리는 거룩한 충격입니다. 이런 자리는 설명할 수 없는 영광입니다.

 

모세는 “율법의 상징”을 나타내는 인물이고, 엘리야는 “성령의 상징”이신 분입니다.

그들이 “ 한 자리에 함께 있었다.”는 것은 천국에서나 있을 법한 사건입니다

그런 자리에서 베드로가 “여기가 좋다고 초막을 지어 살자”고 말합니다.

 

▶베드로는 왜, 그런 말을 했을까요?

여기에서는 설명이 없지만, 마가복음 9장을 보면, “무슨 말을 해야 할지?를 몰라서 그랬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엉뚱한 베드로가 아무 생각이 없이 순간적으로 한 말입니다.

 

우리들도 좋은 곳에 가면, ”그곳에 머물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곳에 머물지 않고, 십자가만 생각하고 계십니다.

 

5~6절 말씀을 읽으십시오.

“베드로가 말하고 있을 때에 빛나는 구름이 그들을 덮더니, 구름 속에서 소리가 들려 왔습니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다. 내가 그를 기뻐한다.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그 소리를 듣고, 제자들은 너무나 두려운 나머지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렸습니다.”(마17:5~6)

 

베드로가 말하고 있을 때, 갑자기 성령의 음성이 들려옵니다.

그 소리는 분명히 “성부,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처음에 공생애를 시작할 때, 들려왔던 그 음성이, 다시 3년 만에 다시 들려온 것입니다.

그 때에, “빛나는 구름이 그들을 덮고서, 소리가 들려왔다.”고 했어요.

 

그 소리는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다. 내가 그를 기뻐한다.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는

세 마디 의 짧은 말씀입니다.

이 소리를 들은 사람들은 얼굴을 땅에 대고, 모두 엎드립니다.

이어서 7~8절에, “그 때 예수께서 다가와 그들을 어루만지며 말씀하셨습니다.

일어나라.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눈을 들어보니 예수 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오늘도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을 하십니다.

성부 하나님은 우리가 만날 수 없지만, 예수님은 우리가 만날 수 있습니다.

 

제가 만나 본 무슬림들은 “예수님을 만났다“고 간증을 합니다.

그들이 말하기를, 그의 얼굴에는 빛이 나고, 하얀 옷을 입었는데, 손을 내미는 손에 ”못 자국이 있다.”고 전합니다.

그러면서 “이 분이 무함마드인가?“라고 잠시 생각을 하지만,

손에 못 자국을 보고, ”이 분이 예수님이다.”라고 말을 합니다.

 

그러니까 2천 년 전에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예수님이, 오늘도 우리에게 나타나신 것입니다.

그 예수님이 저와 여러분들을 지금, 만나 주시는 것입니다.

여전히 코로나로 떨고 있는 우리들에게 찾아 오셔서, “우리를 어루만져 주시며, 두려워 말라.”고 위로해 주십니다.

 

▶예수님은 산에서 왜, 이런 경험을 하도록 시켰을까요? 그 대답은 간단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의 고통을 겪기 위해서는 "이런 천국의 영광스런 모습도 있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이 세상은 험하고 힘든 세상이므로, 이런 영적인 체험이 필요합니다.

우리도 하나님과 은밀한 이런 경험이 필요합니다.

 

▶왜? 예수님이 그렇게 하셨을까요?

그것은 영적인 경험을 시켜주므로, 제자들에게 ”자신감을 심어 주려는 목적“입니다.

 

산에서 내려오시던 예수님이 9절에서, “갑자기 엉뚱한 말씀”을 하십니다.

9절 말씀을 읽으십시오. “예수님이 산에서 내려오시면서 예수께서 그들에게 당부하셨습니다.

‘인자가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날 때까지는 너희가 본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마17:9)

 

▶예수님이 왜,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당부하셨을까요?

그것은 예수님이 “고난을 겪을 것이다.”고 십자가 사건을 예고해 주십니다.

 

십자가는 어쩔 수 없이 지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구원 계획으로 이미 예정되어 있는 사건입니다.

그러므로 당연히 지나가야 하는 필연적인 길입니다.

 

그것은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따르는 길이고, 순종의 길이고, 완성해야 하는 길입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사건의 종교“라고 말하고, 계속해서 역사적인 사건이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말씀이신 하나님“이 말씀으로 시작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땅으로 내려 오셔서, 우리와 같이 음식도 먹고, 같이 대화도 나누고,

인간적으로 지내시다가, 구원의 완성을 이루기 위해서 십자가를 지려는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중심“으로 역사가 BC와 AD로 나뉘는 것입니다.

얼마 전에 화성 탐사선이 화성에 도착하는 장면을 보았습니다.

 

지구의 종말은 ”환경이 파괴되어서 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에 의해서 오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기다리는 예수 재림의 날이 ”역사의 시작“이 되고, 지구의 종말이 될 것입니다.

 

장차, 예수님이 계시는 곳이 천국이고, 우리가 가야할 장소입니다.

그러나 그때까지 우리는 믿음의 길에서 고난을 택하신 선교사님들을 기억해야 합니다.

 

십자가의 길, 그 길은 “고난의 길”입니다.

그러나 그 길은 “인류를 구원하는 길”입니다.

 

우리에게도 그런 사명이 있지만, 우리보다도 먼저 그 길을 가셨던 베드로와 같이,

”여기가 좋습니다.“라고 안주하지 마시고, 선교사님들을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온누리교회는 안주하는 교회가 아닙니다.

복음을 전하기 위해 난민들을 돌보아 주고, 난민들을 지원하는 선교사님들을 생각합시다.

 

저도 미국 생활이 좋아서, 그곳에 안주하려고 하였지만, 하목사님은 저에게 ”아브다비로 가라”고 하셨습니다.그렇게 주저하는 저에게 자꾸 반복해서 말씀을 하시니까, 저는 순종하게 되었습니다.

 

그 길은 ”좁은 길“이고, ”아무도 가려고 하는 길“이 아니오니, 우리가 뒤에서 그들을 후원을 해 주어야 합니다.

우리도 안주하지 말고, 사명을 따라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