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이레, 90일의 기적, 사순절 회개 기도회

사랑의 능력 (요일3:17~20) 2021.02.04

다이나마이트2 2021. 2. 4. 19:10

사랑의 능력 (요일3:17~20)  말씀: 김태완 목사님

 

저는 아브다비에 파송되어 사역하고 있는 목사입니다.

오늘 아침에 여러분들과 말씀을 나누게 되어 무척 기쁘게 생각합니다.

 

이곳에도 코로나의 영향으로 어렵게 생활하지만, 열심히 감당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30% 인원만 참석하고, 모든 예배를 온라인으로 드리고 있습니다.

 

저는 이곳, 아브다비에 살면서 좋은 추억을 간작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매년 여름이 되면, 온누리교회 청년부에서 아웃리치를 오는 추억입니다.

 

2019년에도 청년부에서 왔는데, 여기에 오면 할 수 있는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곳에는 목요일 저녁이 불금으로, 서로 모여 식사도 하고, 교제를 나누는 시간을 갖습니다.

 

아브다비에는 현대적이고, 사람들이 많이 찾는 야스 몰이라는 쇼핑센터가 있는데,

그곳으로 가서 쇼핑을 하는 게 아니고, 전도를 하러 갑니다.

 

여기에 가면, 남자들은 흰옷을 입고, 여자들은 모두 검정 색 옷을 입고 다닙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우리들끼리는 사전에 약속을 하나 합니다.

 

그것은 전도의 냄새를 보이지 말고, “관광객이나 문화 체험을 하는 것과 같이 행동을 하자“는 과제를 줍니다.

 

거기에 있는 사람들이 대부분이 무슬림이니까, 그들에게 다가서서 ”말을 나눈다.”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우리는 두 명씩 짝을 져서 행동하는데, 말을 붙이고 교제를 나누기가 어렵습니다.

 

오래 동안 계속해서 여러 사람들을 만나다 보니까, 마음이 열려서 현지인들과 친해집니다.

저는 “전도는 성경적으로 훈련 받은 사람이 하는 일”이라고 생각을 했는데, 그것이 아닙니다.

 

전도는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전도는 “나는 예수 믿는 사람입니다.”라고 고백을 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여기서 제일 중요한 것은 “우리 안에 있는 두려움만 없앤다면”,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오늘은 요한일서 3장에 나오는 “사랑의 능력에 대한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오늘 읽은 말씀도 우리에게 잘 알려진 내용입니다.

 

요한일서 3장 14절의 말씀을 읽으십시오.

“우리가 알다시피, 우리는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졌습니다.

이것을 아는 것은 우리가 형제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죽음에 머물러 있는 사람입니다”(요일3:14).

 

▶여기에서 안다는 말은 “무엇을 안다”는 것입니까?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졌다”는 사실을 안다는 것입니다.

 

기독교인은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졌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믿는 자는 “날마다 구원의 감격과 축복을 체험”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마음에 예수가 계시면, 그런 감격을 느낄 수 있습니다.

우리 안에 하나님의 마음을 품으면, 예수와 동행하고, 매일 기적 같은 삶을 살게 됩니다.

 

“옮겨질 것”이라는 미래형으로 말씀하지 않고, “옮겨졌다”는 과거형으로 말씀했습니다.

그러니까 확신을 가지고, 우리는 이미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진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그 사람들이 바로 “그리스도인”입니다.

 

죽음 안에 있다가 생명으로 옮겨질 것을 바라고 사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죽음에서 생명으로 “이미 옮겨졌다“는 사실입니다.

 

▶그 증거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사랑”입니다.

그렇다고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지기 위해서,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요한일서는 하나님의 자녀가 됨을 “깊이 깨닫게 만드는 책”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의 정체성을 알게 하는 말씀이 됩니다.

 

우리가 우리들의 정체성을 알면, 우리의 삶에 변화가 나타납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실 때, 계획하신 것이 바로 이 정체성입니다.

 

예수님이 그 정체성을 회복시켜 주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요한일서를 읽은 사람은 이미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마음속에서 늘 가책을 받고 있습니다.

성경에서는 그것을 “가인의 예로 요한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12절을 보면, “우리는 악한 자에게 속해, 자기 동생을 죽인 가인처럼 되지 말아야 합니다.

대체 왜 가인이 동생을 죽였습니까?

그것은 자기의 행위는 악하고, 동생의 행위는 의로웠기 때문입니다.”(요일3:12)


여기서 “가인 같이 하지 말라”는 것은 “가인은 사랑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저는 이 말씀에서 우리는 사랑에 대해,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가인은 땅의 열매로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습니다.

가인의 동생 아벨도 양의 첫 번째 새끼와 기름으로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아벨의 제사는 받으시고,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가인은 심히 분노하였고, 그로 인해 악해졌습니다.

그리고 아우 아벨이 들어 욌을 때, 가인은 동생을 쳐서 죽였습니다.

 

▶가인이 아벨을 사랑하지 못한 원인이 무엇입니까?

동생과 자기를 “비교했기” 때문에, 그것은 동생을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피를 나눈 형제는 “비교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서로 사랑하는 대상”입니다.

 

가인이 제사를 드렸는데 자기의 제사는 받지 않으시고, 아벨의 제사]만 받았다면 비교해서 낙심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기 동생의 제사를 받아주셨다“는 것에 박수를 쳐야 합니다.

우리들은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진 사람”입니다.

 

▶왜, 그럴까요?

그러니까 기독교인은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졌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사랑을 나누면서 “날마다 구원의 감격과 축복을 체험해야” 합니다.

 

말로만 사랑하지 말고, 진정으로 “사랑을 실천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속에 그런 하나님의 사랑의 마음을 품고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항상 어떤 가책 때문에, 갈등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을 때는 우리 마음에 하나님의 사랑이 심겨집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인격이 마음에 있기 때문에, 그것이 씨앗으로 심겨져 있기 때문에,

우리의 삶속에서 그런 사랑이 나타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사랑은 자기 (사랑)로 그치면 안 됩니다.

그렇게 받은 사랑은 반드시 다른 사람에게 나누어 주어야 합니다.

 

그 사랑을 다른 사람이 받을 수 있도록 전해 주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가 하는 전도하는 목적이 되어야 합니다.

요한일서 3장 20절 말씀을 읽으십시오.

“혹시 우리 마음에 가책을 받는 일이 있다 할지라도 우리가 확신을 가져야 할 것은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 보다 크시고, 모든 것을 아시기 때문입니다.”(요일3:20)

 

여기서 “가책을 받는 일”은 하나님 앞에 설 때, “떳떳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이 지적할지 모르지만, 자책할 것이 없을 정도로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요구하는 사랑”입니다.

우리가 죽음 앞에 섰을 때, 이런 마음으로 자책하는 마음으로 사랑해야 합니다.

 

그렇게 사랑을 한다면, 확실히 받는 축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여러분,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조건”은 아닙니다.

 

우리는 간신히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녀가 되었지만, 그냥 간신히 구원받는 자녀가 아니라,

더 나아가 구원의 감격과 축복을 체험하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진 사람“으로서 예수님이 갖고 계시는

“영원한 생명이 우리 안에 있다“는 것을 기억하기 바랍니다.

 

저는 아브다비에 살면서 여러 가지를 느낍니다.

아브다비에서 6시간 비행기를 타면, 부르카나 파소라는 나라에 갈 수 있습니다.

 

이곳은 서부 아프리카 지역이라 비도 많이 내리고, 날씨도 좋지 않습니다.

잠시 오리엔테이션을 받고, 인근에 있는 대학에 캠퍼스 전도를 하러 갑니다.

 

잔디에서 벤치에 앉아 있는 사람들에게 저를 소개하고 전도를 시작하는데,

의대에서 공부하는 의대생입니다. 그도 역시 무슬림입니다.

 

저는 두려움이 생겨서 주저했지만, 확신을 가지고 여러 가지 말들을 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그 친구는 “예수를 받아 드리고, 교회에 나가겠다.”고 의사를 밝힙니다.

 

제가 그에게 ”무슨 말을 했는지?” 저는 자세히 기억이 나지 않지만,

통역하는 자매의 말에 의하면, “예수를 받아 드리겠다고 말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랑을 나누는 일”이고, “사랑을 실천하는 일“입니다.

분명히 제에게는 그런 확신이 생겼습니다.

우리가 그런 확신을 가지고, 다른 사람에게 나아갈 때, 우리를 축복의 통로로 사용하실 것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두려움을 극복하는 일“입니다.

우리가 두려움만 극복하면,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신앙을 갖고 있지만 복음에 확신이 없다면,

”그런 훈련의 기간을 이용하여, 확신이 생겼다”는 간증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그런 시간을 통해, “우리가 확신할 수 있도록” 역사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선교사로 떠나지는 못하지만,

내가 있는 위치에서 다른 사람에게 사랑을 나누어 주는 선교사의 역할을 수행해야 합니다.

 

우리 자신이 선교사가 된 마음으로 이 일에 동참할 때, 하나님이 우리를 칭찬하실 것입니다.

오늘, 요한일서의 말씀대로, 예수님의 사랑을 이해하고, 그 사랑을 다른 사람에게 실천할 때,

우리에게는 놀라운 변화가 일어날 것입니다.

 

믿지 않는 분들에게 예수님을 소개하고 알려줄 때, 다른 사람에게 좋은 영향력으로 작용하여,

그 사람을 살리는 사랑의 통로가 되고, 우리가 축복의 통로가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