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이레, 90일의 기적, 사순절 회개 기도회

소홀히 하지 말아야 할 것 (행6:1~7) 2021.01.27

다이나마이트2 2021. 1. 27. 20:24

소홀히 하지 말아야 할 것 (행6:1~7)     말씀: 이철희 선교사님

 

저는 온누리교회 청년부를 거쳐서, 1996년도에 몽골로 파송되어 갔습니다.

막상 그곳에 도착해 보니, 몽골 전체에 교회가 한 군데도 없었습니다.

 

저는 그때부터 언어를 열심히 배우기 시작했고, 현지인들과 만나며 교제를 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여러 가지 문제들이 벌어졌는데, 그것은 교인들끼리의 문제입니다.

 

1절 말씀을 읽으십시오.

“이 무렵 제자들의 수가 점점 늘어났습니다.

그때 그들 가운데 그리스 말을 하는 그리스파와 히브리말을 하는 히브리파로 나뉘어 불평이 생겼습니다.”(행6:1)

 

이 예루살렘교회가 “평안하다”고 생각했는데, 두 개 파로 나누어 졌습니다.

이것은 음식을 분배하는 과정에서 생긴 일입니다.

 

교회에서 구제 사역을 하는데, 사역자 간에 의견충돌이 일어난 것입니다.

우리 교회에도 그런 일들이 있었습니다.

한 형제가 갑자기 교회에서 기타를 들고 없어졌고, 교회는 당장 예배하기가 어려워졌습니다.

 

성령 충만하여 “한번 성령을 받았다.”고, 초대교회에 문제가 없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문제가 없으려면, 우리들이 계속 성령 안에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계속 성령 안에 머물러 있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사탄이 우리를 죄에 빠지게 하고, 우리를 유혹에 빠지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은 교회가 작으면, 갈등이 없을 것으로 생각하지만, “교회가 작다”고 갈등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의 규모가 크거나, 작거나, 어디에나 갈등은 언제나 존재합니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초대교회에도 밖으로부터는 핍박이 있었고, 안에서는 갈등이 시작되었어요.

그로 인해 성도들은 큰 두려움에 빠졌고, 오늘 본문과 같이 복잡하게 나옵니다.

 

이것은 일종의 “사탄의 반격”이고, 이것이 우리들의 관계에 상처를 주고,

서로 간에 불평을 만들어 내는 “갈등의 원인”이 됩니다.

 

아마도 여러분들도 이런 어려움이 있을 것으로 생각이 됩니다.

가정의 문제나, 직장의 어려움이나, 건강의 문제로 고민하시는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한 가정이든, 한 교회이든, “한 공동체에서 분열이 있다“는 것은 큰 문제입니다.

오늘 말씀에 나오는 예루살렘교회의 문제는 말씀과 기도를 제대로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상당히 당황스런 진단인데, 초대교회가 어떤 사람들입니까?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부르짖었던 사람들인데, 그들이 ”말씀과 기도를 소홀히 했기 때문“이라는 것은

아주 큰 문제입니다.

그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본질이 아닌 비 본질을 붙잡고, ”다툼이 있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일입니다.

 

우리가 중요하게 여기는 본질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인데,

우리의 소망인 예수님을 멀리하고, 말씀을 제대로 지키지 않았기 때문에, 문제가 생긴 것입니다.

 

주님이 세운 예루살렘교회에도 ”교회 안의 문제“로 문제가 생긴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 생활에도 이런 일들이 나타납니다.

 

저는 어렸을 때, 핸들이 삐뚤어진 자전거를 타본 경험이 있습니다.

핸들이 잘못된 자전거는 나의 의도와 상관없이 자꾸 엉뚱한 방향으로 나갑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신앙의 핸들도 잘 조절하지 않으면, 시궁창에 빠질 수 있습니다.

그것은 내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예수님을 이용하기도 하고, 나 자신의 명예를 위하여 예수님을 버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히브리서 11장 말씀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은 보이지 않는다.“고 했으니,

우리는 그 이면에 있는 것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저는 그 때에 그런 것을 몰랐기 때문에, ”선교사가 다 그런 것이지!“라고 자포자기 하며,

”나에게 어쩔 수 없는 고난이라”고 받아드리기도 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이 겪고 있는 문제들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러나 저는 처음에는 그런 걸 몰랐다가, 그런 기회가 생겼습니다.

저희 교회에 한 자매가 있었는데, 그녀는 초등학교도 제대로 다니지 못했는데,

새벽기도를 한 번도 빠지지 않는 교인입니다.

 

그런데 그녀의 남편은 주일 날 갑자기 교회에 난입하여, 그녀를 끌고 나가는 사람입니다.

저에게도 나타나 “죽이겠다”고 소리를 지르며, 아내를 데리고 나갑니다.

 

속으로는 화가 났지만, 어쩔 수 없어서 저는 아무 말을 하지 못하고, 쳐다만 보았습니다.

선교사로써 너무나 민망하고, 너무나 창피했지만, 어쩔 수 없었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주일 강단에서 바라보니, 교인들 중에서 아내 옆에 단정하게 앉아있는 그 청년이 보였습니다.

저는 이게 무슨 상황이지?“라는 생각이 들어서, 설교가 되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예배가 끝나고 물어보니, 이 남편이 화장실에 가고 싶어서 불에 타다 남은 성경 쪼가리를 들고 화장실에 갔는데, 그 쪽지에서 ”어떤 구절을 보고 놀랬다.”고 합니다.

 

그것은 “회개하라. 너희가 회개하지 않으면, 결단코 너희를 용서하지 않겠다.”는 말씀을 본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그 말씀을 이해하고, 아내에게 용서를 구하고, “예수를 믿기로 작정했다.‘고 합니다.

 

그 사람의 말에 의하면, “내가 아내를 너무 핍박했구나!”라고 후회하고,

“그 때부터 아내와 함께 예수를 믿기로 했다“는 말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일은 쉬운 게 아닙니다.

지금까지 자기가 생각했던 것들을 내려놓고, 다시 시작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이와 같이 신앙의 영점 조절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7절의 말씀과 같이, 널리 퍼지게 되었습니다.

제가 몽골에서 사역하던 일 가운데, 한 가지를 소개하려고 합니다.

어느 날 한 여자 성도님이 5살 난 어린 딸을 데리고 저를 찾아 왔습니다.

제가 어째서 왔느냐?”고 물어보니, “선생님 저의 딸이 태어나서부터 지금까지 머리털이 나지 않아서 고민입니다.

이 아이에게 머리털이 나도록 기도해 주세요?”라는 부탁입니다.

 

저는 처음에는 머리를 깎은 줄로 알았는데, 자세히 보니 머리털이 없었습니다.

저는 그 말을 듣고, 두 가지를 생각했습니다.

 

①하나는 이 자매에게 기도를 하면, 정말로 머리가 난다“고 믿고 있는가?”이고,

②또 하나는 “내가 기도하면, 이 아이에게 머리가 날까?“라는 의문이 들면서,

”용한 의원을 찾아가지 왜, 나에게 찾아 왔을가?”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어쨌든 저는 기도를 요청하니까, 솔직히 대충 기도해 줬습니다.

 

그런데 한 달이 지난 다음에, 저에게 다시 찾아와서 “간증을 하겠다“고 해서 시간을 주었는데,

”놀랍게도 딸의 머리에서 시커먼 머리카락이 나고 있었다.”고 간증을 했습니다.

 

그 자매가 “놀라운 기적이라”고 말하는 그 모습을 보면서, 오히려 제가 더 놀랬습니다.

저는 제 눈으로 보았기에 너무도 신기하고, 신묘하여 그날 저에게 깨달음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저는 주님만 바라보고, 주님만 생각하며, 하루 종일을 사역하다 보니,

나도 몰랐던 치유의 은사가 “나에게도 있었구나?“라는 생각이 듭니다.

 

나에게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지는 구나?”라는 의문과 놀라운 일에 감격했습니다.

그것은 내 안에 게신 주님의 능력이 그녀에게 전달되어, 이렇게 엄청난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서 기다리노니, 내가 그와 더불어 지낸다.”는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마음에 노크하며, 언제나 우리에게 찾아오십니다.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이런 기적과 같은 일들이 벌어집니다.

예수가 저의 목표가 되었기 때문에, 이런 엄청난 일이 나에게도 생긴 것입니다.

 

예수님과 교제하며,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지난 20년을 몽골에서 지내다 보니까,

생각나는 것은 “선교는 예수님과 동행하는 일이다”는 생각이 듭니다.

 

초대교회에도 “세워진 사람들”의 특징이 있는데, “문화적인 충격을 껴안았다.”고 했어요.

그 증거가 5절 말씀에 나오는데, “그들은 믿음과 성령 충만한 사람, 스데반과 빌립, 브로고로,

나가노르, 디몬, 바메나, 유대교로 개종한 안디옥사람, 니골라를 뽑았습니다.” (행6:5)

 

새롭게 세워진 사람을 “모두 끌어안았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이 갈등의 시작인데, “다른 이들을 모두 끌어안았다.”고 했습니다.

 

▶긴장과 갈등을 해소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모두를 끌어안아서, “다문화 공동체”로 만들어야 합니다.

 

초대교회가 “문화적 편견”을 내려놓고, 다문화 공동체로 만들은 결과입니다.

그리스파 유대인을 누락시킨 것은 단순한 행정착오가 아니라,

히브리파 사람을 기준으로 뽑다 보니까,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7절 말씀을 읽어보면, “이렇게 해서 하나님의 말씀은 계속 퍼져 나갔으며, 이로써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들의 수도 많이 늘었고, 더욱이 수많은 제사장들도 이 믿음에 순종하게 되었습니다.”(행6:7)

 

그때부터 교회는 심각한 위기를 극복하고, 성장해 나갔습니다.

교인의 수도 늘어나고, 절대로 믿지 않을 것 같던 사람도 오직 예수만 따르게 되었어요.

 

여러분도 그런 기적을 체험하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목표를 예수님에게 맞추면, “그런 능력이 나타나는 법“입니다.

 

저도 그런 과정을 겪었는데, 예수에 초점을 맞추니까, 저의 열등감이 사라지고,

안정을 되찾게 되어서, 교회도 성장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사람들이 있는 곳에는 “갈등”이 있기 마련입니다.

여러분 가운데, 아무 갈등이 없기를 바란다면, “공동묘지로 가라.”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긴장”은 창조적으로 끌어안아야 해결됩니다.

교회는 어떤 “이념적인 차이”도 뛰어넘는 창조적인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세상은 갈등 속에 있지만, 그것을 뛰어넘어 “아름다운 공동체”가 유지되어야 합니다.

교회가 세상에 보여주어야 할 것이 바로 이런 것입니다.

 

성경을 가까이 하고, 성경일독을 하며 새벽기도에 나오시는 여러분들도

“소망의 복음을 붙잡고 있는 여러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