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이레, 90일의 기적, 사순절 회개 기도회

용서받은 죄인이 다른 죄인에게 (행10:24~26) 2021.01.25

다이나마이트2 2021. 1. 25. 18:42

용서받은 죄인이 다른 죄인에게 (행10:24~26)      말씀: 정민영 선교사님

 

오늘부터 두 주간은 선교사님들의 말씀을 들으려고 합니다.

오늘은 성경번역 선교사로 활동하시는 정민영 선교사님의 말씀을 듣겠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으면서 충격적인 내용을 읽을 때가 있습니다.

저에게는 사도행전 10장의 내용이 그런 내용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도행전 10장이 보여주는 핵심은 세상에게 희망을 주기도 하고, 또는 절망을 주는 집단이 교회인데,

그런 교회가 “세상에서 어떤 영향을 주는가?“를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가 그냥 읽으면, ”이방인 고넬료] 예수 믿는 사건”으로 보기 쉽습니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베드로가 “선교적인 회심을 해야 하는 것”을 깨닫게 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고넬료를 만져주는 것이 아니라, 베드로를 먼저 만져 주십니다.

지금은 언택트 시대이지만, 선교사라는 개념은 내면적인 변화가 요구됩니다.

 

이 사건을 자세히 보면, 하나님은 먼저 베드로를 바뀌게 만듭니다.

이렇게 “베드로의 회심”하게 만들어, 결국은 고넬료를 변하게 유도합니다.

 

선교사님들 모임에서 하는 말인데, “예수님은 무신론자와 싸우시지 않고, 예수님은 종교인들과 싸운다“고 말합니다.

혹시나 우리들도 종교 꾼이 되어 여기에 왔다면, 걱정스럽습니다.

 

▶복음이 세상에 전해질 때, 장벽은 무엇일까요?

사람들의 언어와 문화가 다른 것도 큰 장벽이고, 무관심과 냉대, 고집과 불신도 “큰 장애”입니다.

그러나 이것보다 더 무서운 것은 사람들의 편견입니다.

 

사도행전에서 복음을 증거 하는 가장 큰 장애는 선입견과 편견입니다.

선입견은 주관적인 판단으로, 때로는 선입견이 틀리는 경우도 있지만, 그러나 문제는 편견입니다.

 

편견은 사람들의 잘못된 생각이 오래 동안 지나면서, 편견으로 굳어집니다.

사람들의 마음속에 있는 편견이 쉽게 사라지지 않습니다.

 

베드로를 보면, 3년 동안 예수님을 동행하며 따라 다녔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던 사람입니다.

예수님이 나사로를 살리듯이, 베드로는 죽은 자를 살리는 기적도 보여 주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의 마음속에 있었던 “유대인들의 편견“이, 그에게도 있었습니다.

베드로는 성령이 그의 마음속에 있었기 때문에, “깨달은 사람”입니다.

 

선교는 용서받은 죄인이 다른 교인에게 수평적인 이동을 하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수제자인데, 그런 베드로를 바꾸기 어렵습니다.

 

그것은 자기 의에 충만한 바리새인들에 대한 경고입니다.

사도행전 10장이 굉장히 긴 것은 베드로가 바뀌지 않으니까, 그를 계속 설득하다 보니까, 길어 진 것입니다.

 

사람이 깨지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사람이 깨지기 위해서는 그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계시”가 들어있어야, 깨지게 됩니다.

 

▶하나님이 베드로에게 환상을 보여 주신 것은 무엇일까요?

당시 유대인들은 이방인의 집에는 가기도 싫어했던 사람입니다.

그런 베드로에게 환상을 보여준 것은 “고넬료의 집”을 찾아가기 위해서 보여 주셨어요.

 

그 당시의 유대사회는 이방인들을 개와 같이 취급하여, 절대로 상대하지 않았어요.

그러나 하나님의 환상을 통해, 베드로는 고넬료를 받아들이고, 집으로 찾아 갑니다.

 

그 집에 찾아간 베드로는 그때, “하나님의 계시”를 알게 됩니다.

사도행전의 역사에서, 복음을 전하는 사람에게 “깨어짐”이 나타납니다.

▶그럼, 베드로는 어떤 깨달음이 있었나요?

①첫째는, 인격적인 편견이 깨어졌던 것입니다.

 

베드로가 깨달은 것은 “하나님은 겉모양으로 차별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겉모양으로 사람을 차별하거나 인종을 차별하지 않습니다.

 

우리나라는 민족 가운데서도 “지역적인 편견”을 가지고 있습니다.

크지도 않은 작은 땅에서 “같은 국민”인데, 서로 냉소하며, 달리 취급합니다.

 

▶우리의 깨달음은 “언제 깨닫게 되나요?

그것을 알려면, 선교지에 가보아야, 금방 알게 됩니다.

 

▶편견을 없애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그런 편견을 찾아내고, 남아 있는 편견을 발견하는 것이, 편견을 없애는 길입니다.

 

우리의 도움이 필요해서 “헌신하라.”고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를 변화시키려는 의도가 있기 때문에, “우리에게 헌신하라.”고 요구하는 것입니다.

 

②둘째로, “하나님의 선택“은 편견이 깨지고, 우리를 <증인>으로 세우셨습니다.

 

▶왜 그런 깨달음을 우리에게 보여 주셨습니까?

우리를 증인으로 세우기 위해, 보여 주셨습니다.

 

▶왜, 베드로를 고넬료에게 보냈습니까? 직접 가도 되는데, 왜 그랬을까요?

그 대답은 “우리 안에 편견이 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에게 하던 사역을 그만두고, “해외로 나가라”는 말이 아닙니다.

 

▶고넬료를 직접 만나도 되는데, 복잡하게 베드로를 거친 이유는?

그것은 복음을 전하는 베드로를 먼저, 깨닫게 만드시고,

복음을 듣는 고넬료도 동시에 변화되게 만들려는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베드로에게 “선교적인 회심”이 없었다면, 고넬료는 여러분에게 무엇입니까?

그는 “투명 인간”이거나, 아마도 “거부의 대상”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의 고넬료는 누구입니까?

혹시 “저 사람과 무슨 상관이냐?”고 묻는 사람이라면, 아주 공허합니다.

아마도 그런 사람에게 고넬료는 “투명인간이거나, 거부의 대상으로” 보였을 것입니다.

 

베드로에게는 당연한 일이지만, 드디어 베드로가 고낼료의 집으로 갑니다.

고넬료의 입장에서는 황송하지만, 베드로는 “나도 당신과 똑 같은 사람입니다.”라고 겸손하게 말을 합니다.

 

이방인을 손톱의 때로 여기면, 선교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선교는 죄로 인해 존엄한 사람이 되었듯이, 회심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다른 사람에게 다가가야 합니다.

하나님은 한 인종을 만드시고, 또 다른 인종도 만드셨습니다.

 

예수님은 수평적으로 다가오신 것이 성육신(예수님이 인간의 몸으로 오신 사건)입니다.

예수님은 신적인 존재로 오지 않고, “어린 아기의 몸으로” 오셨습니다.

 

그리고 30년 동안 유대인의 아이로 성장하셨고, 우리에게 수평적인 존재로 다가오셨습니다.

100년 전에 아주 감동적인 선언이 있었는데, 그것은 “선교사를 보내 주지 말고, 친구를 보내 달라”는 호소입니다.

 

선교는 “갑질 하는 것”이 아닙니다.

선교는 “동냥해 주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수평적으로 다가갔듯이, 현지인의 친구로 다가가야 합니다.

인간적인 존엄을 가지고, 친구를 대하듯이, 접근해야 합니다.

 

1907년에 평양대부흥운동이 있었지만, 그 보다 4년 전에 1903년에 원산에서 부흥운동이 일어났습니다.

거기서 메디칼 닥터가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고백을 합니다.

 

그것은 “현지인을 똑같은 인간으로 보는 회개운동“입니다.

우리는 ”정죄한 인간“으로 그들에게 ”솔직한 마음“으로 다가가야 합니다.

 

우리는 이런 질문을 나에게 던집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보내주신 고넬료는 누구입니까?

 

내가 그에게 혹시나 차별하고, 갑질은 하지는 않았습니까?

이런 것들을 회개하고, 선교적인 존재로 성찰하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우리들의 몫입니다.

우리는 그 부르심 앞에서 조용히 묵상을 해야 합니다.

 

성령님은 선택한 사람에게만 나타납니다.

그 땅을 밟은 사람에게 그곳을 알게 하고, 그곳으로 가는 것입니다.

 

우리 온누리교회는 지난 30년을 지내오면서, 선교에서 깨달은 것은 “우리 자신이 변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만약에 우리에게 “그런 깨달음이 없었다.”고 한다면, 그동안 우리는 복음을 전한 것이 아니고,

그냥 “우리의 일을 한 것 뿐이라.“고 단정 지을 수 있습니다.

 

이렇게 우리가 선교를 하면, “내가 변하는 축복을 얻게 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는 계속해서 ”선교하는 교회“로 나가는 것입니다.

 

우리 스스로는 “깨질 수 없는 편견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복음을 전하다 보면, 우리 스스로에게 그런 깨달음을 느끼게 합니다.

 

선교로 부름 받은 온누리교회에 그런 헌신이 필요하고,

선택 받은 우리들은 “그런 사명”을 깨닫고, 온 세상 사람에게 복음을 전해야 하는 이유가 됩니다.

 

우리도 그 사람 보다 “먼저 용서받은 죄인”입니다.

우리는 나에 의를 가지고 나가는 것이 아니라, 통회하는 마음으로 나가야 합니다.

 

“나도 용서받은 죄인“인데, 혹시 ”선교지 교민을 무시하지는 않았는지?“를 먼저 반성하고, 그들에게 다가 가야 합니다.

우리는 십자가]앞에서 주님을 바라보고 비판하거나 무시하지 말고, 회개하는 마음으로 그들을 품어 주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