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법을 완성하러 오신 예수님 (마5:17~26) 말씀: 이재훈 목사님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면서 하신 말씀이 그 당시에는 ”충격적인 말씀”입니다.
“하늘나라가 이 땅에 왔다.”는 말씀을 듣는 율법학자들이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거듭나지 않으면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는 말을 이해할 수 있었을까요?
이런 말들을 유명한 율법학자들에게는 처음 듣는 얘기이므로, 무척 당황했습니다.
그 당시에 “하나님을 더 많이 알고 있다“고 자부하던 바리새인들은 자기들이 만들은
종교 체제를 부정하는 발언이라고 생각하여, 예수님을 시기하고, 질투하여 배척하기 시작했어요.
그래서 예수님을 잘못된 이단으로 몰고 가면서, 예수님을 미워하고 죽이려했던 것예요.
그러나 예수님은 산상수훈의 말씀을 통해서, 하늘나라의 ”의로운 삶“을 전파했습니다.
▶왜, 예수님은 그런 말씀을 했을까요?
그 당시의 유대인들은 “이미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라”고 믿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특히 율법학자나 바리새인들은 율법에 빠져서 생활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의 자녀로써 이미 율법을 받았고, 그 율법을 지키고 있으니까, 당연히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거듭나야 하나님나라에 들어간다.“고 말씀하니까, 문제가 되어 충돌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하나님 나라로 찾아간 것이 아니고, ”하나님 나라가 우리에게 왔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자세히 보면, “또 다른 종교를 만든 것”으로 생각 할 수도 있습니다.
종교로 하나님 나라로 갈 수는 없습니다.
인간이 바다를 건널 수 없듯이, 인간의 힘으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하늘이 우리 마음에 열려 있어야, 들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은혜이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찾아오신 것입니다.
그분의 이름이 은혜이고, 길입니다.
그리고 세상의 빛이고, 양의 문이고, 생명으로 나가는 길입니다.
이것이 하늘이 땅으로 임하는 사건입니다.
이 기이한 현상을 예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선포하고 다녔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것은 한 마디로 회개와 믿음입니다.
회개는 “돌이키는 것”이고, 믿음은 “그 방향으로 나가는 것”입니다.
그런 예수님의 말씀에, 대중을 선동하는 선동가로 몰아갑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산상수훈]을 통해서, 율법학자들이 가르쳤던 율법이 잘못되었고,
“자신들이 만든 것이라“고 정면으로 대항하여 설파합니다.
지금 율법학자들의 주장은 ”본질에서 벗어난 왜곡된 율법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나는 너희에게 이렇게 이르노니, 나를 통해 하나님 나라를 똑바로 가르쳐 주겠다”는 의도입니다.
예수님은 구체적으로 조목조목 자세하게 설명합니다.
“너희가 이렇게 들었으나, 그것은 아니고, 이것이다.”라는 설명입니다.
그것은 율법은 옳으나, “율법학자들의 해석이 다르다“는 주장입니다.
율법학자들이 ”해석을 잘못하였고, 왜곡되게 전달한다.”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세 가지 사항을 말씀하십니다.
(1) 첫째로, 예수님은 “율법을 완성하러 왔다“고 선포합니다.
마태복음 5장 17-18절 말씀을 읽으십시오.
“내가 ‘율법이나 예언자들의 말씀을 없애러 왔다’고 생각하지 말라.
없애러 온 것이 아니라, 완전하게 하러 온 것이다”(마5:17)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과 땅이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 가운데 한 점,
한 획이라도 없어지지 않고, 다 이루어질 것이다.”(마5:18)
▶우리가 율법에 관해서 오해를 하는데, 문제가 뭘까요?
그것은 구약시대에 만들은 율법 그 자체는 꼭 필요하고, 중요하고, 완벽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율법이 잘못된 것이 아니고, 그 법을 지킬 수 없는 게 문제입니다.
그래서 율법만을 강조하는 율법학자들이나, 바리새파 사람들을 미워하는 거지요.
복음은 율법을 반대하지는 않습니다.
예를 들어 십계명도 따라야 하고, 십일조도 지켜야 해요.
율법은 “하늘의 법”이니까 지켜야 하지만, 그러나 율법을 지키기가 너무나 어렵습니다.
그것은 성경을 문서로 보고, "사람들이 편집하다 보니까" 그런 문제가 생긴 것입니다.
율법 자체는 일점, 일획도 틀린 것이 없어요.
그러나 문제는 구약의 율법이 사람들이 지키기 어우니까, “지킬 수 없는 것을 지키라"고 하니까,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율법을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성하러 왔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율법주의와 율법적이라는 말은 잘못된 표현이지만, 율법은 잘못된 게 아닙니다.
레위기에 나오는 “먹지 말라”는 것이 잘못 된 것이 아니라,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중세 시대에 전염병이 창궐하여 걱정하기에, 그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것이 신앙적인 의미이건, 시대마다 작용점이 다르므로 율법은 거룩하지만,
해석을 다르게 하는 것은 옳지 않은 것입니다.
그렇다고 예수님의 말씀이 “율법을 지키면서 완전해 질 수 있다“는 것은 아닙니다.
스스로 보여 질 수 없는 인간이기에, 그렇게 [예시]하는 것입니다.
(2) 두 번째 의미는 ”율법을 따라 사는 삶을 제대로 해석하라“는 말씀입니다.
19-20절 말씀을 함께 읽으십시오.
“이 계명가운데 아주 하찮은 것 하나라도 어기고, 또 남에게도 그렇게 하도록 가르치는 사람은
하늘나라에서 가장 작은 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
그러나 누구든지 이 계명을 지키며 가르치는 사람은 하늘나라에서 큰 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율법학자들이나 바리새파 사람들보다 더 의롭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마5:19~20)
예수님은 당시의 서기관과 바리새파 사람들과 “다르다”는 것을 가르치기 시작했어요.
그것은 그들이 지키는 율법은 “자신들이 어기고, 또 남들도 어기게 만드니까” 그런 것입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합니까?
율법은 자신도 지키고, 다른 사람들도 지키게 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 당시의 바리새인들은 철저하게 율법을 지켰어요.
그러나 유대인들이 지킨 것은 “율법을 자기 나름대로 해석하여” 그것을 지키려고 했어요.
그러니까 구약이 너무 어려우니까, 자기 나름대로 해석한 미쉬나를 만들었고,
그 미쉬나를 또 다시 재해석하여 만든 것이 탈무드입니다.
그러니까 탈무드도 “율법의 해설서”인데, 생활 속에서 행동해야 하는 생활규칙 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매우 편파적이고, 인간적인 해석입니다.
요즘 우리에게도 이런 일들이 나타납니다.
십계명의 부정적인 명령은 긍정적인 명령을 포함하는 것입니다.
“살인하지 말라”는 것은 그런 감정을 제거해야만,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적극적인 긍정의 명령은 부정적인 명령을 포함하는 말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하여, 자기 맘대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구약의 율법을 몰라도 성령 안에 살고 있으면, 구약을 그대로 실행하는 것과 같으니,
제대로 해석하고 살라”는 말씀입니다.
(3) 세 번째 의미는 우리는 성령을 따라 사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법이 율법인데, 타락한 인간이 지키지 못하니까, “성령을 받은 사람은 킬 수 있다“는 것입니다.
율법은 의무감이지만, 성령의 능력은 우리가 하고 싶은 것을 따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령 안에 사는 사람“은 율법대로 사는 사람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말씀하는 더 나은 의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되면, 그런 의에 따라 살게 됩니다.
▶그 핵심은 무엇입니까?
그 핵심은 ”부정적인 명령은 긍정적인 명령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21절에 나오는 “살인하지 마라. 살인한 사람은 누구든지 심판을 받을 것이다.”를 여러분은 어떻게 받아드리십니까?
살인한 사람은 “누구든지 심판을 받을 것이다“라는 말은 맞는 말 같지만, 실제로는 틀린 말씀입니다.
십계명에는 <살인하지 말라>고 했어요. 그러나 막상 살인을 하면,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 것인데,
유대 사람들은 자기들의 기준으로 판단하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은 그런 바리새인들을 꾸짖고 있어요.
▶그럼, 어떻게 다릅니까?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살인하지 말라>는 것은 “살인을 하지 않으면 된다.”는 생각보다도,
예수님의 진짜의미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소중한 영혼의 가치를 말하는 것이고, ”그런 의미를 알라“는 뜻입니다.
그런 의미가 중요한데, 그 알맹이는 쏙 빼버리고,
”내가 살인하지 않으면, 되는 것“으로, 자의적으로 해석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또 그들은 “사랑하라”는 말을 자의적으로 해석하여, “나는 그 사람을 미워하지 않는 마음을 먹으면,
그 사람을 사랑한 것”으로 착각하며, 해석합니다.
어떤 사람을 “미워하지 않는다.” 고, 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아니지요.
이게 율법의 정신이니까, 그들은 겉으로 보이는 문자적인 해석으로 성경을 해석하는 게 문제입니다.
그렇게 성경을 자기 기준으로 맞추어, 자의 적으로 해석하여 문제가 되었고,
그대로 실행하면서 “의로운 삶이라“고 우기고 있는 것이 문제입니다.
예수님은 22절 말씀에서 “살인하지 말라”는 율법을 이렇게 해석합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형제에게 분노하는 사람도 심판받게 될 것이다.
또 형제에게 라가라고 하는 사람도 공회에서 심문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너는 바보다>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지옥 불속에 떨어질 것이다. “(마5:22)
여기에서 3단계 과정으로 나누어서 설명을 했어요.
음악의 악보에 <크레세토>라는 것이 있어요. 이 단어는 점점 세게라는 말이라고 해요.
예수님은 분노하는 시점에서 점점 더 강도가 강하게, 점점 더 세게 나가게 되므로,
“분노가 ⟶ 멸시가 되고 ⟶ 저주로 변하여 ⟶ 나중에는 살인까지 저지른다.“고 말씀해요.
그러니까 살인은 저주의 다음 단계가 되는 셈이지요.
예수님은 ”살인의 원인”이 되는 것이 분노이므로, 살인을 없애려면, “분노부터 다스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살인의 동기“가 분노이라면, 분노를 먼저 다스리고, 그 다음에 멸시와 저주의 단계가 있으니까,
“그 첫 단계인 분노부터 없애라“고 말씀하십니다.
모든 분노에는 죄가 그 속에 숨어 있어요.
그러므로 의로운 이야기를 하더라도, 절대로 분노하지 말고, 사랑으로 부드럽게 표현해야 합니다.
▶유대인들의 의는 무엇일까요?
유대인들은 형식적인 의를 지켰고, 편파적인 의를 실행하고 있었어요.
우리가 행함으로 얻어지는 의가 아니고, 값없이 주어지는 하나님의 의를 더 중요하게 생각했어요.
예수님은 마음속에 품은 생각도 죄라고 했어요.
그러니까 예수님은 “율법을 완성하러 오신 것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더 나은 의이고, 율법을 완성하는 일입니다.
우리는 땅의 법을 다르고, 더 나아가서 하늘의 법도 따라야 합니다.
모세는 돌판에 율법을 받았지만, 성령을 받은 우리들은 하나님께 순종하며,
성령 충만한 삶을 사는 것은 자발적으로 율법을 지키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출발은 믿음으로 값없이 받았지만, 이것은 나의 능력이 아니라,
성령의 이름으로 율법을 지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영적인 축복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하루도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며 더 나은 의를 추구하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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