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이레, 90일의 기적, 사순절 회개 기도회

별의 주인공에게 드리는 예배 (마2:1~12) 2021.01.14

다이나마이트2 2021. 1. 14. 19:05

별의 주인공에게 드리는 예배  (마2:1~12)  말씀: 이상준 목사님

 

오늘 하루도 말씀에 따르고, 성령 충만한 하루가 되시기 바랍니다.

오늘은 예수님의 탄생을 “동방박사를 통해 전달하는 말씀“입니다.

 

1절 말씀에서, 헤롯왕 때에 유대 베들레헴에서 예수께서 태어나시자,

”동방에서 박사들이 예루살렘으로 찾아 왔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등장하는 사람이 헤롯왕입니다.

그는 로마제국을 통치한 유명한 왕입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그 이전의 왕은 어느 지역의 영주 개념이었지만, 헤롯은 실제로 전체를 통치하는 지도자였습니다.

 

그는 농업을 장려하고, 국방에도 신경을 쓴 탁월한 지도자입인데, 그 시점에 예수님이 태어났습니다.

그런데 이국땅에 있는 이상한 사람이 등장하는데, 이들은 동방박사들입니다.

 

이들은 천문학을 전공하는 점성술사입니다.

이들은 1,300키로나 떨어진 곳에서 왜, 찾아왔을까요?

 

성경에 의하면, 그들은 ①별을 보고 찾아 왔고, ②[유대의 왕]을 보려고 왔으며, ③경배하러 왔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헤롯왕은 이 말을 듣고, 심기가 무척 불편했습니다.

그 당시에 예루살렘의 분위기도 시끄러웠고 “온통 그 소문으로 떠들썩했다.”고 합니다.

 

▶헤롯은 어떤 사람입니까?

그는 만행을 저지른 왕인데, 자신의 아들과 처남, 그리고 왕비까지 죽인 사람입니다.

그런 포악한 사람이 자기가 왕인데, 왕의 면전에서 “유대인의 왕”이라는 말을 듣자마자 화가 치밀어 올랐습니다.

 

2절 말씀에서 헤롯왕은 왕 앞에서, 또 다른 유대 왕을 거론하는 것을 용서 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내 인생이 곧 법“인데, 감히 내 앞에서 ”그런 말이 나오다니?“라고 화가 났습니다.

 

▶왜, 화가 났을까요?

그것은 ”내가 곧 법이기 때문입니다.“내가 왕인데, 또 다른 왕이 있다니”, 그건 용서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물론 예수님은 세상의 왕이 아닌데, 아무 것도 모르는 헤롯은 화만 냅니다.

 

▶왜, 하나님은 점성술사를 이곳으로 보냈을까요?

그분은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에서 어떤 생각을 가질까요?

우리 안에 “헤롯의 모양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헤롯이 내 안에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내 안에 있는 그 헤롯을 과감하게 제거해야 합니다.

 

내 안에 “헤롯과 같은 실체”가 남아 있기 때문에, 그 실체를 알아야 합니다.

또 한편으로 헤롯이 오해했듯이, 성경의 의미를 오해하면 안 됩니다.

 

4-5절 말씀을 보면, 헤롯왕은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을 불러다 모아 놓고,

“그리스도가 어디서 태어났느냐?”라고 물어 보니까, 그들은 베들레헴이고,

그것은 “예언서에 이와 같이 쓰였다”고 대답합니다.

 

헤롯은 그동안 소문으로 떠돌아다니던, “유대 왕이 태어났다”는

그 말이 사실인지를 알고 싶어, 확인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것은 헤롯왕도 메시아에 대한 소문을 정보 차원에서 알고 있었고,

성경의 예언]으로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에, 더욱 궁금했던 것입니다.

 

알고 있는 지식을 “그대로 믿는 것“과는 다른 것입니다.

경영학 박사가 경영을 잘 하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 지식이 많지만, ”그걸 많이 안다“고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아닙니다.

설교를 많이 들었지만, ”그것을 받아드리는 것“은 또 다른 문제입니다.

 

설교를 “들었다“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것은 아닙니다.

아무리 많이 들었어도, 아멘으로 받아드린 사람과, 건성으로 듣는 사람은 다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집중해서 듣고, 받아드린 사람은 확실히 다릅니다.

무언가 그런 사람은 뚜렷하게 달라질 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영적인 정보를 제공하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나의 창조주“이고, ”나를 구원하신 구원자“라는 사실을 받아드린 사람은

”그분이 내 인생의 주인이라는 사실”을 확실히 받아드리는 사람입니다.

 

요즘같이 코로나 팬데믹] 오니까, 믿는 사람들은 성경을 읽기가 아주 좋습니다.

그것은 “밖으로 나가지 말라“고 하니까, 집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계시록을 보면, ”어떤 재앙이 오는가? 나는 그걸 피할 수 있는가? 미래는 어떤 일들이 올 것인가?“등등

수많은 정보를 얻게 되지만, ”실제로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를 잘 챙기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뭘까요?

성경을 읽으므로 정보는 얻었지만, 거룩한 환상은 보았지만,

”그 속에서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확실하게 파악하지 못한다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3장 20절 말씀에는, ”보라, 내가 문 앞에 서서 두드리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들어가서 그와 함께 먹고 그는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다“(계3:20)

 

▶이 말씀이 충격적인 것은 뭘까요?
우리가 말씀을 들어도, 말씀을 읽어도, 아무 감정도 없이 읽는 사람과

그 말씀을 ”충격적인 말씀“으로 받아드리는 사람과는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그 말씀을 ”오늘 내게 주신 말씀“으로 받아드린 사람은 확실히 다릅니다.

그러나 ”문 밖에 있는 사람“들은 말씀하고 계시는 말씀을 그냥 지식으로 받아드리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그런 사람은 예수님을 ”내 마음에 모신 사람“이 아니고, ”문 밖에 세워둔 사람”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문 밖에 세워 둘 수 없는 사람입니다.

 

그런 분들이 계시다면, 어서 속히 예수님을 마음으로 모셔 들여야 합니다.

예수님을 내 마음의 중심에 모시고,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내 인생을 다스리는 마음에 중심으로 모셔야, 내 인생이 달라집니다.

예수님은 내가 “정보가 필요한 때”에 생각나는 분이 아닙니다.

 

그런 분들은 예수님을 “정보를 주시는 분”으로 전락시키지 마세요..

예수님은 “정보를 주시는 분”이 아니고, 내 안에서 “나를 깨우치게 만드는“ 분입니다.

 

그런 분들은 말씀을 읽으며, “내 삶이 변하지 않는 것”에 안타까움을 느껴야 합니다.

그런 “안타까운 마음”이 그 사람을 변하게 만들 것입니다.

 

예수님을 인정하지 않고, 내 마음에 받아드리지 않는 사람은 문제가 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교리적으로 해석하지 말고, 실제적인 사실로 받아드려야 합니다.

 

 

그 당시에도 선지자들도 있었는데, ▶왜, 이방인인 점성술사를 보내서,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을 부끄럽게 했습니까? 거기에 대 반전이 일어날 것입니다.

 

“먼저 된 자가 나중 되는” 상황이 올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 사람들은 “너도 천국에 왔느냐?”라고 놀랠 것이며,

“왜, 그 사람은 오지 않았느냐?”고 수군거리며, 의문을 느낄 것입니다.

 

예수님이 여러 번 말씀드린 것은 “우리가 어명을 민감하게 받아드리듯이,”

말씀을 민감하게 받아드리고, 자기 생활에 적용해야 그 사람이 변합니다.

 

▶왜, 그렇게 해야 하나요?

하나님이 계속해서 말씀하시기 때문이지요.

 

▶왜, 동방박사를 그곳으로 보냈나요?

그 당시 유대인들이 눈치 채지 못하니까, 점성술사를 보내서 알려주려는 뜻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주시는 영적인 메시지”입니다.

 

고속도로에 있는 하이웨이의 게시판에도 일정한 법칙이 있습니다.

요즘 네비게이션이 잘 되어 있지만, 표지판의 목적지를 세울 때에도 그 목적지의 표지를 한 번만 나타내지 않습니다.

 

5키로 전방에서 먼저 알려주고, 1키로 지나서 또 알려주고, 500미터에서 다시 알려 줍니다.

이렇게 단계를 두고 알려줍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우리가 그것을 놓칠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그와 같이, 우리도 하나님을 말씀을 들어도, 놓칠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딴 생각을 하고, 듣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지식으로” 받아드리고, “나의 생각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에,

말씀을 듣고도, 성경을 읽고도, 모르고 그냥 지나갑니다.

 

이제는 다시 우리가 돌아와야 합니다.

그냥 그렇게 지내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계속해서, 반복적으로 우리에게 말씀을 하시지만,

우리가 바빠서 받아드리지 못하면, 우리는 그냥 그렇게 살 수 밖에 없습니다.

 

혹시 하나님이 “차분하신 분”으로 오해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어떤 면에서 보면,

하나님은 말이 많으시고, 수다스런 분입니다. 그래서 성경이 그렇게 두꺼운 책으로 나온 것입니다.

 

▶얼마나 하실 말씀이 많았으니까, 그렇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말씀을 들으며, 말씀을 읽으며, 감동을 느끼고, 어떤 때에는 “충격을 받아 통곡을 해야” 합니다. 그

그러나 우리가 그렇게 하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우리는 지금껏 눈이 있어도 보지를 못했고, 귀가 있어도 듣지를 못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장님이거나, “귀가 들리지 않는 사람”과 같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말씀 앞에서 정중히 반성해야 합니다.

요즘 성경을 통독하니까, 느끼는 것이 있습니다.

 

▶언제까지 읽어야 합니까?

그 말씀이 보일 때까지, 읽어야 합니다.

그 말씀이 들릴 때까지, 들어야 합니다.

 

우리가 다른 나라의 외국어에 익숙해지려면, 그 나라에 가서 생활해야 하고,

“꿈에서 그 나라 말이 나와야 한다“고 합니다.

꿈을 꾸다가도 그런 마음이 들어야 하듯이, 무의식 상태에서도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야

”진짜 하나님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언어는 내 마음에 있는 만큼, ”들리는 법“입니다.

우리 주변에서 좋은 싸운드가 들려 와도, 내 마음에 감동이 없으면, 모르는 것입니다.

 

말씀을 읽으면서, 단어]하나라도, ”그 의미를 생각하며“ 읽으십시오.

말씀을 들으면서, ”오늘 나에게 주시는 말씀“으로 들으십시오.

 

그 말씀이 내 눈을 통과해서 내 마음 안에 들어가서,

씨앗이 되어 나에게 싹이 터야, 나를 점진적으로 변화 시키는 것입니다.

 

성경에 기록된 말씀이 ”하나님의 음성“으로 들려질 때까지 읽으십시오.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의 내용을 파악할 때까지 읽으십시오.

 

찬양을 부르면서도, 찬양을 들으면서도, 그 가사의 내용이 감동 될 때까지 듣고, 부르십시오,

그렇게 해야,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됩니다.

 

▶나는 왜,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합니까?

안타까워 하지 마시고, 11절 말씀에 ”동방박사들이 경배했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예수님을 경배하면,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옵니다.

하나님을 경배하는 마음을 가지면, 그 음성이 들려오는 법입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에도, “이걸 해 주세요?”라는 것은 기도가 아닙니다.

그것은 “나의 요구사항”이지, 내가 드리는 기도가 아닙니다.

 

성경을 읽으며, 그 말씀이 정말 “나에게 주시는 말씀으로 들린다.“면,

그 때가 ”신앙생활 하는 진정한 맛“을 느끼는 때가 된 것입니다.

 

그 말씀이 ”나의 영혼”을 사로잡고, 내 마음을 움직여서,

“하나님의 말씀”이 어명이라고 느끼시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말씀을 읽으며, 감동을 느끼고, 충격을 받아야 합니다.

그냥 소설책을 읽듯이, 내용을 파악하는 정도로 읽는다면, 아무런 변화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지금껏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한 것을 찾아내듯이, 눈을 부릅뜨고 읽어야 합니다.

지금껏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한 것을 찾아내듯이, 귀를 열고 들어야 합니다.

 

혹시나 우리의 신앙생활이 종교생활로 전락하신 분이 계시다면,

교회에 다니는 것을 세상의 처세술로 생각하거나, 정보화에 중점을 두신다면, 그건 아닙니다.

이런 헤롯의 모습이 나의 모습이니, “나를 붙들어 달라“고 기도하면, 하나님이 응답해 주실 것입니다.

 

육적인 “내가 들를 수 없는 것”을 들려주는데, 내가 그것을 정보로 듣거나,

그 말씀의 내용을 알아듣지 못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경배하는 마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 분들은 “내 귀를 열어 달라”고 기도하십시오.

그런 분들은 “내 눈을 열어 달라”고 기도하십시오.

 

그리고 “진동과 같은 떨림으로” 그 말씀을 받아 드리십시오.

내 영혼이 주님과 함께 교제하며, 주님 안에서 생활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