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이레, 90일의 기적, 사순절 회개 기도회

맥락을 묵상하는 믿음 (요11:23~27, 40) 2020.12.28

다이나마이트2 2020. 12. 28. 18:17

맥락을 묵상하는 믿음 (요11:23~27, 40) 말씀: 정갑신 목사님(예수향남교회)

 

오늘의 말씀은 지난번에 김경진 목사님이 설교하신 말씀과 같은 본문입니다.

그때는 마리아에게 초점을 맞추어 설명했으나,

오늘은 제가 마르다에게 초점을 맞추어,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우리는 과거에 지나간 시간 속에서 하나님이 역사하신 사건들을 기억합니다.

그것을 우리의 기억과 간증을 통해서 알고 있고, 또한 앞으로도 이루어질 약속으로 믿고 있습니다.

 

▶그렇게 믿는 것은 왜, 그럴까요?

과거의 사건에는 이루어질 약속과 기대가 담겨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우리를 인도하신 하나님을 기억하지만,

① 그동안 인도하신 하나님과 ② 앞으로 인도하실 하나님은 같은 하나님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인도하신 하나님과 인도하실 하나님을 착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그 맥락 속에서“ 그 하나님을 찾아내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여기서 맥락이라는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이런 흐름 속에서, 오늘 우리는 ”새로운 빛“을 만나야 합니다.

 

우리는 과거에 지나간 기억과 간증을 우리 마음속에 담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장차 이루실 하나님의 약속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과거의 사건 속에는 ”약속과 기대가 함께 담겨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런 맥락에서, 우리를 인도하신 하나님을 기억하고 있지만,

인도하신 하나님과 장차 인도하실 하나님은 “모두 같은 하나님” 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기억 속에서는 인도하신 하나님과 인도하실 하나님을

“같은 하나님”이라고 느끼지 못하므로,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의 기억 속에서 그 맥락을 찾아내는 것이

그리스도인들이 해야 할 일이고,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특권입니다.

 

 

따라서 우리들은 어제의 일들을 기억하고,

오늘의 말씀을 묵상하는 과정을 통해서, 그 맥락을 찾아내야 합니다.

 

이런 흐름 속에서,

“어제의 기억과 간증“이 ”내일의 약속과 기대”에 힘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묵상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특권이 되어야 하고,

그런 맥락을 통해서, 우리는 새로운 빛을 만나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매우 익숙한 본문인데,

마르다의 입장에서 생각하면, 매우 믿기 어려운 일입니다.

 

예수님은 23절 말씀에서, ”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마르다는 그 말씀에 믿지는 않고, 그렇다고 정면으로 반박하지도 않고,

그냥 최대한 긍정적으로 해석한게, 24절의 말씀입니다.

 

24절의 말씀을 보면, “마르다가 말하기를, 마지막 날 부활의 때에는

다시 살아 날 줄을 내가 아나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물론, 마르다는 “다시 살아 날 것“을 기대하지만,

그 말씀이 오늘 이 자리에서, “바로 일어날 것“으로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런 마르다를 이해해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도 마르다와 같은 생각이지만,

이 말씀을 나에게 적용하면,

예수님의 말씀은 “미래의 약속일 것이다“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그것은 ”나와 연결시킨 맥락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에서 아이로의 딸이 죽었는데, 예수님이 살리셨습니다.

그 사건은 비교적 예수님이 초기에 일으킨 사건입니다.

그런 소문이 빠르게 온 세상에 퍼지면서 마르다도 어느 정도는 이미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것을 전제로 생각하면, 예수님이 “나사로가 다시 살아 날 것이다“라는 것은

그 맥락 속에서 서로 연결되어야 합니다.

그것은 어제의 기억과 간증이 오늘 주시는 말씀에 연결시킨다면,

그것은 ”먼 미래의 이야기“가 아니라, ”현재 일어날 수 있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마르다와 같이, 현실적으로 어두우니까, 그 맥락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런 면에서, 마르다는 최선을 다 했지만, 그걸 믿지 않은 겁니다.

 

곽은진 교수 (아세아연합신학대학교) "목사들의 종교 중독" 이라는 Article 에서 인용하신 것이였습니다.

적지 않은 목회자들이 몸을 불사르듯이 헌신을 하는데 이것을 진정한 경건이라고 확신하기 때문에

적절한 쉼, 가족들에 대한 애틋한 사랑, 돌봄, 동역자와 성도들을 향한 너그러운 시선과 관대한 마음,

사랑을 베품, 이 모든 것들을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어느새 상실하는 목사들의 비극에 관한 글입니다.

 

최선을 다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을 놓치는 최선의 함정, 최선의 무능함에 빠질 수 있는 것입니다.

내가 말하려고 하는 것은 최선을 다함으로 어떤 결과가 나오는 것을 이야기하려는 것이 아니라

결과와 상관없이 최선을 다한 후에 생명의 냄새가 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결과가 망한 것 같아도 하나님의 뜻이면 생명의 냄새가 나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어느 부분에서 ”최선을 다 하지 못했다”는 것은

결과적으로 생명의 냄새가 나타나야 하는데,

그 안에서 죽음의 냄새가 난다면, 그것은 생각해 보아야 할 일입니다.

 

마르다는 “마지막 날에 살아난다.“고 믿고 있으니까,

그것은 27절 말씀에서 말하는, ”이르시되,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라고 대답합니다.

 

▶마르다가 왜, 그렇게 대답했을까요?

그것은 주님의 아들인 것을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에 대해, “당신은 메시아이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마르다는 조문객들 앞에서 자신의 무능함을 드러내지 않고,

혹시나 살아 날 것을 기대했다면, 그게 현실이라면,

그 때는 다른 길을 생각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말씀이 이루어진다면,

말씀이 성취되기 전에 “아무도 생각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먼저 하나님의 은혜를 구해야 합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마리아야 나오라.“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이, 집에서 나와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약] 사이에서“ 우리들도[묵상하는 ]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과거의 내용을 알고“ 있어야 가능합니다.

 

우리가 다른 관점에서 생각해 보면,

▶예수님은 ”내가 부활이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부활과 생]은 예수님에 의해서 나오는 것과

”예수님 자신이 생명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현실적으로 그렇게 된다,”는 것이기 때문에,

아주 중요한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생각으로는 그 현장이, “바로 이곳”이고,

여기가 “생명이 살아나는 장소”라고 생각하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과 함께 있는,

“그 자리가 중요하다“는 그런 사실을 “먼저 믿어야“ 합니다.

이게,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의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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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사람들은 워런 버핏] 많은 돈을 주고, 식사하려 합니까?

그분과 식사하는 ”그 자리가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분과 나누는 대화가 “가치가 있기” 때문에,

그렇게 많은 돈을 주고도, 기념비적인 자리를 함께 하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그분은 내 안에 같이 있으면, 그분과 같이 있는 시간이야말로,

“표현할 수 없는 귀중한 가치”가 있기 때문이지요.

어떤 신학자가 말하기를 “미래가 현재를 파고들고 있다”고 합니다.

 

그런 맥락에서 무슨 일이 있든지?, “그 사람과 함께 있다“는 것은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이고, 위대한 일입니다.

이런 엄청난 분과 같이 있는 시간은

”엄청 난 보물을 발견하는 시간“이 되는 아주 중요한 시간입니다.

 

예수님도 ”내가 부활이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시면서 여기 계시는 것은

부활과 생명을 현재의 조건으로 보기 때문에,

그것을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는 말씀입니다.

 

▶왜, 예수님이 물었을까요?

안 믿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물은 거예요.

그것은 사람들이 믿지 않기 때문이지요.

 

네가 믿으면, 하늘의 영광] 볼 것인데, 왜 믿지 않습니까?

절망하고, 의심이 있으니까, 믿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는 죽음 같은 현실이 있는데, 예수님은 그런 담장을 헐어 버리고,

생명이 나타나도록 하는 권세를 가지고 있는 분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믿음은 “말씀을 믿는 믿음”이어야 하고,

그런 믿음이 “나를 믿게 만드는 믿음”이어야 합니다.

 

▶우리가 자주 함정에 빠지는 것은 뭘까요?

그것은 “예수님의 말씀을 믿는 것”이 아니라, “나를 믿는 것”입니다.

 

우리는 상황에 따라 흔들리는 믿음을 가지고 있으니까, 그런 거예요.

 

그러니까 예수님의 말씀을 믿어야지, 나를 믿으면 절대로 안 됩니다.

그것은 죽음과 죽음의 아류들을 믿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2장 15절에,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한평생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주려 하심이니라”(히2:15)

 

이 [말씀]은 죽음이 두려워서 평생 노예로 매여 사는 사람들을 풀어주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일생동안 죽음의 공포에서 종살이하는 사람들을 해방시키시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죽음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지금 당장 그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이것은 일종의 환타지라고 생각하지만, 이 세상을 의식하건, 의식하지 않건 간에,

그것은 환타지로 충분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눈으로 들어오는 별빛을 볼 때, 그때는 경외감을 느껴야 합니다.

그것은 삼국시대 이전부터 있었건만, 내 눈에 비치는 묶은 빛인데,

수천 년의 시간이 지난 것이지만, 그것이 환타지로 느껴집니다.

 

따라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환타지] 생각하지 말고, 현실로 받아 드리고,

거기로 들어가야 합니다.

그것이 믿음이고, 믿음의 통로를 지나서 그 사실을 믿게 만드는 것입니다.

 

▶언제 믿게 되나요?

오늘 이 자리에서, 믿게 되지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맥락을 찾아서, 믿어야 합니다.

또 그렇게 따르다 보면, 십자가와 부활이라는 환타지가 나의 모든 것을 바꾸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나에게는 기쁨이 솟아나고,

누군가에게 전하고 싶은 욕망이 생기는 것입니다.

 

2020년을 보내면서, 우리들의 마음에도 어느 정도 익숙해 져서, 저는 이런 생각이 들어요.

무엇보다도 바이러스가 확장하는 주역은 비말 보다도, 자만입니다.

이 자만이 우리들의 최대의 적]니다.

 

▶자만은 무엇입니까?

자만은 자신에 대한 과대한 평가이고, 상대에 대한 과소평가입니다.

 

자만은 상대를 ”별게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자만은 거기로부터 시작하는데, 과거에는 몰랐지만, 코로나가 나오면서 알게 된 것입니다.

 

과거에 1918년 스페인 독감으로 5천만명을 죽였는데, 그때는 모르고 있다가

이제, 기억이 나서, 깨달은 것입니다.

 

코로나는 지구상에 누구라도 걸릴 수 있는 것인데, 그때는 간과했던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들에게 자만과 불신이 사라지지 않으면, 안됩니다.

 

우리가 알듯이, 믿음은 그냥 무작정 믿는 게, 아닙니다.

그동안 하나님이 이루신 것을 믿고, 말씀을 통해 기억을 소환해서, 내 것을 만들어야 합니다.

 

과거의 일은 위대한 것이니, 기억을 소환해서 오늘의 현실에 적용해야 합니다.

 

우리는 말씀을 따라 살면서, 어제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오늘의 현실에 적용해야 합니다.

우리를 인도하시는 하나님은 같은 하나님입니다.

 

우리가 그 은혜의 자리에 초대되었으니, 우리는 은혜의 물결을 타고,

한 없이 넓은 은혜의 바다로 나가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