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이레, 90일의 기적, 사순절 회개 기도회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 지어다 (요20:19~21) 2020.12.22

다이나마이트2 2020. 12. 22. 18:51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 지어다 (요20:19~21)    말씀: 김은호 목사님(오륜교회)

 

우리 교회의 성도들은 좋은 습관을 하나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매일 아침에 일어나서 처음으로 하는 말이

“주는 그리스도시요,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는 고백입니다.

 

저희 교회 성도님들도 저와 같이 동일하게 말하며, 하루의 일과를 시작합니다.

▶왜, 이런 고백을 할까요?

그것은 이 고백 속에 “모든 것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도 이런 신앙고백으로, 하루를 시작하기 바랍니다.

코로나 19의 어려운 상황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게 시작 될 때에는 바로 “끝 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벌써 1년이 다 되어 갑니다.

 

그래서 비대면으로, 영상으로, 예배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나라“에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두려움 가운데서 살아갑니다.

그래서 개인위생과 생활방역이 중요하게 되었습니다.

 

거리두기와 손 씻기도 하고, 마스크도 써야 합니다.

그러나 이럴 때 일수록 개인 방역에 더 신경을 써야 합니다.

 

WHO 자료에 의하면, 10억 명의 사람들이 우울증을 포함한

”정신병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국민의 40.1%가 불안함을 느끼고 있다“고 전합니다.

그러니 우리는 힘들게 살고, ”죽고 싶은 생각“을 느낀다고 합니다.

 

지난주에 제가 만났던 집사님도

저에게 찾아와서 ”죽고 싶다“고 말합니다.

 

우리나라에도 ”하루에 38명꼴로 자살한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사망률 1위가 암이 아니고, 자살입니다.

 

코로나 상황이 이렇게 길어지다 보니, 불안과 공포와 지냅니다.

 

오늘 본문은 안식 후 첫날에,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나타나서

“평강을 너희에게 주노라”고 말씀하십니다.

 

▶왜, 예수님은 이런 첫 말씀을 하셨을까요?

여러분 같으면, 어떤 말을 했을까요?

나는 자기를 죽인 사람들을 원망하거나, 떠난 제자들에게

“섭섭하다“는 말을 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배신하고 떠난 제자들을 원망하지 않고,

”평강이 있으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21절 말씀에서도, ”제자들을 파송하면서도 동일하게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두 번씩이나, 제자들에게 평강을 말씀하셨습니다.

 

또 예수님은 막달라 마리와 여인에게 평안을 물으셨습니다.

이렇게 부활하신 예수님은 두 번에 걸쳐서 말씀하셨고,

또 두 여인을 만나고도 평안을 물으셨습니다.

 

▶왜, 반복해서 말씀했을까요?

평강은 히브리어로, 살롬이고, 인사말로 쓰이지만,

단순히 의례적으로 “인사말을 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그런 것은 ”최고의 관심이 평강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최고의 관심은 평강과, 살롬이고, 평안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을 만나자 마자,

”평강이 있을 지어다“라고 두 번 씩이나 말씀하신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도 예수님의 생각과 같이, 코로나의 어려운 상황 가운데서

평안을 누리며 사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편안과 평강을 구분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국어사전을 보면, 편안(便安)은 무사함, 편하고 한결같이 좋음“이고,

평강(平康)은 ”편안할 평자에 편안할 강자“(건강에 사용하는 강자)를 사용합니다.

 

그러니까 평강은 ”편안할 평자와 편안할 강자“가 두 개나 포함된 글자입니다.

그래서 평강은 ”편안하고, 건강하게 산다.“는 뜻입니다.

 

평강은 불안정안 평강이 아니라, ”완전한 평강”을 말합니다.

그 평강은 땅의 평강이 아니라, 하늘의 평강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궁극적으로 “그런 평강을 주겠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땅에서의 평안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약속된 평강을 받기를 원합니다.

 

예수님의 관심은 돈도 아니고, 명예도 아닙니다.

오직 편안도 아니고. 평강입니다.

 

우리는 돈이 있으면, 좋은 차도 사게 되고, 한강이 보이는 아파트를 살 수 있어서

좋기는 하지만, ”돈이 있다”고 행복한 것은 아닙니다.

 

재벌들을 보면, 돈이 있어도 편안한 게 아니고, 서로 싸웁니다.

그것은 돈 때문에, 서로 다투고 싸우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돈과 환경은 평안을 가져다주기는 하지만,

행복의 조건 되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주님은 왜? 평강을 말씀했을까요?

그것은 그들에게 평강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불안하고 두려워서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있습니다.

그들은 두렵기 때문에, 같이 모여 있는 상황입니다.

 

21절 말씀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요20:21)

 

▶왜, 그들은 함께 모여 있을까요?

그것은 두려워서, 모여 있습니다.

 

자신들을 죽이려 했기 때문에, 숨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현실적으로 필요한 것은 살롬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돈이 아니고, 평안하기 위한 평강이 필요했을 것입니다.

 

마음에 평안이 없으면, 축복이 아닙니다.

마음에 평안이 없으면, 성공해도 성공이 아닙니다.

 

아무리 좋은 직장에서 고액의 연봉을 받아도, 축복이 아닙니다.

그런 사람은 아무리 좋은 환경에 살아도, 늘 불안합니다.

 

제가 살고 있는 집 옆에, 우리나라에서 제일 높은 롯데 123층 빌딩이 있습니다.

하루 밤의 객실요금이 “2천만 원짜리의 방도 있다“고 합니다.

 

거기서 잠을 자도 마음에 평안이 없다면, 그 어떤 것도 축복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평강입니다.

 

▶왜냐하면?

마음에 평강이 없는 축복은 축복이 아닐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2) 예수님이 평강을 말한, 두 번째 이유는 뭘까요?

 

그것은 평강이 “십자가의 열매이기” 때문입니다.

 

이 평강은 세상에서 줄 수 없는 평강이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4장 27절 말씀을 보면, “내가 너희에게 평안을 주고 간다.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리니,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14:27)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이 주는 [평강]은 무엇입니까?

① “예수님 안에 있는 평안함”이고,

②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이고, ”하늘로부터 주는 평안“입니다.

③ 우리는 알 수 없는 “신령한 평안”입니다.

④ 역경 속에서도 “우리가 누릴 수 있는 평안”입니다.

⑤ “하나님의 사랑을 느낄 수 있는 평안”입니다.

 

이 평안은 “죄에서 해방된 자”에게서 누릴 수 있는 평안입니다.

 

우리는 죄와 죽음을 해결하지 못했으므로,

그 평안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아야 합니다.

 

저는 30년 동안 목회를 하면서, 항상 감사를 느낍니다.

그것은 “임종을 앞든 성도들에게 심방할 때”입니다.

 

그래서 “의사가 하루를 넘기지 못한다.”라고 말을 하면,

저에게 새벽 두 시라도 전화해서, “저를 부르라“고 합니다.

 

그곳에 가보면, 대부분 전체 가족들이 다 모여 있고,

그 분의 얼굴을 보면, 얼굴이 흑갈색으로 변해 있습니다.

 

그런 자리에서 ”예수 사랑하심은---“이라는 찬송을 부르고,

”예수를 영접하면, 죽어도 살겠고, ---“라는 말씀을 전합니다.

 

죽음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니까, 두려워하지 말고,

담대하게 맞이하라”고 말을 하고,

 

“누구나 죄와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면, 평안해 집니다.

 

이런 죄와 죽음의 문제를 우리의 주님이 해결하셨습니다.“라고 말을 전하면,

 

대 부분의 사람들은 의식이 없이 말씀을 듣지만,

좀 의식이 있는 분들은 눈을 깜빡이며, 응답합니다.

 

그분의 얼굴을 자세히 보면, 잠시나마 빛이 나고, 평안해 집니다.

우리 모두는 그러 축복을 느끼며 살아야 합니다.

 

바울과 실라가 이런 기쁨을 느꼈고,

그들은 깊은 감옥 속에서도 하나님을 찬양했던 것입니다.

 

우리들도 이 땅을 떠날 때에도, 이런 축복을 느껴야 합니다.

 

스테반이 돌에 맞아 죽으면서도

”그의 얼굴이 천사와 같이, 빛이 났다“는 말씀을 새겨들어야 합니다.

 

(3) 세 번째로, 왜, 평안을 물었을까요?

 

그것은 평안을 가진 자 만이 ”평안을 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전하는 말씀은 “평안의 복음”입니다.

 

예수를 모르는 사람에게도 이 [평안]을 전하면,

그 사람에게도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평안의 복음을 신으라.”고 합니다.

 

에베소서 6장 13-15절 말씀에는,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고, 진리의 허리 띠를 두르고,

의의 가슴 받이를 붙이고, ”예비한 평화의 복음을 신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은 평화의 기쁜 소식을 전하러 가기 위해,

”복음의 신발을 신으라”는 뜻입니다.

 

▶왜, “그렇게 하라“는 것입니까?

그것은 영적 전쟁을 통해서, 죽음을 받아드리면,

그런 사람은 ”평안을 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는 우리들은 우리 안에 그런 평안을 누려야 합니다.

우리가 두려움에 떨고 있으면, 누가 이 복음을 받아 드리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에게 먼저 “하나님이 주는 평강“이 있어야 하고,

”평안을 가진 자“ 만이 이런 평강을 누리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의 최대의 관심은 무엇입니까?

돈입니까? 아니면 명예입니까?

그런 게 아니고, 우리에게도 필요한 것은 평강입니다.

 

슬픔 속에 있는 마리아와 함께, 주님이 슬퍼하며 울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 주변에도 슬프고, 어려운 분들이 계십니다.

 

시험관 아기를 원하는 부모가 게셨는데,

어느 날 갑자기 뱃속의 아이가 잘못 되었을 때.

그런 부모의 심정은 어떨까요?

 

그런 분들에게 주님은 ”절망의 방에서 나오라“고 부르십니다.

 

▶2020년에 코로나 19가 우리에게 무엇을 주었습니까?

그것은 절망입니다. 그것은 슬픔입니다.

 

우리에게 준 것은 ”흔들리는 신앙“입니다.

그러나 그런 분들에게도 주님은 ”마리아야 나오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 새벽에, 주님이 말씀하시는 “평강이 있을 지어다“라는 주님의 음성을 듣는 여러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