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존중의 축복, 죽음의 영=자살 (왕상 17:7~160 말씀: 이재훈목사님
오늘은 [생명 존중의 축복]에 대한 세 번째 시간으로,
”죽음의 영 = 자살“에 대한 말씀을 드립니다.
첫번째 시간에는 낙태에 대해서, 지난 주간에는 저출산에 대해서 말씀드렸습니다.
먼저 정규환 집사님의 삶에 대한 간증을 듣겠습니다.
우리나라의 자살율이 OECD국가 중에서 가장 높습니다.
하루에 37.5명이 자살하고 있으며, 매 38분에 한명씩 자살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의 사회 안에 넉넉한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저의 가정은 불행한 가정으로, 외롭고 어려운 힘든 삶을 살았습니다.
아버지의 과격한 모습으로, 저의 어린 시절은 사랑을 모르고 자랐습니다.
그래서 가끔 저는 ”내가 왜 태어났지?“라는 의구심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에 대한 원망이 있었지만, 그래도 누나와 의지하며, 지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내내 변하지 않았고, 자라면서 차츰 변할 것을 기대했어요.
그러나 갑자기 누나가 자살을 선택하여, 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장례식장에 가서, 누나의 영정 사진을 보니,
”나 보고도 죽으라.“는 신호를 보내는 것 같아, 저는 절망했으나,
그러나 저는 그때에, ”오히려 더 살고 싶다.”는 욕망이 생겼습니다.
그 후에 저는 훈련을 통해, 어려운 사람들을 돌보게 되었고,
부정적인 생각에서 능동적인 생각으로 변하고, 열정적인 사람으로 변했습니다.
그러나 저에게는 두 가지 족쇄가 따라 다녔습니다. 그것은
①누나에 대한 [죄책감]과 ②아버지에 대한[원망]이었습니다.
그런 [죄책감]과 [원망]은
나의 노력으로 해결되지 않아서, 6년이나 고생했습니다.
그러던 중에 저는 호주로 워킹 홀리데이를 갔던 선배의 이야기를 듣고,
호주로 가서, 어느 낯선 부부를 만나서 많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저는 그들을 따라 그 가정으로 갔는데, 벽에 십자가가 걸려 있었어요.
그래서 그 분들을 따라 처음으로 교회를 따라 갔는데, 이상하게도 교회가 따뜻하게 느껴졌습니다.
거기에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금방은 이해하지 못했지만,
그래도 “나는 너를 보고 싶다. 너를 사랑한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그때부터 조금씩 하나님을 알게 되었고, 세례도 받았고,
“예수님이 나를 위해 돌아가신 분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때에, 저는 기뻐서 춤을 추게 되었고, 너무도 감격했습니다.
그래서 그때부터 이전에 저의 모든 괴로움을 모두 떨쳐 버리고,
삶의 의욕이 생겨서, 저도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동안 원망만 하던 아버지를 갑자기 만나고 싶어졌고,
아버지를 만나서 제가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빌면서 고백을 했습니다.
아버지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저를 그냥 끌어안아 주셨습니다.
부모님은 나를 끝까지 사랑했는데, 나는 그것을 모르고 지냈습니다.
그 사건으로 아버지와 저는 7년간의 ”끊어진 관계“를 [회복]했고,
하나님은 나를 새로운 길로 이끌어 주시고, 인도했습니다.
그 이후에, 하나님은 저를 사용하여, 자살 방지 프로그램을 진행하게 하셨습니다.
자살을 예방하는 강의도 하고, 복음을 전하는 일을 하게 되었어요.
그러므로 저는 오직 하나님만 붙잡고,
“사람을 살리는 일”에 앞장서는 사람으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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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정규환 집사님의 귀중한 간증을 들었습니다.
가정의 충격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이겨낸 사연은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이런 간증을 들으면서, 사람들이 죽음의 영을 끊어버리고,
자살의 충격이 사라지는 나라가 되기를 바랍니다.
감염의 확산으로 오늘부터 비대면 영상예배로 드립니다.
우리는 상황을 바라보지 말고, 하나님만 바라보면서,
“나는 이 상황 속에서 어떻게 행동할까?”를 묵상하시기 바랍니다.
오늘은 “죽음의 영, 자살“이라는 주제로 말씀드립니다.
사람이 인생을 살면서 극한 상황에 도달했을 때, 죽음을 생각합니다.
그러나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리는 그 순간에도,
”소망은 여전히 존재한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언제, 어디서나,
소망의 빛은 우리를 돌보시는 하나님께서 나타 내십니다.
빛을 차단한 식물은 말라 죽는 것과 같이,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절망하며 살아갑니다.
”죽음에 이르게 하는 병”이라는 책에서,
▶“죽음은 무엇인가?“를 설명하면서,
①“죽음은 자신을 이기기를 원하지 않는 절망에 빠뜨리게 한다“고 합니다.
②”죽음은 자신이기를 원하는 절망(= 반항의 절망)이 나타난다.”고 합니다.
▶이 책에서 강조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죽음에 이르게 하는 이 두 가지 절망보다도,
“생명은 인간의 자유 의지의 영역이라“고 여기고 있습니다.
사람들은[인본주의에 의해, ”자기 자신이 우선이라”고 생각하며,
생명을 물질로 보고, 자기가 자기 의지로 결정하려고 합니다.
이것은 크게 “잘못된 생각“입니다.
이것은 “사탄의 노림수“이고, 그 [함정]에 빠지면, 안됩니다.
”생명의 주체“는 하나님인데,
사람들은 ”자기의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생명이 ”자기의 선택 사항이라”고 잘못 생각하고 있습니다.
생명은 “선택 사항이 아닙니다.”
이사야 43장 1절 말씀을 보십시오.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분이 말씀하신다.
이스라엘아, 너를 만드신 분이 말씀하신다.
“내가 너를 건져 주었으니,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네 이름을 불렀으니, 너는 내 것이라.”(사 43:1)
이 말씀을 보면, “너는 내 것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을 자신이 만들었으니, “너는 내 것이라“고 단언합니다.
죽고 싶은 생각은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죽을 각오로 하나님을 붙잡는다면,
소망의 길은 열릴 것이고, 구원의 길은 열릴 것입니다.
성경에는 ”생명을 귀하게 여기는 사건“들이 나옵니다.
오늘 말씀인 열왕기상에는 사르밧 과부의 얘기가 나옵니다.
17장 12절 말씀을 보면, ”그녀가 대답했습니다.
당신은 하나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는데,
제게 빵은 없고, 통에 밀가루 한줌과 병에 기름이 조금 있을 뿐입니다.
제가 나뭇가지를 주워 집에 가서, 저와 제 아들을 위해 음식을 만들어 먹고는 죽을 생각이었습니다.(열상 17:12)
여인이 갑자기 “죽을 생각이라”고 말을 합니다.
이 상황은 누구를 도울 상황이 아닙니다.
마지막으로 음식을 먹고, “죽을 것이라“는 말이니까,
이 극심한 가난으로 인하여, 삶의 소망이 끊어진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왜, 엘리야를 사르밧으로 보냈을까요?
거기에서 자살하려는 여인을 만나고, 그녀를 구하도록 엘리야] 보냈습니다.
이 사건은 ”엘리야를 구하려고 보낸 것“이 아니고,
이방 땅의 어두운 영을 구하기 위해, 엘리야를 보낸 것입니다.
한 생명의 귀한 영혼인, 그 귀중한 한 사람을 구하기 위해,
엘리야를 그곳으로 보낸 것입니다.
사람은 누군가 나에게 살아갈 이유를 제공해 준다면,
그는 살아갈 용기를 얻는 것입니다.
아합 왕을 경계하고, 그의 통치를 멈추게 하기 위해, 수 년 동안 기근을 주셨지만,
그로 인해 한 생명을 끊으려는 위기 속에 있는 한 가정을 찾아가게 하셨습니다.
이어서 13절에서 엘리야는 여인에게 말을 했습니다.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가서 당신이 말한 대로 하되,
먼저 그것으로 나를 위해 조그만 빵 한 개를 구워 주시오.
그러고 나서 당신과 당신 아들을 위해 먹을 것을 만드시오.“(사 17:13)
이 말을 들어보면, 아주 ”이기적인 말“로 들립니다.
기근으로, ”음식을 먹고 죽겠다”는 사람에게
엘리야는 “자기에게 먼저 빵을 달라“는 것은 이기적인 말과 같지만,
14절의 말씀을 붙잡고, 여기로 온 것입니다.
14절의 말씀은 다음과 같습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여호와가 땅에 비를 내리는 그날까지,
통 안의 밀가루가 떨어지지 않겠고, 병 안에 기름이 마르지 않으리라”하고
말씀하셨소.“(사 17:14)
그래서 ”자신에게 먼저 빵을 달라”고 자신 있게 말을 한 것입니다.
이것은 그런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았기 때문에,
한 과부의 가정을 구하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두 가지가 보입니다.
(1) 첫째로, 아무 것도 없는 상태에서 하나님을 바라보게 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먼저 나에게 가져오라“하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그렇게 행동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바라볼 때는 언제인가요?
“내가 많은 것을 가진 때”가 아니라,
“나에게 아무 것도 없을 때”가 하나님을 바라보게 됩니다.
어렵고 심한 고난으로 소망이 끊어져서 스스로 죽음을 생각하지만,
죽은 자를 살리신 하나님을 의지하면, 소망이 생깁니다.
오늘 간증해 주신 정집사님의 누나의 죽음 이후에도,
“하나님의 반전의 역사가 나타났다“고 우리가 들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진리를 깨닫게 하시기 위해, 아무 것도 없는 상태로 몰아갔고,
그 때, 그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사람이 죽음을 선택하려는 것은 고통을 피하기 위해, 죽으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절망하는 여인에게 ”믿음을 가지라“고 이끄십니다.
(2) 둘째로, 엘리야가 누군가의 도움으로, 인생의 가치를 깨닫게 만듭니다.
하나님은 사르밧 과부에게 먼저 기적을 베풀지는 않았습니다.
그의 필요를 채워 주기 전에, ”당신도 누군가를 도와 줄 수 있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은 너의 음식을 다른 사람에게 주어,
그에게 당신이 도움을 줌으로써, “하나님의 기적이 나타난다“는 교훈입니다.
우리는 내가 아무리 어려워도, 내가 남을 도울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나의 어려움만 바라보지 말고,
”나도 누군가를 도울 수 있다“는 생각으로, [나의 존재]를 깨달을 때,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게 된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정신적인 어려운 문제에 시달리는 여인도,
“다른 이에게 봉사할 수 있다.”는 우리에게 보여 주고 있습니다.
사르밧 과부가 먹어야 할 음식을 “엘리야에게 준다“는 것이
가치 있는 행동이고, 그것이 믿음 있는 행동입니다.
그래서 ”반전의 역사“가 나타난 것입니다.
그러니 어려운 상황만을 바라보지 말고,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생명]은 ”너의 선택“이 아니고, ”하나님에게 속한 것“이니,
”하나님을 바라보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사르밧 가정을 돌보심으로, 죽음을 생각하는 영혼에게
“하나님이 함께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 주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상황을 바라보지 말고,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그러면 그 하나님께서 당신의 삶을 돌보아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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