멈추지 않는 거룩한 열심 (느13:1~14) 말씀: 이재훈 목사님
코로나 [바이러스]가 다시 확산되고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몸속에 있는 [죄악]이 다시 나타나는 것과 같습니다.
[바이러스]는 완전히 사라지기 전 까지는, 언제 다시 나타날지 항상 염려됩니다.
그러므로 우리 안에 있는 [옛 자아]는 끊임없이 변해야 하고,
악한 습관에서 벗어나는 [거룩한 열심]으로 우리를 새롭게 해야 합니다.
느헤미야는 말씀 앞에서 백성들이 함께 회개하고,
전 국가적인 정체성을 회복하려고 합니다.
느헤미야는 아닥사스다 왕 32년에, 내가 왕에게 갔다가 왕의 허락을 받고,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 왔을 때, 심각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때, 성전이 부패하고, [사유화] 되어 있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또 성전 안에 있는 방을 [도비야]에게 제공한 어처구니없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느헤미야는 너무 화가 나서, [종교개혁]을 시작하게 된 것입니다.
그 방 안에 있는 살림살이들을 밖으로 던지고, 정결하게 했습니다.
건축을 할 때는 오래 걸리지만,
허무는 것은 아주 짧은 시간에 벌어집니다.
교회의 역사에도 부흥이 일어난 직후에, 침체가 나타나기도 합니다.
[사탄]은 하나님의 부흥이 일어난 곳에 숨어 있다가 나타나기도 합니다.
시내 산에서 하나님이 모새를 불러 40일을 머물렀을 때,
백성들은 그 40일을 기다리지 못하고, 금송아지를 만들었습니다.
신약시대에도 그렇습니다. 바울 서신을 보더라도 2차 선교여행 때,
악이 오염되어서 책망을 받을 일들이 나타납니다.
미국의 대각성운동이 1735년에 [보스톤]에서 벌어졌는데,
[조나단 에드워드]가 촛불을 들고 설교했을 때, 놀라운 [성령의 운동]이 벌어졌는데,
그가 올바르게 질서를 잡으려고 했으나, 성도들은 그를 해고하는 것을 보더라도,
그들의 낮은 영적 수준을 짐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요즘은 [기독교]라고 해도, 다 기독교가 아닙니다.
그러니까 [기독교 정신]이 아니고,
”기독교 복음주의 정신“이라고 [복음주의]를 넣고, 못 박아야 합니다.
[율법주의]는 겉으로는 좋아 보이지만, 한편으로 ”잘못된 광신주의“입니다.
가장 무서운 것은 다 같이 ”좋은 것이 좋은 것이야”라는 [평화 지상주의]가 문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시험]들을 모두 다 막아주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자유의지]와 [믿음]으로, 우리가 강해지기를 바라십니다.
오늘의 말씀에도 나오듯이, 영적인 높은 수준이 떨어져서,
영적인 싸움을 싸우고 있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13장에서 3가지 문제점이 나옵니다.
①첫째로, 부패한 성전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고, [창고]로 사용되고 있어요.
신성한 [성전]이 악의 중심인 [도비야]의 사무실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②둘째로, [안식일]을 제대로 지키지 않고 있습니다.
그것은 유다의 귀족들이 이것을 허용했기 때문입니다.
③셋째로, 우상을 섬기고, 이방인과 통혼하지 않기로 했는데, 이것을 어기고 있습니다.
대 제사장의 자손이 [삼발랏]과 같이, 결혼하는 상황입니다.
영적인 [파수꾼]이 되어야 할 [제사장]이 악한 모습으로 변해 있습니다.
이것이 느헤미야가 본 예루살렘의 모습이라, [거룩한 분노]가 치밀어 오른 것입니다.
그래서 느헤미야는 분노했고, 모든 집기들을 밖으로 내 던졌습니다.
그리고 11절의 말씀과 같이, 그들을 꾸짖었습니다.
“하나님의 집이 버려지다니, 어떻게 된 일이오?”라고 묻고는
그들을 소집해 각각의 자리에 복직시켰습니다.“(느13:11)
▶이런 느헤미야의 분노에서 우리는 무엇을 생각합니까?
예수님이 성전에서 장사하는 모습을 보고, 놀라는 사건이 생각납니다.
[안식일]에 장사하는 장사꾼들을 보고, 뒤집어엎은 사건과 같습니다.
▶예수님이 왜, 그렇게 분노했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거룩한 분노]를 느꼈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거룩한 분노]를 느껴야 합니다.
우리 안에 있는 뿌리 깊은 죄악을 보았기 때문에,
[거룩한 분노]와 [엄한 책망]이 없이는 고쳐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느헤미야는 바로 그런 [거룩한 분노]를 느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거룩한 열매를 얻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느헤미야의 [거룩한 기도]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우리들도 [거룩한 분노]를 느끼면서, [거룩한 기도]로 연결되지 못하면,
거룩한 열매를 기대할 수 없습니다.
느헤미야는 사람들을 적소적재에 임명하고, 직무를 분배하고,
13장 14절 말씀에서 다음과 같이 기도를 했습니다.
”하나님이여, 제가 이렇게 한 것을 기억하소서.
제가 하나님의 집을 위해, 또 그 직무를 위해,
일을 성실하게 수행한 것을 잊지 마소서.“(느13:14)
또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 사람들에게 22절 말씀과 같이, 기도했습니다.
”나는 레위 사람들에게 자신을 정결하게 하고, 성문을 지켜 안식일을 거룩하게 하라고 명령했습니다.
하나님이여, 제가 이렇게 한 것을 기억하시고, 주의 큰 사랑을 따라,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느13:22)
또 이방인을 책망하고 나서, 29-31절 말씀과 같이,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이여, 그들을 기억하소서.
그들은 제사장의 직분과 제사장의 언약과 레위 사람들의 언약을 저버린 사람들입니다.
그리하여 나는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을 이방의 모든 것으로부터 정결하게 하고,
각각의 직무대로 그들에게 책임을 맡겼사오니,
하나님이여, 저를 기억하고, 그들에게 은총을 내리소서.”(느13:29~31)
▶이런 기도는 무엇을 의미합니까?
①첫째로, 느헤미야는 [거룩한 분노]를 나타내면서,
자기 자신을 [하나님의 심판대]에 올려놓고, 기도를 합니다.
저 자신이 “옳고, 불의하다“는 것이 아니고,
저 자신을 하나님의 [심판대]에 올려놓고, 심판을 받을 것을 알고,
”같이 심판해 달라“고, 공평하게 기도하는 것입니다.
②둘째로, 자기 자신을 엄청나게 압박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느헤미야는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일 이외는 다른 계획이 없습니다.
[느헤미야서]의 마지막 끝 구절은 짧은 구절이지만, 이렇게 마칩니다.
그것은 ”정해진 때에, 땔감을 드리는 일과 첫 열매를 드리는 일을 하게 했습니다.
하나님이여, 저를 기억하고, 은총을 내리소서.“(느 13:31)
느헤미야는 하나님께 [자녀의 심정]으로 기도했어요.
오늘 이 어려운 위기의 시대에, [거룩한 열심]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이 시대는 옳고, 그름의 기준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오로지 [여론조사]로 매도당하고 있어, 정의로움을 찾기 어려워요.
[차별 금지법]도 ”사람들이 지지한다.“고 하여도, 옳은 것이 아닙니다.
선과 악도 [하나님의 말씀]에 기준해서 판단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으로, 옳게 만들어 나가야 합니다.
오늘 말씀을 맺습니다.
[신앙]은 한번 은혜를 받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오래 되면 모두 변합니다.
잘 믿었던 집안의 전통도 변하고, 신앙의 문제도 자꾸 변합니다.
우리도 오래 동안 교회를 다니다 보면, 여러 가지로 변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말씀]은 변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문제는 무엇일까요? 우리는 이런 문제를
①”내 스타일 대로“ 해석하고,
②”내 방법으로“ 행동하고,
③ ”내가 슬쩍 바꿔서 실행하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오래하다 보면, 자기도 모르게 [형식화] 되고, 굳어져서,
그래서 교회에 와도 [감동]이 별로 없어요.
그래서 4가지 우(愚=어리석을 잘못)를 범하게 됩니다.
교회가 신앙생활의 중심이 되어야 하는데,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변명은
①자주 교회에 출석하지 않게 되고,
②빠진 이유에 대해 변명하고,
③교회에 대한 경외심이 없어져서,
④”자기 방식대로“ 교회를 섬기게 되어서, 문제가 됩니다..
그러다 보면 생활이 흐트러지고, 사고방식이 엉망이 되어,
하나님이 경고를 보내는데도, 그 경고를 못 알아듣고,
나중에는 혼자서 판단하여 문제가 생깁니다.
오늘 말씀드린 느헤미야의 마지막 말씀과 같이,
우리들은 멈추지 않는 [거룩한 열심]을 실천하고,
사도바울이 했던 [거룩한 열심]으로,
성령 안에서 [거룩한 열심]으로, 헌신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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