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 말씀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서리라. (행4:12~20) 2020.10.04

다이나마이트2 2020. 10. 4. 11:15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서리라. (행4:12~20)           말씀: 이재훈 목사님

 

오늘은 우리 교회가 창립 된지 35주년이 되는 날입니다.

그동안 지금과 같이 [사도행전적인 교회]로 만들어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영상으로 듣는 ”선한 능력으로 일어서리“라는 찬양을 각 나라의 언어로 들으면서,

우리교회를 선교하는 교회로 만들어 주시니 감사합니다.

 

이제 우리는 [교회의 본질]을 생각하며,

더욱 더 헌신하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요즘, 코로나 팬더믹 현상으로 교회가 큰 위기에 빠져 있습니다.

우리가 모여서 예배를 드리지 못하는 것보다도 더 큰 위기는

”사회가 교회를 교회답지 않다”고 보고 있는 시선입니다.

 

지금까지 교회는 언제나 사회에 좋은 영향을 끼쳐 왔습니다.

그러나 이런 위기 가운데, 변하지 않는 우리의 모습을 탓해야 합니다.

 

이런 엄청난 대가에도, 변하지 않는 우리의 모습을 보면, 두렵습니다.

교회를 새롭게 하는 것은 위기를 극복하는 일 보다도,

교회 자체가 변해야 하는데, 우리는 그러지 못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복음을 믿고, 우리가 그 복음을 깨달아서, 복음대로 실천하고,

“새로운 능력을 체험하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아무리 세상의 문화가 급격히 변해도, 교회는 외부의 환경이 아니고,

[복음의 능력]을 잃어버리면, 위기가 찾아옵니다.

 

[힘]이라는 것은 [정치적인 힘]이 아니고,

힘을 가진 자가 힘이 없는 무리에게 패하는 것입니다.

 

로마제국의 패망도 예수의 이름으로 전하는 것을 막을 수 없었기 때문에,

결국은 멸망한 것입니다.

 

사도행전 4장은 사도행전 3장에 이어, 나타나는 반응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공회 앞에서, 사람들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4장 12절 말씀을 읽으십시오.

“예수 외에 다른 어느 누구에게서도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늘 아래 우리가 구원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행4:12)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이런 질문을 받았을 것입니다.

“왜 기독교는 그렇게 독선적이고, 편협한가?”라는 질문입니다.

 

세상에는 다른 종교도 많고, 좋은 종교도 많은데,

“그들에게는 왜 구원이 없다고 말합니까?”라는 질문도 들었을 것입니다.

 

지금 같은 어려운 시대에, 반드시 붙잡아야 할 말씀입니다.

 

오늘 말씀은 성전 미문에 앉아있던 걷지 못한 사람을 고친 후에,

자신을 체포해 심문하는 종교지도자들에게 던진 베드로의 메시지입니다.

 

베드로는 두 번씩이나, “다른 이름으로는 구원을 받을 수 없다”고 반복합니다.

이렇게 부정하는 강조는 최고의 강조를 표현하는 말입니다.

 

“오직 예수님의 이름으로만,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강조한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을 보면,

우리가 겪는 위기가 아무리 심각해도, 교회를 무너뜨릴 수 없습니다.

 

세상에서 최종적인 위기는 종말에 하나님의 심판일 것입니다.

그런 최후의 심판에 비하면, 오늘의 위기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이런 궁극적인 위기 앞에서 흔들리지 말아야 합니다.

이런 위기에서도 [예수 그리스도] 만이 살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유일한 구원자]라고 선언하는 말씀입니다.

만약 이것을 흔든다면, 모든 것이 흔들리는 것입니다.

 

만약 이것을 인정하지 않고, 자기가 [기독교인]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종교의 껍데기만 가지고 있는 [이단]일 뿐입니다.

 

교회는 말씀을 허물려는 [종교다원주의] 앞에 서 있습니다.

그들은 [포용]이 진리인 것으로 알고 있지만,

그들이 주장하는 구원은 배타적인 것입니다.

 

나면서부터 한 번도 “걷지 못한 사람을 고친다“는 것은

예수님이 주시는 [새 생명의 능력]을 주신 것입니다.

 

이것은 유일한 [구원자]이심을 보여주신 증거입니다.

[복음서]에 나타나는 많은 기적들이 예수님을 과시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진정한 [구원자]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무엇을 하라“고 명하러 오신 분이 아닙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걷는 방법“을 강의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손을 잡아 일으켜 세웠고, [새 생명의 능력]을 공급해 준 것입니다.

 

[기독교]는 스스로 구원할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주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살 것을 명령만 하는 종교가 아닙니다.

 

[기독교]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죽은 자들에게 [새 생명]을 줍니다.

다른 모든 종교는 스스로 무엇인가를 해서 추구하도록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어떤 사람입니까?

[그리스도인]은 자기의 주장을 말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따라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기독교인]은 창세기 1장 27절에 나오는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다”는 말씀을 믿어야 합니다.

그러니까 인간에게 제3의 염색체는 있을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이란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받아드리는 사람입니다.

그 말씀을 믿는 것이 [진리]입니다.

 

이 [진리]를 믿지 않으면서, “나는 기독교인이다”라고 하는 사람은 모두 가짜입니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사람들은 모두 산헤드린공의회 재판에 넘겨졌어요.

이들은 걷지 못하는 사람을 고쳐주었는데, 왜 이들이 재판을 받아야 합니까?

 

이것은 기독교의 [박해]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을 심문하면서 19-20절 말씀을 보면,

“그러나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보다 당신들의 말에 순종하는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옳은지,

스스로 판단해 보십시오.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행4:19-20)

 

그들에게 변화가 일어났는데, “그들은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라고 당당하게 말했어요.

 

베드로는 3번이나 예수를 부인했던 연약한 인간인데,

이제 “유명한 설교자”로 당당히 변했어요

 

오늘날 교회에 대한 세상의 압력은 “말하지 말라”고 압력을 주고 있지만,

종교 지도자들은 “학문이 없는 평범한 사람”인줄 알았다가, 놀라운 말을 듣고, 놀랍니다.

 

▶왜, 놀랐습니까?

그들의 증거가 멈출 수 없는 것은, “사도들이 변화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공부하고 있는 사도행전에는 “힘의 대결”이 나옵니다.

[세상적인 힘]의 대결이 아니라, [영적인 힘]의 대결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막강한 권력자가 “성령 받은 사도들의 힘”을 제압하지 못합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나면서부터 걷지 못하는 사람을 “예수님의 능력으로” 일으켜서,

걷게 되고, 그가 뛰게 되니까, 주변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 듭니다.

 

베드로는 모여든 군중들을 향하여 소리쳐 외칩니다.

“이런 기적 같은 일을 행한 것은 우리가 [한 일]이 아니고,

[예수님이 행하신 일이다]라고 예수님에게 주목하게 만듭니다.

 

바로 그때, 함께 모인 사람들은 “예수를 죽이기 위해 뭉친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진리]를 위해서 모인 것이 아니라, 진리를 말살하기 위해서 모인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행전의 역사”는 무엇을 보여 줍니까?

이런 복음 증거에 대한 박해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힘]을 발휘하게 됩니다.

 

한 지역에서 교회가 쇠퇴하면, 또 다른 지역에서 [복음]이 살아나고,

계속해서 연결되어, “타오르는 불길”과 같이, 살아 움직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멈출 수 없는 힘”은 무엇입니까?

이것은 멈출 수 없는 “하나님의 운동”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무엇인가를 “말하지 않을 수 없는 사람“이 되려면,

3가지 조건이 갖추어져야 합니다.

①첫째는, “역사적 사실”에 근거가 있어야 해요.

②둘째는, “분명한 책임”이 수반되어야 합니다.

③세 번째는, 능력과 용기가 있어야 합니다.

 

베드로는 3년간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던 제자이고,

예수님이 죽고, 또 부활하는 것도 보고, 승천하는 것도 본 사람이니까,

 

무엇인가 말하지 않을 수 없는 사람이 되었어요.

공의회는 세상의 권력이지만, 주권과 자유를 침범하면 안 됩니다.

 

네로 황제처럼 핍박하는 사람도 있지만,

중세에는 정반대로 교회와 국가가 결탁해서 세속에 빠뜨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제가 동성애 [차별금지법]을 반대하고 있습니다.

국가 인권위원회는 제정을 권면하고 있지만, 그건 아닙니다.

 

[동성애]는 죄는 아니지만, 그 법대로 시행하면 교회에서 설교는 할 수 있지만,

“설교하는 영상을 올리면 안 된다“고 합니다.

 

이것은 [종교 탄압]이고, [자유 침해]입니다.

 

요즘 미국에서도 코로나 팬데믹 시대에 체육관, 미용실, 문신시설들은 허용하면서도,

교회는 숫자를 제한하는 법이 제정되었으니, 이것은 방역을 이유로 탄압하는 것입니다.

 

교회를 핍박하는 것이고, 자유를 제한하는 것입니다.

”50명 이내에서만 가능하다”고 합니다.

 

이것은 업종별로, 공간의 상태에 따라 달라져야 하는데,

일방적으로 시행하는 것은 문제가 있습니다.

 

[가정]이라는 것은 남녀가 만나서 [아이]를 낳아야 하는데,

[동성애]를 인정하면, 어떻게 아이가 태어 날 수 있습니까?

 

▶왜 우리는 말을 하지 못합니까?

[복음]이 “내 삶에 일부”가 되어야 하는데, 그게 아니고,

“머리에 있는 지식이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역사적인 사실이기 때문에,

거기에 하나님의 능력이 덧입혀져야 하고,

그동안의 역사에서 그 사실이 증명되었습니다.

 

[복음]은 지식이 아니라, “자기의 것으로 체험”되어야 하고,

자기 삶의 중심이 될 때에, “말하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어느 시대나 많은 사람들이 모이면 세상을 정복하려는 유혹에 빠집니다.

중세 시대에 교회는 교회다운 모습이 아니고,

교회의 이름을 빌려서, 도용당한 시대였습니다.

 

[국가의 영역 주권]에, 교회가 이용당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난을 이기고, 어려운 환경을 뚫고, 나가야 합니다.

 

그러므로 유혹을 이기고, [교회의 영역 주권]을 버텨 나가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말씀을 읽고, 설교를 들어야 합니다.

 

지금 [내 상황]을 세상의 방법으로 해결하려고 하면 안 됩니다.

세상의 방법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알게 될 때,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오늘, 창립 35주년을 맞이하는 우리들은 세상에 휩쓸려 가지 말고,

[하나님의 주권]을 회복하여, 세상에 기여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우리 자신이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서서“ 나가야 합니다.

다 함께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서리.”라는 찬송을 함께 부르겠습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나는 일어서리라.

주가 주신 능력으로 나는 일어서리라.

원수가 날 행해와도 쓰러지지 않으리.

주가 주신 능력으로

주가 주신 능력으로

주가 주신 능력으로 일어서리.

 

예수의 이름으로 교회는 일어서리라.

주가 주신 능력으로 교회는 일어서리라.

원수가 날 향해 와도 쓰러지지 않으리.

주가 주신 능력으로

주가 주신 능력으로

주가 주신 능력으로 일어서리.

 

[교회]는 세상의 힘으로, 세상을 이기려하지 말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부활하는 것과 같이,

연약한 모습에서 “십자가의 힘”이 나타나야 합니다.

 

세상에 헛된 지식에 의지하지 말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세상을 이겨야 합니다.

 

온누리교회가 그런 능력으로 일어서는 교회가 되기 바랍니다.

그런 멈출 수 없는 “하나님의 운동력”을 체험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