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결한 지혜가 교활한 음모를 이긴다 (느6:1~16) 말씀: 이재훈 목사님
오랜 만에 귀한 성도님들과 함께, 예배를 드리게 되어 무척 기쁩니다.
오늘부터 다시 느헤미야 말씀으로 복귀하여 이어 갑니다.
오늘은 하나님의 [선한 역사]를 거짓으로 협박하고,
교활한 음모로 [리더십]을 무너뜨리려는 무리들을 보려고 합니다.
하나님의 [선한 역사]를 대적하는 일은 [거짓]입니다.
얼핏 겉으로는 좋은 제안처럼 들리지만, 속을 들여다 보면 [거짓]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은 거짓에 넘어가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①그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가 있기 때문입니다.
②그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분별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느헤미야의 대적들이 사용하는 방법들이 느헤미야에게는 통하지 않습니다.
그들의 목적은 공동체를 무너뜨리고, 느헤미야를 곤궁에 빠뜨리려고 합니다.
처음에는 백성들에게 회유를 하려고 했지만,
그것이 먹히지 않자, 이제는 지도자, 한 사람을 무너뜨리려고 합니다.
오늘은 거짓과 속임수로 공격하는 모습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1) 첫째로, 그들은 처음에는 평화를 가장하여, 음모를 펼치려고 합니다.
느헤미야 6장 2절 말씀을 보면,
”산발랏과 도비야와 아라비아 사람 게셈이 내게 이런 전갈을 보냈는데,
“오시오 우리가 오노 평지의 한 마을에서 만나자. ”
그러나 나를 헤치려는 수작이었습니다.“(느6:2)
이 때가 성벽공사가 거의 마무리 하는 단계입니다.
사람들은 이런 마지막 때에 방심하게 됩니다.
그러나 사탄은 이런 때를 이용합니다.
느헤미야를 헤치려는 무리들은 이런 때에, [평화 회담]을 제안합니다.
역사적으로도 어려운 때에 평화 회담을 자주 사용하는데,
[진정한 평화] 보다는 진실을 외곡 하는 [거짓 회담]이 더 많습니다.
예수님도 마태복음 10장 34절 말씀에서,
”내가 이 땅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말라.
나는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마10:34)고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에 어떤 사람도 평화를 말하고 있지만,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고
솔직하게 얘기하는 사람은[ 예수님] 뿐입니다.
”평화가 임해야 한다”는 것은 누구나 원하는 일이지만,
진실 앞에 서야만, 평화가 가능한 것입니다.
이 말씀은 [복음의 이중성]을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복음]은 우리에게 평화와 연합과 일치와 기쁨을 줍니다.
▶여기에서 [칼]은 무엇을 뜻합니까?
[칼]은 “전쟁과 분리”를 나타내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은 “사람을 살리는 개념”이고,
반대로 [칼]은 “사람을 죽이는 개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은 “사람을 살리려고” 하지만,
어두운 [영]이 나타나면, 우리에게 [다툼]을 일으키게 됩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깨닫는 것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모든 것을 용서하지만, [복음]에는 "타협해서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악]에 대해서는 “칼처럼 타협하지 말라”는 메시지입니다.
수술실에 사용되는 칼은 사람을 살리듯이,
진실 앞에 쓰여 지는 칼은 사람들을 살리지만,
거짓 앞에 사용되는 칼은 사람을 죽입니다.
에베소서 2장 14절 말씀에,
“그리스도는 우리의 화평이시니, 자기의 육체로 둘을 하나로 만드신 분입니다.
그분은 중간에 막힌 담, 곧 원수된 것을 헐어 내셨습니다.”(엡2:14)라고 사도 바울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세상의 평화를 가져왔다‘는 의미입니다.
[진정한 평화]는 회담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것은 [거짓]으로 만나는 것이 아니라,
[진정성 있는 믿음]으로 만나야 성공합니다.
거짓 무리들은 느헤미야에게 4번이나 ”오시오. 우리가 오노 평지에서 만나자”고 제안하지만,
느헤미야는 “오~~우, 노”라고 대답합니다.
느헤미야는 “오노 평지에서 만나자”는 그들의 제의를 거절합니다.
우리도 때로는 ‘아니오’라고 거절할 수 있는 용기가 있어야 합니다.
느헤미야는 행동하기 전에,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분별했습니다.
[속도]보다 중요한 것은 [방향]입니다.
[능력]보다 중요한 것은 시기, [적합한 때]를 분별할 줄 아는 지혜인 것입니다.
바로 이런 [분별력]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도 분별력의 중요성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느헤미야는 그런 음모를 미리 간파한 것입니다.
이런 [평회 회담]을 제안하는 것은 [거짓 제안]입니다.
(2) 둘째로, 거짓 소문을 통해, 느헤미야의 지도력을 무너뜨리려고 합니다.
첫 번째 제안이 거부당하지,
이번에는 “봉하지 않은 편지”를 보냅니다.
그 내용은 “느헤미야와 유다 사람들이 반란을 일으키려고,
성벽을 재건한다는 소문이 이웃 나라에 퍼지고 있으며,
게셈도 그것이 사실이라고 말하고 있다.
더구나 이 소문에 의하면, 느헤미야가 왕이 되려고 한다”는 내용입니다.
▶그것도 “봉하지 않고 보냈다“는 것은 무얼 의미하나요?
많은 사람들에게 소문을 퍼뜨리려는 음모가 숨어 있는 것입니다.
[나쁜 소식]은 산불처럼, 빨리 퍼집니다.
이것은 [우리의 죄성]과도 같습니다.
만약에 이 소문이 왕에게 전해지면, 느헤미야는 처형당합니다,
”왕이 되려고 한다”는 소문을 퍼뜨려, 이간질을 시키려는 의도입니다.
잠언 6장 16-19절을 보면, 여호와가 싫어하는 일곱 가지가 나오는데,
“①거만한 눈(교만한 눈), ②거짓말하는 혀,
③[죄] 없는 자를 죽이는 손, ④악한 계획을 세우는 마음,
⑤악을 행하려고 빨리 달리는 발, ⑥거짓말을 쏟아 붓는 가짜 증인,
⑦형제들 사이에 불화를 심는 사람입니다.
이 중에서 세 가지가 [거짓말]과 관련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거짓말]은 아주 [나쁜 습관]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런 [소문]이 들려오면, 내가 직접 확인을 하고,
정확하게 확인된 사실만 인정하고, 나머지는 그냥 흘려보내야 합니다.
그러니까 자신이 직접 본 것 이외는, 말하지 않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거짓을 통해, 사람의 마음이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느헤미야는 어떻게 행동했습니까?
①첫째로, 느헤미야는 거짓이라는 것을 알았고,
②둘째로, 하나님께 더욱 기도를 했습니다.
[해명]은 간단히 하고, [기도]는 깊이 해야 합니다.
이것이 [순결한 지혜]입니다.
이것이 순결한 지혜가 교활한 음모를 이기는 방법입니다.
(3) 셋째로, 거짓 소문으로, 두려움을 이용해, 하나님의 율법을 범하게 만듭니다.
거짓 소문을 퍼뜨려서 두려움을 갖게 만들어, 율법을 어기게 만듭니다.
10절 말씀을 보면, ”어느 날 스마야가 두문불출하기에, 내가 그 집에 갔더니,
그는 나에게 우리가 성전 안에 들어가 문을 닫아야 합니다.
그들이 당신을 죽이러 올 것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이 맥락을 보면, 스마야는 느헤미야와 가까운 사이입니다.
그래서 집으로 심방을 갔더니, 스마야가 매수당하여, 적들이 당신을 죽이려고 하니,
“성전 문을 닫고, 숨자“고 제안합니다.
이것은 느헤미야를 보호하려는 말과 같지만, 그것은 음모입니다.
가장 가까운 사람이 매수당하여, 전하는 밀입니다.
▶그럼, ”느헤미야가 어떻게 분별하는가?”를 살펴봅시다. 11-13절 말씀에,
“총독이 내가 어떻게 달아 날 수 있느냐? 나 같은 사람이 목숨을 구하겠다고 어떻게 숨을 수 있겠소?
나는 그렇게 하지 않겠소. 나는 그때 스마야가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것이 아니라,
도비야와 산발랏에게 뇌물을 받고, 나에게 이런 예언을 한 것을 알게 되었소.
그들이 스마야를 매수하여 나를 위협한 것은 그 일로 나를 범죄하게 하여,
내 이름을 더럽히고, 나를 비방하기 위해서 그런 것입니다.”(느6:11-13)
느헤미야는 스마야를 통한 음모에 넘어가지 않습니다.
이 말은 자신의 목숨을 지키기 위해서, “하나님의 율법을 어기지 않겠다.“는 의지입니다.
느헤미야는 어떤 경우라도 ”하나님의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합니다.
만약에 느헤미야가 스마야의 말을 듣고, 두려워서 숨었더라면,
느헤미야의 리더십은 흔들렸을 것입니다.
[사울]도 위기가 다가 왔을 때, 제사장처럼 행동했으니까,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은 것입니다.
▶느헤미야가 어떻게 지킬 수 있었을까요?
내가 말씀을 지키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말씀이 나를 지키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돌보심이고, 하나님의 손길입니다.
그것이 느헤미야의 [순결한 지혜]이고,
그것으로 대적들의 [교활한 음모]를 이기게 만듭니다.
[순결한 지혜]가 느헤미야의 믿음을 지키게 하였고,
느헤미야가 [합당한 삶]을 살게 된, [원동력]이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지름길]입니다.
15절을 보면, 드디어 성벽 건축 공사가 완성되었습니다.
"이렇게 해 성벽건축이 52일 만인 엘룰 월 25일에 끝났습니다."
우리 원수들이 모두 이 소식을 듣고, 주변 나라들이 보고 모두 두려워하고,
절망감에 휩싸였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신 일임을 그들도 알게 됐습니다.“(느6:15~16)
말씀을 정리합시다. 52일 만에 성벽을 완성했어요.
▶그건 무슨 의미일까요?
①첫째는 [하나님의 은혜]예요. 하나님의 도움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거예요.
②둘째로, [느헤미야의 기도]가 있었으니까, 가능했던 거예요.
③셋째로, 아무리 좋은 지도자가 있어도 follow ship이 있어야 가능합니다..
이것은 느헤미야의 [리더십]이 있었기에, 성공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선한 역사]는 누구도 무너뜨릴 수 없습니다.
지금도 느헤미야와 같은 [순결한 지혜]가 필요한 시대이오니,
우리는 세상을 불평하지 말고, 그 [순결한 지혜]로 말씀을 지키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 헌신해야 할 때입니다.
그러면 우리에게 승리를 안겨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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