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 말씀

긴장을 창조적으로 끌어않는 공동체 (느3:1~12) (2020.09.13)

다이나마이트2 2020. 9. 13. 10:34

긴장을 창조적으로 끌어않는 공동체 (느3:1~12)          말씀: 이재훈 목사님

오늘은 성벽 재건의 과정을 통하여 [느헤미야의 리더십]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선한 일]을 하려면, 우선 그 공통체가 “하나가 되어야” 성공할 수 있습니다.

 

▶공동체가 [하나]가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다른 목소리를 수용해야 하고, 반대하는 세력을 끌어안아야 합니다.

 

서로의 차이를 극복하고, 다양한 의견을 조정하여, [하나]로 만들어 가야 성공합니다.

이런 방식이 [민주주의]입니다.

 

미국 남북전쟁의 엄청난 위기의 상황 가운데, [에이브러험 링컨]이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참된 민주주의를 지켰기” 때문입니다.

 

국가가 위기에 있을 때, 의사 결정과정에서 자기 쪽 사람만 참석 시키지 않고,

정반대의 진영에 있던 사람도 함께 선택하여 참여 시켰습니다.

 

[링컨]은 소신껏 자기주장을 표현하는 사람을 뽑아서 중용했고,

서로 간의 충돌을 피하고, 완벽한 융합을 이끌어 내는 내각을 구성하여,

그 내각은 링컨의 말을 따르는 사람이 아니고, 공격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는 노예의 비참한 생활상을 보면서

"정부는 반은 노예이고, 반은 자유인인 현 체제를 영구히 지탱해나갈 수는 없다.

이제 선택의 때가 왔다. 모두 노예가 되느냐? 아니면 자유인이 되느냐?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고 역설했으며, 노예 해방에 앞장섰습니다.

 

[링컨]의 의사 결정 과정을 보면, 좀 답답해 보이기는 했지만,

최종적인 합의에는 강력한 힘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것은 결국, 서로 [하나]가 되어 미합중국을 이끌어 갔던 것입니다.

 

▶[민주주의]는 무엇입니까?

[파커 팔머]라는 사람은

“민주주의란 긴장에서 유발되는 에너지를 억압하는 것이 아니라,

댐에 가득한 물의 에너지를 사용 가능한 힘으로 바꾸는 수력발전소와 같은 것이다”라고 설명했습니다.

 

[민주주의]란 “긴장하는 갈등을 해결하고, 서로 끌어 안기위한 제도”입니다.

그러므로 두 세력을 끌어안아 [하나]로 만들어서 합의를 도출해 내야 합니다.

 

거기에는 [내 편]과 [남의 편]이 따로 없습니다.

서로 [합의]를 도출하여, [하나]의 의견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링컨 대통령은 남과 북이 전쟁을 하면서도,

“누구에게도 악의를 품지 말고, 사랑과 자비를 품어야 한다”고 호소했습니다.

 

어느 기자가 그에게 “남부 인들이 전쟁에서 패배하고 돌아 올 때, 어떻게 대하겠느냐?”고 질문하니까,

그는 “남에게 정죄하지 말고, 서로 용서하고, 서로 품어 줘야한다”고 대답합니다.

 

그리고 전면적인 사면을 선포하고, ”형제가 집을 나갔다가 돌아오는 것으로 생각하자“고 제안합니다.

이것이 민주주의의 지도자가 보여주는 모습입니다.

 

이런 모습을 먼저 보여준 사람이 [느헤미야]입니다.

이것이 ”느헤미야의 리더십”입니다.

 

오늘 말씀에는 익숙하지 않은 성문의 이름과 건축한 사람들의 이름이 나오는데,

이것은 앞서 보여준 링컨의 지도자의 모습과 같습니다.

 

그 많은 사람들을 설득하여 갈등을 극복하고, [하나]의 목표인

“성벽재건의 목표”를 향하여, 다 같이 나가는 모습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선한 일]을 하기 위해서는 많은 사람들이 동시에 참여해야,

그 목적에 맞게 효율적으로 공사기간을 단축하여 달성할 수 있습니다.

 

▶느헤미야는 어떻게 했습니까?

많은 사람을 동원하여, 동시에 공사 기간을 단축한 것입니다.

 

느헤미야는 공사 구간을 40구간으로 나누고, 한 구간을 80미터 정도로 정하여,

짧은 시간 안에 완성하려고 합니다.

 

이렇게 여러 사람에게 각자의 구간을 책임지게 만들고,

동시에 건축하는 방법은 참으로 놀라운 [기획]입니다.

 

▶여기에 어려운 여러 사람의 이름이 나오는 것은?

①첫째로, 이 사람들에게 중간 관리자로 리더십을 부여한 것이고,

②둘째로, 각자에게 책임 있는 공사를 맡겼던 것이고,

③셋째로, 각자에게 “창조적인 생각으로 아이디어를 내라“는 뜻입니다.

 

그래야 [선한 일]을 목적에 맞게 이룰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비전문가들도 ”헌신적으로 참여하도록“ 배려한 것입니다.

 

▶[선한 일]은 어떤 일입니까?

내 [일]이 아닌 것을, ”내일처럼 참여하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느헤미야의 리더십 중에서 돋보이는 것은 무엇입니까?

성벽을 신속하게 재건하는 목적도 있지만, 그것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①첫째로, 이를 통해서 백성들의 마음을 [하나]로 통합하고,

②둘째로, 하나님이 원하는 [선한 일]에 백성들이 참여하게 만들고,

③셋째로, 각자의 생각을 뛰어 넘어, ”[하나 됨]의 통일성을 갖게“ 하는 것입니다.

 

▶그 [하나 됨]이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모두가 같아지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생각을 받아드리고, ”전체적으로 통일되게 이끄는 리더십”을 말합니다.

 

▶우리가 협력하고 있는 산마루교회는 어떤 교회입니까?

서울역 주변에서 노숙하는 사람들을 도와주는 교회인데, 그 일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노숙인을 데려와서 품으면, 그 만큼 일반 성도들이 불만을 가지고 빠져 나갑니다.

노숙인 품는 일이 영적인 [부흥]은 없지만, 이 [일]이 [선한 일]이니까,

하나님이 바라시는 일입니다. 그러니까 성도들이 어려워도 품어야 합니다.

 

이주연 목사님은 그런 노숙인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직접 하지 못하는 일을 우리를 대신해서 실행하고 계십니다.

 

5절 말씀을 보면, 이런 [선한 일]에도 참여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 다음 구획은 드고아 사람들이 복구했는데, 그 귀족들은 여호와의 일에 협조하지 않았습니다.”(느3:5)

 

그들은 [귀족]이기에,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고된 노동일을 하다보면, 사람들의 [됨됨이]를 알 수 있습니다.

 

아주 오래 전에 일입니다. 제가 양재 담당목사일 때, 눈이 너무 많이 와서,

오시는 길과 주차장에 눈을 치우기로 결정하고, 주변의 눈을 치웠는데,

“꼭 우리가 이걸 해야 하느냐?”고 불평하는 분들도 있었고,

또 어떤 목사님은 “그때가 가장 생각난다.”고 회고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어느 시대에나 참여하는 사람과 반대하는 사람들이 있기 마련입니다.

그렇게 비판만 할 게 아니라, [해야 할 일]은 반드시 해야 합니다.

 

▶여기에 나오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이름이 왜, 중요할까요?

그 한 사람의 이름 속에, 굉장히 중요한 메시지가 숨어 있습니다.

 

(1) 첫째는, "하나님은 한 사람, 한 사람을 소중하게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느헤미야는 성전을 고치면서 소수의 그룹이나, 전문가에게 맡기지 않았습니다.

예루살렘에 있는 모든 사람, 즉 부유한 사람이나, 가난한 사람이나,

공직자이거나 일반시민이거나, 모두 다 참여하게 했다" 는데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교회도 마찬가지 입니다. 교회가 몇 사람만 움직이면 안 됩니다.

교회 공동체도 여러 사람이 합하여 선을 이루어야 합니다.

 

(2) 둘째로, 느헤미야는 혼자 참여하지 않고, 가문이 모두 동참하게 합니다.

 

어른과 아이들, 남자와 여자가 모두 다, 참여하게 만들었어요.

여러 사람이 모여서 “일을 했다“는 것은, [협동 정신]을 말합니다.

 

이렇게 한 사람, 한 사람, 각자의 이름을 열거한 것은

모두가 함께 어울어서, ”그 일을 해 냈다”는 감동이 있기 때문입니다.

 

(3) 셋째로, 느헤미야는 사람들을 “은사대로 일을 시켰다”는 것입니다.

 

느헤미야가 성벽 건축을 빨리 끝낼 수 있었던 것은

이렇게 각자의 은사들을 활용하여 일을 분담해서 시켰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능력은 어디서 나옵니까?

그것은 각자가 참여하는 [자발성]이 있어야, 거기서 능력이 나옵니다.

 

사람은 자기가 좋아서 스스로 참여해야 합니다.

헌신하는 사람은 자기가 좋아서 하기 때문에, “밤을 새워 일해도” 즐거워합니다.

특별히 하나님의 일은 “자발적으로” 일해야 합니다.

 

(4) 넷째로, 느헤미야는 "일의 역활을 분담했다"는 거예요.

 

여기에 보면, “그 다음”이라는 단어가 반복해서 나옵니다.

이 말은 “그 다음 단계”라는 뜻이 아니고, “그 다음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순서를 의미하는 말이 아니고, ”함께 조화를 이루었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일정한 구획은 [A]가 맡고, 그 다음 구역은 [B]가 맡았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52일 만에 성벽이 건축된 것입니다.

 

여기서 ”권한을 위임했다“는 것은

”자기가 하는 일에 간섭을 받지 않고, 책임지고 일하라”는 의미입니다.

 

이와 같이 권한을 위임하고 목회하신 분이 하용조 목사님입니다.

그 모습이 [느헤미야의 모습]과 같습니다.

 

기러기가 함께 날라 갈 때, [브이]자 대형을 이루는데,

맨 앞에 나가는 기러기가 ”공기 저항을 가장 많이 받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 기러기가 지치면, 서로 교대하면서 나른다고 합니다.

 

이런 새들에게도 자기 나름대로의 질서가 있습니다.

이런 새들의 세계에도 [공동체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 공동체가 교회이건, 사회이건, 서로가 부대끼며

함께 서로 합력해서 자신의 연약함을 극복해 나가야 합니다.

 

오늘 말씀은 어려운 사람들의 이름과 익숙하지 않은 단어들이 나와서,

읽기에 지루하지만, 느헤미야 에게는 3장의 말씀이 감동적일 것이라 생각됩니다.

 

그러나 여기 명단에서 꼭 들어가야 할 이름이 없습니다.

그 이름은 느헤미야, [자신의 이름]입니다.

 

그는 [선한 일]은 하지만, [자기의 이름]을 감추는 사람입니다.

그는 오케스트라의 지휘자처럼 [일]했지만, 자신의 이름은 나타내지 않았습니다.

 

▶자유 민주주의는 어떤 것입니까?

여러 가지 산재한 의견들을 한데 모아, 차이를 극복하고,

자기와 다른 세력의 의견을 받아드려, 창조적으로 끌어안는 제도입니다.

 

자기의 주장과 다른 의견을 받아드리고, 함께 어울어져서 나가야 합니다.

[자기 편] 만 챙기는 것이 아니라, [남의 편]도 챙겨주는 모습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도 그런 공동체가 되기 위해 서로 다른 일을 하지만,

[선한 일]을 하는데 서로 협력하여 함께 어려움을 극복해 나가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