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사진

서산 해미읍성

다이나마이트2 2020. 7. 18. 21:02

해미읍성은 사적 제116호로 성곽둘레 1,800m, 높이 5m, 면적 20만의 현존하는 가장 잘 보존된 평성이다.

조선 태종 18년부터 세종 3년까지 3년에 걸쳐 쌓았고 성종22년(1491년)에 완전한 규모를 갖추게 되었다.

해미(海美)는 조선초 해안지방에 출몰하는 왜구로 말미암아 지리적 여건을 고려해 1407년(태종7)

정해현(貞海縣)과 여미현(餘美縣)을 합쳐서 부르게된 지명이라고 한다.

지금의 해미읍성은 일반적인 행정기능의 읍성(邑城)이 아닌 조선전기 충청병마절도사의 병영성(兵營城)이다.

충청병영은 원래 덕산에 있었으나 왜구를 효과적으로 방어하기 위해 해안과 가까운 해미로 이설하여

1417년(태종17년)부터 1421년(세종3) 사이에 축성되었으며, 1652년(효종3) 청주로 이전되기까지

230여 년간 충청지역 군사권을 행사하던 성이였다. 

조선말 천주교도들의 순교 성지로도 유명하다.

천주교 박해 당시 관아가 있던 해미읍성으로 충청도 각 지역에서 수많은 신자가 잡혀와 고문 받고 죽음을 당했으며,

특히, 1866년 병인양요 박해 때에는 1천여 명이 이 곳에서 처형됐다고 한다.

우리나라 천주교 전래는 조선후기 양반 지식층 주도의 서학(西學)이라는 학문 연구를 통해 수용되고 전파되었으나,

이후 종교화되면서 기존 전통문화 가치체계 도전으로 인식되어 천주교 박해(迫害)가 시작되었다.

해미읍성의 서쪽문 지성루 (枳城樓) 탱자나무가 많이 있어서 탱자나무지(枳)자를 써서 지성루라고 했나보다.

해미읍성의 둘레에 적이 쉽게 접근하지 못하도록 탱자나무를 돌려심어 탱자성이라는 별칭이 있다.

최근에 개축한 흔적이 선명하게 보인다. 현재는 성곽 외부에 탱자 나무가 보이지 않는다.

해미읍성의 정문 진남문(鎭南門)

충청남도 서산시 해미면에 있는 해미읍성의 정문. 해미읍성의 관아문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단층 문루 형식에

팔작지붕을 얹었다. 성문은 아치 모양의 홍예문이며 옹성이 없다.

진남문은 해미읍성의 세 관아문 중 유일하게 본래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

내가 왔다는 증거로 셀카도 찍어 본다.

식사를 하기 위해 살짝 시내를 돌아 보았는데 바로 해미시장이다. 거리가 참 깨끗하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니 우선 식사부터 하고 돌아봐야 겠다.

골목식당에서 해미읍성 편을 해서 한번 찾아 가 볼까하다가 나는 삼계탕 집에 들었다.

녹두를 많이 넣어 주시고 직접 삼계탕을 만들어 파시는 집이어서 엄청 맛있다. 닭도 참 큰 닭을 사용하셨다.

진남문을 통과하여 오른쪽에 문화시설 사업소라는 간판이 붙은 건물이 있다. 기와집이 참 멋있다.

진남문 안쪽에 들어가서 뒤 돌아 본 모습니다. 

진남문의 입구에서 들어가면서 왼쪽에 교황님이 드신 마늘빵을 드시라고 카페에서 광고를 하신다.

해미읍성 성벽에 올라서 해미읍을 바라보는 모습이다. 거리가 참 깨끗하다.

해미읍성 성루에 큰 북이 하나 놓여 있다. 행사에 실재 사용을 하는지는 모르겠다. 단청의 색이 참 곱다.

해미읍성 성벽에 올라서 왼쪽 성 내부의 모습니다.

해미읍성의 성벽에 올라서 오른쪽을 바라보는 성 내부의 모습이다.

서산 해미읍성이 자리한 서산시 해미면과 운산면 일대는 원래 고려~조선 전기까지 정해현(貞海縣)과

여미현(余美縣)이 각각 자리하였던 곳이다.

그런데 왜구로 인한 피해로 황폐화된 곳이 많아 두 고을을 합치고,

각 현의 명칭에서 한 글자씩을 따 해미현(海美縣)이라 이름 지었다라고 한다.

성 안쪽에서 보면 문루 아래를 가로지른 받침돌 중안에 황명홍치사년신해조(皇明弘治四年辛亥造)라는 글자가 있다.

황명홍치(皇明弘治)는 명나라 효종의 연호인 홍치를 의미 하는데 1491년 (성종22년)에 진남문이 중수(重修)되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고 한다.

교황 방문 기념을 알리는 표지석이 있다. 2014년 8월 15일 제266대 프란치스코 교황(Pope Francis)이

해미읍성을 방문했다는 기록이 있다.

불랑기(佛狼機) 임진왜란 때 명 나라 원군이 가져와 전투에 사용했다고 한다.

대장군포 (大將軍砲) 포신에 두터운 마디를 두른것은 포의 강도 저하를 보완하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별대완구 (別大碗口) 완구(碗口)는 그 생김새가 음식 그릇 주발과 비슷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화포 (火砲) 조선시대 주력 화기로 많은 전투에서 사용되었다고 한다.

천자총통 (天字銃筒) 임진왜란 때 적함을 부수거나 적의 진지를 부수는데 큰 역활을 한 무기라고 한다.

신기전기화차(神機箭機火車) 조선시대 문종1년 (1451년)처음 제작되었으며 신기전 100발을 장전한 이후에 동시에

내지는 연속적으로 발사할 수 있는 일종의 다연장 로켓으로 여러 전투에서 큰 성과를 내었다고 한다.

제작 당시 설계도가 남아 있는 것 중에서 가장 오래된 병기라고 한다.

검차(劍車) 수레의 전면에 설치된 방패에 검을 꽃아 만든 무기로 고려시대부터 사용하였다.

검차는 평지에서 4명이 운용하였으며 수레 맨 앞에는 날카로운 칼날을 꽃아 공격하였고 호랑이 얼굴 모양의

방패를 설치하여 적의 말을 놀라게 했다고 한다. 

투석기(投石機) : 지렛대의 원리를 이용하여 돌멩이들을 멀리까지 던질 수 있는 기계이다.

공성전에서 상대의 벽을 무너 뜨리기도하고 돌멩이 뿐만이 아니라 불을 담아 던지기도 한다고 한다.

운제()란 구름에 닿을 만큼 높은 곳에 올라갈 수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나무로 틀을 짜고 좌우에 각각 바퀴 3개씩을 달아 성 밑까지 다가갈 수 있도록 하였고,

두 개의 높은 기둥을 세워, 성벽에 다가가서 접혀진 사다리 부분을 펼칠 수 있도록 만들었다

회화나무 일명 호야나무라 불리며 충청남도 지정 기념물 제172호로 수령 300년 이상 추정되는 나무이다.

1866년 병인박해 때 천주교 신자들을 이 나무에 손발과 머리채를 매달고 고문했다고 전해 진다.

충청지역 천주교 신자들을 잡아들여 처형하였는데 그 수가 무려 1,000명 이상이라고 한다.

캄보디아 청아익 킬링필드 현장에 가보면 어린 아들을 나무에 매달고 머리를 부딪히게 해서

끔찍한 대학살을 저질렀다고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보았는데 우리 나라에도 이런 역사가 있는 줄 몰랐다.

순교 기념비(殉敎紀念碑)

1790년부터 시작된 천주교 박해는 병인양요(1866년 프랑스함대 강화도 침범사건)와 오페르토 도굴사건(1868년

독일인 오페르토가 흥선대원군의 아버지인 남연군묘 도굴 미수사건)등으로 극심해 졌다.

당시 해미읍성은 호서좌영으로서 내포지방 13개 군현의 군사권을 쥐고 있어 충청지역 천주교인 1,000여명을

잡아들여 처형 하였다고 한다. 이런 연유로 2014년 프란치스코 교황이 한국을 찾았을 때 해미읍성과

해미순교성지를 찾았다고 한다. 

순교기념비의 뒷면에 이렇게 적혀 있다. 병인박해(1866)에서 무진박해(1868) 때 1,000여명이 순교했다고 적혀있다.

옥사 (獄舍) 해미읍성의 거의 거운데 쯤에 위치하고 있는 옥사이다.

1790년부터 100여년간 수 많은 천주교 신자들을 국사범으로 규정하여 이곳에서 투옥하였다고 한다.

옛날 시골에 우리집에 있던 우물과 비슷하게 생긴 무물이 있었다.

우물이다. 실재 물은 없었다. 옛날 시골 우리집에도 이런 큰 우물이 있어서 두레박으로 우물물을 길렀었는데...

꾀 부유한 집안 인 것 같다. 사랑채와 바깥채로 구별이 되어 있는 집이다.

민속 가옥 어릴 적에 시골에서 보던 바로 그런 집이다. 특이한 것은 마루가 안보이고 대청이 없다.

민속 가옥을 지나는 길에 참 예쁜 만수국 (메리골드) 꽃 밭이 있어서 사진으로 한장 담아 본다.

옥사의 동쪽에 민속 가옥이 몇 채 보인다 조선시대의 부농, 서리(말단관리), 상인의 집을 재현해 놓았다.

해미 읍성의 동쪽 문 잠양루(岑陽樓)라고 적혀 있다. 넓은 주차장이 있는 곳이 동쪽 문이다.

문은 닫혀 있었고 서쪽문 지성루과 마찬가지로 동쪽문도 새롭게 개축을 한 것 같다.

동헌(東軒)으로 들어가는 문인데 호서좌영(湖西左營)이라고 현판이 붙어 있다.

호서좌영이라고 적혀 있는 동헌의 입구 앞에 느티나무가 한 그루 서 있다. 보호수로 지정이 되어 있다.

동헌(東軒) 의 모습이다. 관리가 공무를 수행하는 장소라는 뜻이다.

조선시대 지방관서에서 정무(政務)를 보던 중심건물이다. 관찰사 수령들의 정청으로서 지방의 일반행전 업무와

재판등의 여기서 행해졌다.

동헌과 부속건물들

해미읍성 내아(內衙) 관리와 가족들이 생활하던 관사 건물

내아 안에 참 독특한 소나무가 하나 있었다. 고난을 참 많이 격은 나무같은데 너무 아름답게 보인다.

객사 (客舍) 객관이라고도 하며 지방을 여행하는 관리나 사신의 숙소로 사용.

조례에 참석하지 못하는 지방관리들은 왕을 상징하는전패(殿牌)를 객사에  모시고 초 하루와 보름에 왕궁을 향해

절을 올리고 망궐례(望闕禮)를 올렸다고 한다.

국궁장이 있다. 마음 같아서는 활을 한번 쏘아 보고 싶었지만 실제 쏠수 있는 지는 모르겠다.

처음으로 들러 보는 해미읍성인데 어디에서 어떤 사진을 찍어도

푸른 잔듸에 잎이 무성한 나무에 사진이 잘 나오는 것 같다.

배수로 정비가 눈에 띄게 잘 되어 있는 것 같다. 실제 처음 성읍이 만들어 졌을 때도 이렇게 잘 되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평지의 성읍이어서 그런지 배수로 정비가 매우 독특하게 참 잘 정비 되어 있는 것 같다.

누군가가 참 정성스럽게 여러개의 돌탑을 쌓아 놓았다.

내려 오는 길에 셀카 놀이도 해 본다.

청허정(淸虛停)

1491년 (성종22년) 충청병마절도사로 부임한 조숙기가 지은 청허정은 '맑고 욕심없이 다스리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곳에서 병사들은 휴식을 취하거나 활을 쏘며 무예를 익혔고, 문객들은 시를 짓고 글을 남겼다.

소나무 숲을 걷다보면 자연적으로 힐링이 되는 듯한 참 아름다운 소나무 숲이다.

소나무가 너무 멋있었다. 지개가 나무를 받치고 있는 모습도 참 목가적이다.

지갯꾼이 흐르는 땀을 식히고 가듯이 지개 옆에 앉아서 한숨을 돌려 본다.

기념품 판매점도 있었다.

읍성이 관리가 잘 되고 있고 넓은 잔듸밭으로 되어 있어서 연을 날리는 분들이 많았다.

농 특산물 판내장도 있었다. 실제 어떤 물건을 파는 지는 모르겠다.

소원 나무라고 적혀 있었다. 왜 이런것이 이곳에 있어야 하는지 는 모르겠다.

성읍 내부에 해미읍성 전통주막이라고 고풍스럽게 있었다.

해미읍서의 정문이라고 보여지는 남문이다. 진남문(鎭南門)이라고 현판에 적혀 있다.

해미읍성이 참깨끗하게 잘 보존이 되어 있는 느낌이 들었다.

관광안내소도 참 아름답게 되었다. 남문과 동문사이에 넓은 주차장 앞에 위치한다.

시간이 멈춰버린 듯한 성벽 크고 작게 쌓인 돌들은 저마다 해미읍성이 지나 온 역사를 머금고 있다.

조선시대 선조들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역사의 현장 해미읍성에 다녀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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