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사진

삼척 죽서루 2020.08

다이나마이트2 2020. 8. 27. 21:26

2020년 8월 26일 관동팔경의 제일루라고 하는 강원도 삼척시 죽서루에 잠시 들러 보았다.

넓은 주차장이 있었고 문화 해설사의 집이 있었다. 나는 혼자 잠시 들렀기에 문화 해설사와는 상관이 없었지만

강원도가 관광을 위하여 많이 수고를 하신다는 생각은 해본다.

삼척 죽서루의 입체 조감도가 보인다. 1번 부터 4번까지 돌아 보아야 겠다.

넓은 빈 터가 있는 것으로 보아 아직 발굴이 안된 지역인가 보다. 예산이 지원되어 빨리 발굴이 진행되면 좋겠다.

보물 제213호인 죽서루는 귀중한 문화 유산이기 때문에 아끼고 사랑해 달라는 안내가 있다.

특히 죽서루 누각 뒤쪽은 절벽이기 때문에 위험하다는 안내도 해 주신다. 

일단 입장을 해 보려고 하는데 COVID19 때문에 마스크를 착용해야지만 입장이 가능하다.

멀리서 보기에도 참 아름다운 누각이다.

상층의 기둥은 20개이고, 하층의 기둥은 17개 이다. 하층의 기둥이 3개나 적다.

하층의 기둥의 길이도 서로 다르다. 왜냐하면 자연 암반과 자연 초석의 높이가 다르기 때문에

기둥의 높이도 서로 다르다. 참 아름다운 누각이다. 

송강 정철 가사의 터 표지석

1991년 2월을 송강 정철의 달로 문화관광부가 정하고 관동별곡이 나오는 이곳 삼척 죽서루와

성산별곡의 무대인 전남 담양 식영정 2곳에 송강의 업적을 기념하는 표석을 세웠다고 한다.

일반적인 시비와는 다르게 8각형의 기단에 송강의 대표적인 친필, 수결, 세움말, 가사 창작의 배경을 담아

송강의 생애와 문확에 관한 미니 박물관 역할을 하도록 만들었다고 한다.

관동별곡 원전이 보인다.

오른쪽이 죽서루의 북측이다. 기둥이 3개이므로 2칸이라고 할 수 있다.

가운데 기둥은 주춧돌 대신에 자연 암반을 초석으로 이용하여 기둥을 세웠다.

죽서루의 남측 에서 2층을 바라보는 모습이다. 작자미상의 죽서루(竹西樓)라고 힘차고 아름다운 글자체의 현판이 있다.

중수기(重修記) - 김광용

관동 팔경의 하나인 죽서루(보물 제213호)는 오십천 푸른 물이 감돌아 흘러 수십 길 기암절벽에 어울려진

천혜의 단애(斷崖) 위에 터를 잡아 장관인데 옛부터 시인 묵객이 다투어 찾아와 시정(詩情)에 젖었던

유서깊은 곳으로 이 고장 젊은이들의 꿈과 낭만이 충만한 이상적 역사의 현장으로써 찾는 이의 마음을 설레게 한다.

이토록 자랑스러운 관동의 제1루로 만인의 사랑을 받을 수 있게 된 것은 1980년 당시 최규하 대통령(崔圭夏)께서 취임 직후 경내 확장을 칙지(勅旨)함에 따라 1981년 10월 18일부터 1982년 12월 4일까지 2억 1백만 원을 들여

경내 면적을 3천 8백 1십 3평으로 확장하고 누각 개수, 화장실 신축, 평삼문(平三門) 개축, 담장 설치 등

대대적으로 중수함으로서 독특한 건축 양식을 자랑하는 누각과 수려한 주변 경관은 세계적인 명소로

불멸의 문화유산으로 영원히 남게 되었다.

늦게나마 최규하 전 대통령께서 배려해 준 은혜에 감사하는 삼척 시민의 뜻을 모아 이 중수기를 쓴다.

1991년 12월 20일

삼척시장 김광용(金光容) 근지(謹誌)

竹西樓

三陟官樓是竹西 (삼척관루시죽서) 삼척의 관루는 죽서루인데

樓中佳客沈中書 (누중가객심중서) 누중의 가객은 심중서로다

如今白首能詩酒 (여금백수능시주) 지금과 같이 백발임에도 시와 술에 의탁하여

暇日相遊爲說余 (가일상유위설여) 한가한 날 나를 위해 즐거운 자리 베풀었네

憶沈東老(억심동로)

鳳池司諫臥仙槎 (봉지사간와선사) 봉지에서 사간을 지낸 이 선사 땅에 누워

早和滄浪漁父歌 (조화창랑어부가) 일찍이 창랑에서 어부사를 읊는 뜻을 알았네

爲說鹽梅時所急 (위설염매시소급) 말하노니 바른 정사를 하는 것이 시급하지 않는가

天廚鼎味待君和 (천주정미대군화) 조정에서 선정 묘책을 논의함에 임금은 그대를 기다린다네

-憶崔卜河(억최복하)

登竹西樓(등죽서루)

峵屼蒼崖百尺樓 (횡올창애백척루) 가파른 절벽에 백척 낭떨어지 위에 세워진 죽서루

花開花落幾春秋 (화개화락기춘추) 꽃이 피고 꽃이 지기를 거듭했으니 몇해나 되었나

三千徒與風雲散 (삼천도여풍운산) 삼천이나 되는 화랑도들은 바람과 구름처럼 흩어져

五十川同歲月流 (오십천동세월류) 오십천의 맑은물과 함께 세월속에 흘러갔다네

 

畵角一聲朝暮恨 (화각일성조모한) 쇠뿔로된 화각 소리에 아침 저녘의 한이 서려있네

煙波萬里古今愁 (연파만리고금수) 만리 밖에 물안개가 자욱해 예나 이제나 수심 가득

何當報了君恩重 (하당보료군은중) 임금님의 은총을 입고 마땅히 보답해야 할것이로데

高掛塵冠伴鷺鷗 (고괘리관반로구) 때묻은 벼슬이랑 벽에 걸어두고 갈매기 백로들과 벗하고 싶구나

벽계 조규용

竹西樓 敬次 / 栗谷先生 韻(죽서루 경차/ 율곡선생운)

蒼崖陡起架飛樓 (창애두기가비루) 푸른 이끼 낀 절벽 위에 우뚝 솟은 높은 누각

三伏炎蒸爽似秋 (삼복염증상사추) 삼복의 찌는 더위에도 시원하기가 가을 같구나

遠峀浮嵐濃淡態 (원수부람농담태) 먼 산 푸르스름한 기운 짙고 엷은 형상 이루었고

晴川芳草淺深流 (청천방초천심류) 비 갠 날 맑은 냇물 아름다운 풀 사이로 얕고 깊게 흐르는데

雕欄物色添詩料 (조란물색첨시료) 조각한 난간의 형상은 시 짓는 재료를 더해주고

錦席絃歌散客愁 (금석현가산객수) 비단 방석에서 거문고 타며 읊는 시 나그네 근심 흩날리는구나

吏隱名區翻自愧 (이은명구번자괴) 은거하고 싶은 벼슬길 좋은 경치 도리어 내 자신에게 부끄럽고

江湖一約負沙鷗 (강호일약부사구) 강호에 살기로 한 굳은 약속 모래 위 갈매기에게 부끄럽구나

正祖御製(정조 어제)

彫石鐫崖寄一樓 (조석전애기일루) 돌 다듬고 절벽 쪼아 세운 누각 하나

樓邊滄海海邊鷗 (누변창해해변구) 누각 앞은 푸른 바다 해변에는 갈매기 노니네

竹西太守誰家子 (죽서태수수가자) 죽서루의 태수는 누구 집 아들인가

滿載紅粧卜夜遊 (만재홍장복야유) 미녀들 가득 싣고 밤새워 뱃놀이하는구나

 

次(차운하다)

仙閣岧嶢揷高城 (선각초요삽고성) 신선 사는 누각 높다란 성에 세웠는데

客來登眺動愁情 (객래등조동수정) 나그네 올라 보니 서글픈 마음 치미네

十分歸思雲邊盡 (십분귀사운변진) 고향 돌아갈 생각 구름 같이 사라지고

萬丈虹光醉裏成 (만장홍광취리성) 높이 뜬 무지개 취한 김에 아른거리네

大野雄風吹海立 (대야웅풍취해립) 너른 벌판에 부는 바람은 바다로 불고

千重巨浪殷雷行 (천중거랑은뢰행) 거센 물결 우뢰 같이 세차게 몰려오네

夜深歌吹喧喧地 (야심가취훤훤지) 깊은 밤 떠들썩 들려오는 노래와 연주

人在瑤臺倚月明 (인재요대의월명) 사람들 달빛에 기대 요대에 앉아 있네

 

東來物色入新年 (동래물색입신년) 동에서 온 물색 새로운 해로 접어드니

鄕思悠悠寄海天 (향사유유기해천) 고향 생각은 유유히 바다 멀리 보내네

兩部笙歌供夜醉 (양부생가공야취) 생황 불고 노래하며 밤 늦도록 취하자

雙淸雪月到梅邊 (쌍청설월도매변) 눈과 달의 밝은 빛이 매화나무 비치네

窓中几席迎紅旭 (창중궤석영홍욱) 창안의 궤석은 아침의 붉은 해를 맞고

樓上簾旌拂紫煙 (누상렴정불자연) 누각의 발과 깃발 안개 속에 나부끼네

物外眞遊如可得 (물외진유여가득) 세상밖에서 참 즐거움 얻을 수 있을까

欲審蓬島覓神仙 (욕심봉도멱신선) 봉래산 찾아가 신선을 찾아 불까 하네

觀察使姜澂(관찰사강징)

제일계정(第一溪亭) 현종(顯宗) 때 삼척부사 허목(許穆)의 글씨라고 한다.

시냇 가의 정자 중에서 제일이라는 뜻이다.

‘제일계정’처럼 행초(行草: 행서와 초서를 섞어 쓴 글씨) 글씨로 남긴 편액은 이것 말고는 찾기 어렵다고 한다.

해선유희지소 : 헌종(憲宗) 3년 (1837) 삼척부사 이규헌(李奎憲)의 글씨라고 한다.

바다의 신선이 놀던 곳이라는 뜻이다.

竹西樓(죽서루) / 松江(송강 鄭澈(정철)

關東仙界陟州樓 (관동선계척주루) 관동에서 경치 좋기로 소문난 척주의 누각

虛檻憑危夏亦秋 (허함빙위하역추) 빈 난간에 위태로이 기대니 여름 또한 가을 같구나

天上玉京隣北左 (천상옥경인북좌) 하늘 위 옥황상제 궁전이 북쪽 왼편에 이웃해 있고

夢中銀潢聽西流 (몽중은황청서류) 꿈속에서 은하수 서쪽으로 흐르는 소리 들리네

疏簾欲捲露華濕 (소렴욕권로화습) 성긴 주렴 걷으려 하니 영롱한 이슬에 젖어있고

一鳥不飛江色愁 (일조불비강색수) 새 한 마리 날지 않으니 강물 빛은 수심에 잠겼네

欄下孤舟將入海 (난하고주장입해) 난간 아래 외로이 떠있는 배 바다로 들려 하는데

釣竿應拂鬱陵鷗 (조간응불울릉구) 낚싯대 던지니 놀란 갈매기 울릉도로 날아가네.

次竹西樓板上韻 .(차죽서루판상운)

關東第一竹西樓 (관동제일죽서루) 대관령 동쪽에서 제일가는 루각은 죽서루이고

樓下溶溶碧玉流 (루하용용벽옥류) 루각의 아래로는 푸른 물이 도도히 흐르는구나

山靜租啼叢桂樹 (산정조제총계수) 고요한 산에 계수나무 숲에서는 새들이 울고요

月明人語木蘭舟 (월명인어목란주) 달은 밝고 거룻배에서는 사람의 말소리가 들려

百年泉石如相待 (백년천석여상대) 백년토록 샘과 바위와 나를 기다린 듯 한데요

千古文章不盡遊 (천고문장불진유) 천고의 문장으로도 다 표현할 수 가 없겠구나

采采瓊華生遠思 (채채경화생원사) 아름다운 꽃들은 옛 추억을 떠 오르게 하는데

白雲歸駕故掩留 (백운귀가고엄류) 흰구름을 보고 돌아가는 수레는 잠시 멈추네

沈英慶(심영경)

죽서루 북쪽 가운데 기둥이다.

별도로 주춧돌이 있는 것이 아니고 자연 암반 위에 기둥을 바로 세웠다.

자연과 조화를 이룬 아름다운 건축의 모습을 보는 것 같다.

만포 최달식의 '경차심후종산판상운' 편액

敬次沈侯鍾山板上韻 (경차심후종산판상운) - 삼가 심후 종산이 쓴 판상시를 차운하다(최달식)

 

有名陟府有名樓( 유명척부유명루) 저 유명한 삼척부에서도 이름 난 죽서루

樓下長川不盡流 (누하장천부진류) 누각 아래 긴 오십천은 끝없이 흘러가네

古渡煙濃迷遠樹 (고도연농미원수)나루터에 안개 끼니 먼 나무들 흐릿하고

虹橋雲斷罷行舟 (홍교운단파행주) 홍교에 조각 구름 걸리자 뱃놀이 멈추네

歌娥舞袖隨時出 (가아무수수시출) 미인 가수 춤추는 소매 때때로 휘날리고

騷客吟唇暇日遊 (소객음순가일유) 시인은 노래하며 한가한 날 즐기고 있네

一目難收千萬景 (일목난수천만경) 한 번에 감상하기 어려운 수많은 절경들

十登無厭久淹留 (십등무염구엄류) 수없이올라도 싫지 않아 오래 머무르네

 

晩圃崔達植謹稿 (만포최달식근고) 만포 최달식 삼가 쓰다

죽서루기 (竹西樓記)

동계(동계)에는 경치가 뛰어난 곳이 많지만 그 중에서 가장 뛰어난 곳이 여덟곳이 있으니

곧 통천의 총석정, 고성의 삼일포와 해산정, 수성의 영랑호, 양양의 낙산사. 명주의 경포대. 척주의 죽서루,

평해의 월송포 등이다.  그런데 이러한 곳을 유람해 본 자들이 단연코 죽서루를 제일이라 하니 무엇때문이가?

대게 바닷가의 주군(州郡)은 관령(關領)을 제외하면 동족으로 큰 바다에 닿아있고. 그 바다 밖은 끝이 없으니

해와 달이 번갈아 뜨고 괴기(怪奇)의 변화가 무상하다.

또한 해안은 모두 모래여서 혹 바다 물이 큰 못같이 선회하기도 하고 혹 기암이 우뚝 솟기도 하고

혹 무성한 소나무가 울창하게 우거져 있기도 하다.

습계(習溪) 북쪽 지역으로부터 기성(箕城) 남쪽 경계지역까지 700리가 대체로 다 그러하지만

유독 죽서루의 아름다운 경치는 바다와 떨어져 있어 높은 산봉우리와 가파른 절벽이 있다.

서쪽에는 두타산과 태백산이 있으니 높고 험준하여 푸른 기운이 짙게 감돌고 바위로 된 골짜기는 그윽하고 어둑하다.

또 큰 하천이 동으로 흐르면서 굽이쳐 50개의 여울을 이루는데 그 사이사이에는 무성한 숲과

마을이 자리 잡고 있으며 죽서루 아래에 이르면 푸른 층암절벽이 매우 높이 솟아 있는데

맑고 깊은 소의 물이 여울을 이루어 그 절벽 아래를 감돌아 흐르니 서쪽으로 지는 햇빛에 푸른 물결이

돌에 부딪혀 반짝반짝 빛난다. 이처럼 암벽으로 된 색다른 이곳의 훌륭한 경치는

큰 바다를 구경하는 것과는 매우 다르다. 유람자들도 역시 이러한 경치를 좋아하여 죽서루가 제일이라고 하였던 것일까?

서호순의 '경차약봉선조판상운' 편액

敬次藥峯先祖板上韻 (경차약봉선조판상운) - 삼가 약봉 선조의 판상시에서 차운하다(서호순)

 

自憐潦到未休官 (자련요도미휴관) 늙어서도 벼슬 그만두지 못한 것 서글펐는데

晩着名區特地閒 (만착명구특지한) 늘그막에 경치 좋은 곳에서 한가롭게 지내네

百尺樓臨湖海上 (백척루임호해상) 까마득한 누각 호수와 바닷가에 다가서 있고

四時人在宕台間 (사시인재탕대간) 사계절 내내 사람들은 오재공의 터에 있나니

川流自位逢層壁 (천류자위봉층벽) 냇물은 저절로 흘러 높다란 절벽에 부딪히고

蜃氣休侵障列巒 (신기유침장열만) 신기루는 늘어선 산들에 막혀 침범하지 않네

先蹟猶傳棠下詠 (선적유전당하영) 선조의 자취 외려 당하제명기 읊음에 전하고

後孫空醉孟陽山 (후손공취맹양산) 후손은 맹양산에서 괜스레 술에 취해 있구나.

 

宦跡圻湖舊俗流 (환적기호구속류) 벼슬살이의 자취는 기호의 옛 풍속에 흐르고

栖遲天餉七分樓 (서지천향칠분루) 편히 쉬라고 하늘이 칠분루 고을에 보내셨네

緬惟吾祖襜帷駐 (면유오조첨유주) 돌아보면 우리 선조의 수레 머물렀던 곳인데

非直當年麗藻留 (비직당년려조류) 그때의 아름다운 글만 남아있는 것이 아닐세

坐對空溕渾是畵 (좌대공몽혼시화) 앉아서 안개 바라보자니 온 천지가 그림같고

俯臨澄碧自疑鷗 (부림징벽자의구) 푸르른 오십천 내려다보니 갈매기라도 된 듯

丹砂未必求句漏 (단사미필구구루) 단사를 꼭 구루산에서만 구할 필요가 있을까

白首眞堪寄此州 (백수진감기차주) 늙었어도 이 고을에서 벼슬살이 할 만하구나

丁未孟冬後孫灝淳 (정미맹동후손호순) 1847년 음력 10월 후손 호순

죽서루 (竹西樓) 숙종(肅宗) 36년 (1710년) 삼척부사 이성조(李聖肇)의 글씨라고 한다.

관동제일루 (關東第一樓) 숙종(肅宗)36년(1710년)삼척부사 이성조(李聖肇)의 글씨라고 한다.

참 글씨도 힘 차게 잘 쓰셨다.

竹西樓重修記(죽서루중수기) - 이학규

陟州之竹西樓 關東名樓也 古今之來游關東者 必先數八景 而此樓居八景之一 非爲結構之壯輪奐之美而然也 盖因其地之勝 西樓之名 亦著也 乖崖金守溫之記曰 北據大嶺 西臨巨川 川雲嶺月之間 其萬千之勝狀 槩可推知也 樓在千仞絶壁之上 俯臨五十川 水滙爲潭 徹底澄淸 游泳之魚 依欄而可數 儘絶景也 樓之刱造年代 文獻無徵 未得其詳 而年深歲久 上雨傍風 遂成摧棟敗椽 過者彷徨 州人咨嗟 李君範綺 熟鍊之才 被銓選之擧 出宰是郡 莅任未幾 百廢俱興 州之人士 告於李君曰 自明府下車之後 治成制定 百度修擧 而惟玆竹西樓依舊壞敗 盍於此時修繕而保存之 李君曰 保存勝蹟 雖知應行之事 而現今民力不敷 遽興土木 非所當爲 況此州之擅名 以江山之勝狀也 江山固自在 則一樓之興廢 何有也 州人事曰 玆樓之於玆州 猶人之有目 假使西施之美 若無盻兮之目 其可謂之佳人乎 玆州而無玆樓 殆同西施之無目 大爲江山之疵累 迨此民安無事之日 重修名樓 不亦可乎 李君 重違民情 乃許之 於是 各鳩略干金 仍舊結構 加以修繕 不日而工告訖 巍然畵閣 臨于川上 江山動色 草木增彩 仍說白日場於斯樓 與多士觴詠而落之 馳走千里 要余爲之記 余惟物之興廢 固有時也 此樓之壞敗 非一朝一夕 而今之州人士 前之宰是州者 非一人 而夫所謂重修者 寥寥無聞矣 今李君與民相孚 能行前人未能爲之事 而民情益呪 此樓之重新 似有待於今日矣 李君莅纔屬耳 能與民孚 非但此樓之重新 得見於今日 此州民風之重新 又當得見于他日也.

[삼척 죽서루는 관동의 이름난 누각이다. 예나 지금이나 관동에 놀러오는 사람들은 반드시 먼저 팔경을 말하는데, 이 누각이 팔경의 하나로 들어간 것은 건물의 구조가 웅장하거나 아름답기 때문이 아니다. 대체로 누각이 위치한 지형의 아름다운 경치 때문에 죽서루의 명성도 또한 널리 알려진 것이다. 괴애 김수온이 쓴 기문에 이르기를 '북쪽으로는 큰 산봉우리에 의지하고 서쪽으로는 큰 시내를 마주 대하고 있다.'고 하였으니, 시내 위에 떠있는 구름과 산봉우리에 걸려 있는 달 사이에 그 수많은 아름다운 경치는 대체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누각이 아주 높은 절벽 위에 있어 오십천을 내려다보면 물이 돌아나가면서 소를 이루는데 물 속까지 보일 정도로 맑고 깨끗하여 헤엄치는 물고기를 난간에 기대서서도 헤아릴 수 있으니 매우 아름다운 경치이다. 누각을 창건한 연대는 찾아볼 문헌이 없어 상세히 알 수 없지만, 세월이 오래되다 보니 지붕은 비를 맞고 벽은 바람을 받아 결국 마룻대가 부러지고 서까래가 썩게 되어 지나가는 나그네들은 방황하고 고을 주민들은 탄식해 왔다. 그런데 이범기가 숙련된 재주로 관리 선발 시험에 합격하고는 삼척군수로 왔는데, 부임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쇠퇴한 것이 모두 다시 흥성해졌다. 이에 고을 인사들이 이군에게 이야기하기를 '군수님이 부임한 후부터 정치가 이루어지고 법도가 바로잡혀 온갖 제도가 나아져 훌륭하게 되었습니다만 오직 이 죽서루만 옛날 모습 그대로 무너져 허물어진 채 있으니 어찌 지금 수리하여 보존하지 않습니까?'라고 하였다. 이에 이군이 말하기를 '훌륭한 고적을 보존하는 것이 비록 당연히 해야 할 일인 것은 알지만 지금 백성들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데 갑자기 토목공사를 일으키는 것은 마땅히 해야 할 일이 아니다. 하물며 이 고을이 크게 이름이 난 것은 강산의 뛰어난 경치 때문이다. 강산이 본래 모습 그대로 있으니 한 누각의 흥망이 무슨 문제가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이에 고을 인사들이 말하기를 '이 고을에 이 누각이 있는 것은 사람에게 눈이 있는 것과 같습니다. 가령 서시(西施)와 같은 미인이라도 만약 흘겨보는 아름다운 눈이 없다면 또한 미인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이 고을에 이 누각이 없다면 서시가 눈이 없는 것과 같아 강산에 크게 흠이 될 것입니다. 이렇게 백성들이 편안하고 아무 일이 없는 날을 틈타서 이 이름난 누각을 중수하는 것이 또한 옳지 않겠습니까?'라고 하였다. 그러자 이군이 거듭 민심과 어긋난다고 하면서도 마침내 허락하였다. 이에 십시일반으로 돈을 모아 옛 모습대로 건물을 짓고 수리까지 하였는데 며칠 안되어 완공하였다. 우뚝 높이 솟은 아름다운 누각이 냇가에 자리잡고 있으니 강산의 경치가 변한 것 같고 초목의 빛깔이 더욱 짙어진 것 같았다. 이에 죽서루에서 백일장을 열어 많은 선비들과 더불어 술을 마시고 시가를 읊으면서 준공식을 거행하였는데, 천리를 달려와 나에게 기문을 써줄 것을 요청하였다. 나는 만물의 흥망성쇠는 진실로 때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 누각이 무너져 허물어진 것은 근래에 있은 것이 아니고 또 지금 고을의 인사와 이전에 이 고을 지방관을 지낸 자가 많은데도 중수 이야기는 조금도 들어보지 못하였다. 지금 이군이 백성들과 더불어 서로 믿고 이전의 사람들이 할 수 없었던 일을 해서 민심이 더욱더 희망적이 되었으니, 이 누각의 중수는 오늘을 기다린 것 같다. 이군의 지위는 겨우 하급 관리일 뿐이다. 그런데도 백성들에게 믿음을 주었으니 단지 이 누각의 중수를 오늘에 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이 고을 백성들의 습속이 거듭 새로워짐을 또한 마땅히 후일에 볼 수 있을 것이다.

歲白鷄陽正之月 上澣 洪陽 李鶴圭記[신유년(1921) 음력 4월 상순 홍양(洪陽) 이학규(李鶴圭) 쓰다.

竹西樓 次韻(죽서루 차운) - 栗谷(율곡) 李珥(이이)

誰將天奧敞華樓 (수장천오창화루) 누가 하늘을 도와 이 아름다운 누각을 세웠는가

石老星移不記秋 (석로성이불기추) 그 지나온 세월이 얼마인지 알 수가 없구나

野外千鬟浮遠岫 (야외천환부원수) 들판 저 멀리 산봉우리에는 감푸른 빛 서려 있고

沙邊一帶湛寒流 (사변일대담한류) 강변 모래 가에는 맑고 찬물이 흐르네

騷人自是多幽恨 (소인자시다유한) 시인과 묵객은 본래 남모를 한이 많다 하지만

淸境何須惹客愁 (청경하수야객수) 깨끗한 이곳에서 어찌 나그네 근심이 일리요

會撥萬緣携籊籊 (회발만연휴적적) 온갖 인연 모두 떨쳐버리고 긴 낚싯대 들고서

碧崖西畔弄眠鷗 (벽애서반롱면구) 푸른 강변 서쪽 물가에서 졸고 있는 갈매기와 놀아보리.

竹西樓重修記(죽서루중수기) - 홍백련

西樓 吾鄕舊物也 樓之刱 不知在何代 而自永樂癸未府使金孝孫修廢墟重起 至今丁亥 爲年凡五百四十五 重修凡十九 而今丁亥之役 沈基達金東錫沈基鴻池禹範朴熙昇李在鏞徐基煥之力最大 樓復翼然自如於千丈層岩蒼壁上 吾鄕愛古之心 不淺也 余嘗愛西樓之高古 月一再登登 輒不忍下 敬誦列聖朝御製及先正詩 令人心感怳然 若超嬴劉而在江沱汝漢之間 嗚呼 自眞珠觀(館之誤字)廢 不復登斯樓也 猶不忍決忘 常往來于中 沈基達李在鏞 叩蓬門曰 子記之 余何忍辭 遂書之爲竹西樓記.

죽서루는 우리 고을의 오래된 건물이다. 누각을 언제 창건했는지는 모르지만, 영락(永樂) 계미(癸未, 1403년)에 부사 김효손이 무너진 옛 터를 정비하여 다시 세운 이후 지금 정해년(丁亥年, 1947)까지 무려 545년이나 되었다. 그 동안의 중수가 총 19번인데, 금년 정해년의 중수는 심기달(沈基達), 김동석(金東錫), 심기홍(沈基鴻), 지우범(池禹範), 박희승(朴熙昇), 이재용(李在鏞), 서기환(徐基煥) 등의 노력이 가장 컸다. 누각이 다시 날아갈 듯 높고 푸른 층암절벽 위에 옛 모습 그대로 솟았으니 우리 고을이 고적을 사랑하는 마음이 얕지 않다. 내가 항상 죽서루의 고상한 옛 풍취를 좋아하여 달마다 한두 번 올랐는데 번번이 차마 내려가지 못하여 역대 임금과 선현(先賢)들이 지은 시를 공경하여 읽으면 마음에 황홀감을 느끼니

마치 시대를 뛰어넘어 장강(長江, 장쑤성), 타강(沱江, 쓰촨성), 여수(汝水, 허난성), 한수(漢水, 산시성) 사이에 있는 것 같았다. 아! 슬프다. 진주관(眞珠館)이 허물어진 뒤로는 다시 이 누각에 오르려 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여전히 차마 잊지 못하여 항상 누각을 오갔는데, 심기달과 이재용이 내 집을 찾아와 '자네가 기문을 쓰게'라고 하니 어찌 차마 거절하겠는가! 이에 마침내 죽서루기를 썼다.

丁亥秋七月旣望 鄕人唐城洪百鍊記[정해년(1947) 가을 7월 기망(旣望, 매월 음력 16일)

삼척 사람 당성(唐城, 남양의 옛 이름) 홍백련(洪百鍊) 쓰다.

한 건물에 두가지 건축 양식을 조화롭게 사용하여 통일성과 변화를 추구했다고 안내해 주신다.

이런 양식을 익공양식이라고 한단다. 황용과 청룡을 조각하여 좌우 대칭을 이루기도하며

한국적인 해학미도 살려 주고 있다.

이란 양식을 주심포 양식이라고 한단다.

가운데 5칸은 모두 주심포 양식으로 되어 있다.

죽서루의 공포는 주심포와 익공의 두가지 양식으로 되어 있다.

원래 5칸은 주심포로 되어있었고, 좌우에 한칸씩 중축된 곳에는 익공을 채택함으로

통일성과 함께 변화도 추구하고 있다고 설명한다.

무더운 여름에 이곳 누각에 올라가보면 문인들은 시 한수와 막걸리(?) 한잔 생각이 안 날 수가 없을 것 같다.

장기나 한판 두고 있으면 신선이 될 것 같은 분위기이다.

죽서루(竹西樓)에서 내려다 본 오십천(五十川)

오십 굽이를 휘몰아쳐 흐른다는 오십천 절벽 위에 장방형으로 자리잡은 죽서루는 관동팔경 중

바다를 끼고 있지 않은 유일한 樓(누) 라한다. 오십천이 삼척의 젖줄이라고 한다.

동해 고속도로와 아파트 단지들이 많이 들어서서 옛날의 정취는 좀 아쉽지만 ......... 

죽서루에서 바라보면 오십천 건너에서 죽서루를 바라볼 수 있는 조그마한 정자가 하나 있다.

오십천 절벽 위에 서 있는 누각을 바라보는 것도 참 좋을 것 같은데 건너가 보지는 않았다.

죽서루에 방문을 했다고 증거를 남기고 싶어서 셀카도 한장 찍어 본다.

북측면은 기둥이 3개여서 2칸인데 반해 남측면은 보는 것과 같이 기둥이 4개이고 3칸으로 되어 있다.

측면의 칸수가 차이가 있는 것은 자연 암반을 적절하고 이용하기 위함이고,

홀수 칸인 남측면을 주 출입구로 삼기 위해서라고 한다.

또 하나 특이한 것은 2층 누각이면 계단이 반듯이 있어야 하는데 이곳 죽서루에는 2층으로 가는 사다리가 없다.

사다리 없이도 2층 누각에 오르는 자연과 조화를 이루어 만들어진 독특한 건축물이다.

용문바위

호국용이 오십천으로 뛰어들 때 죽서루 옆 바위를 뚫고 지나갔는데 그것이 용문바위 라고 합니다.
그후 용문바위는 아름다움과 장수, 다복의 기원처가 되어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용문을 드나들며 소원을 빌고 있다 합니다.

이 용문바위의 용문을 많이 드나들수록 재앙이 가시고 집안에 경사가 찾아든다고 해서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죽서루 용문바위를 찾고 있다.

용문바위를 찾은 부부와 연인들이 허리를 굽히고 용문을 통과하며 집안의 평안을 기원하고 있다.

죽서루 선사 암각화와 용문 바위에 대한 안내판이 너무 구석진 곳에 있었다.

용문 바위의 전설은 삼척지역에는 후진광진 바다에 용머리인 용두(龍頭)가 있고,

죽서루 옆 암벽에는 용이 드나드는 문인 용문(龍門)이 있다.

또 근덕면 용화리에는 용이 몸을 담고 쉴 수 있는 용소(龍沼)가 있다.

삼국통일을 이룬 신라 30대 문무왕이 돌아가신 뒤 호국용이 됐다.

그의 아들인 신문왕은 용이 된 아버지를 위해 감은사를 지었다.

신문왕이 감은사로 갈 때 용이 된 문무왕은 용화리 용소에서 나와 동행 했다.

다시 말해 문무왕의 신용(神龍)이 태어난 곳이 바로 용화리 용소라는 것이다.

그리고 후진의 용두에서 용이 등천해 죽서루 바위를 뜯어 용문을 만들고,

오십천에 뛰어들어 백일동안 유유히 놀며 절벽을 아름답게 만들었다.

용은 백일이라는 기일이 다 지나자 용왕의 부름을 받아 용화리 용소로 돌아가서 용궁으로 들어갔다고 한다.

용문바위에는 성혈(性穴)이 있다. 이 구멍을 여성 생식기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많지 않을 것 같은데....

홈구멍(性穴, cup-mark)은 바위 그림의 한 종류로서 돌의 표면에 파여져 있는 구멍을 말한다.

주로 고인돌(支石墓)의 덮개돌(上石)이나 자연 암반에 새겨진다.

성혈(性穴)은 풍요와 다산을 의미하는 선사시대의 상징물 이지만 조선시대에 와서는 민간신앙으로 정착되어

득남의 기원처로 변모하게 된다. 즉 칠월칠석날 자정에 부녀자들이 성혈터를 찾아가서 일곱 구멍에 좁쌀을 담고

치성을 드린 후 좁쌀을 치마폭에 감추어 가면 아들을 낳는다고 믿는 민간신앙이다.

보물 제213호라는 죽서루 표지석도 아담하게 있었다.

關東八景(관동팔경)이란

간성 淸澗亭(청간정), 강릉 鏡浦臺(경포대), 고성 三日浦(삼일포), 삼척 竹西樓(죽서루),

양양 洛山寺(낙산사), 울진 望洋亭(망양정), 통천 叢石亭(총석정), 평해 越松亭(월송정)

하층보다 상층에 기둥이 더 많이 있고, 기둥의 높이도 다 다르고, 한 건물에 두가지 건축양식을 사용하고

사다리 없이도 2층 누각에 오를 수 있는 독특한 구조를 가진 관동팔경의 제일 삼척 죽서루 잘 보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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