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사진

정동 선교 역사 여행 (2019.11.2)

다이나마이트2 2019. 12. 30. 23:44

2019년 11월 2일 토요일 오후 양재 이천선교리더십들이 정동 선교 역사 여행에 함께 했다.

2015년 광주 전남 호남선교 역사 여행(광주, 순천, 여수), 2016년 호남선교 역사여행(전주, 금산, 군산),

2017년 강화도 선교역사 여행, 2018년 끝나지 않은 소풍 부산 여행에, 2019년 대구 역사 여행에 이어서

이어서5번째 정동 선교 역사 탐방을 나섰다.

정동제일교회(1885) 아펜젤러가 세운 최초의 서양식 개신교 교회.

1887년 10월 9일 미국의 북 감리회 소속인 Henry Gerhart Appenzeller(1858~1902) 지금의 자리에 설립했다.

예배만 드릴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최초에는 한옥집을 개조하여'벧엘 예배당'으로 불렀다.

교회 근처에는 배재학당 및 이화학당과 함께 개화 운동의 중심지 역할을 하였다.

교회와 접해 있던 배재학당과 이화학당의 학생들이 출석하면서 1894년에는 200여 명으로 신자가 불어났다.

그래서 1895년 9월 9일에 신축 예배당을 착공하여 1897년 12월 26일에 예배당 봉헌식을 가졌는데

최초의 서양의 고딕 양식의 붉은 벽돌 예배당을 완공했다.

유관순이 이 교회 신자였으며, 개화운동을 주도한 윤치호는 이 교회의 장로였다.

아펜젤러는 언더우드와 함께 성경을 한국어로 번역하는 일에 힘썼다.

한자 대신 한글을 대중화 시키는데 기여를 하였으나 1902년 목포에서 열리던 성경번역자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배를 타고 가다가 좌초되어 영면 양화진 외국인 묘지에 잠들어 있다.

아펜젤러 기념 박물관 내부에 있는 정동교회 전체 모형도이다

가장 가까이 보이는 오른쪽 붉은 벽돌 건물이 역사가 있는 벧엘 예배당이다.

1976년 문화공보부는 19세기 건축물인 붉은 벽돌 예배당을 사적 제256호로 지정됐다고 합니다.

4각 기둥이 종탑이다. 생각 보다 아펜 젤러의 유물은 많이 남아 있지 않고

가지고 나니며 성찬을 할 수 있는 작은 성찬기가 유물로 남아 있었습니다.

3.1운동 때는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당시 6대 담당목사였던 이필주 목사와 박동완 장로가 참여했으며,

3.1운동 이후부터는 야간학교를 설치하는 등 선교 사업에 중점을 두었습니다.

1922년에는 최초로 여름 성경학교를 개설하기도 했고,

1930년에는 남북 감리교회를 하나로 통합한 조선감리교회를 설립하는데 큰 역활을 담당했습니다.

8.15 해방 이후에는 한 때 분열의 위기도 맞기도 했으나,

1948년 재건파와 부흥파의 합동 총회를 개최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해 교단 통합을 신속히 이루었다.

6.25 전쟁 당시에는 예배당 일부와 파이프 오르간이 파괴되는 시련을 겪기도 했습니다.

1976년 문화공보부는 19세기 건축물인 붉은 벽돌 예배당을 사적 제256호로 지정됐습니다.

1979년 4월 14일 새로 완공된 한국선교 100주년 기념예배당은 한국 건축가 협회로부터 최우수상을 받았다.

2007년 제 20대 담임목사로 송기성 목사가 부임해서 지금에 이르고 있습니다.

자세하게 설명해 주신 정동교회 장로님 감사합니다.

교회의 장로가 되시면 이 정도 교회의 역사에 대해서는 꾀뚫고 계셔야 하는가 봅니다.

정동제일교회 벧엘예배당에서 정동교회에 대한 안내를 듣고 있다.

정동교회 어느 장로님께서 정동교회 130년사를 자세하게 잘 설명해 주신다.

토요일 오후라 장로님도 쉬시고 싶으실 텐데 온누리교회 선교 담당 부서에서 탐방을 왔다고 하니

더 열정적으로 너무나 열심히 설명해 주신다. 머리숙여 마음으로부터 감사드립니다.

정동제일교회 벧엘 예배당 내부, 정면에 파이프 오르간이 예쁘게 보인다.

한 동안 사적으로 지정 된 이후에 사용을 하지 않다가 사용을 하는 것이 건물의 보존 등 여러가지로

좋겠다고 판단하셔서 현재도 이 곳에서 일부 예배가 진행이 된다고 하신다.

강대상에 믿음, 소망, 사랑 (信, 望, 愛) 이렇게 3자가 한자로 적혀 있다.

무심코 보았을 때에는 안 보이던 글자 였는데 장로님의 설명을 듣고 보니 보인다.

사진에서는 숨은 그림 찾기 수순으로 보아야 보이는 글자이다.

아펜젤러 선교사님의 업적을 적어 놓으신 것 같다.

한문으로 적혀 있어서 정확하게는 무슨 뜻인지 잘 모르겠지만 내가 이해하는 대충의 내용은

조선에 선교사로 오셔서 배재학당을 건축하시고 인재를 양성 하셨으며

여성을 중시하여 이화학교를 처음으로 개교하셨고 성금을 모아 회당을 신축하셨으며

인쇄로 책을 찍어 세상에 펴내시고 새 문화 풍속 복음을 전하시다가 순교를 하셨으며

아들 딸을 잘 두시어 그 가문의 명성을 이어가신다는 내용인것 같다.

밑에 영문으로 작혀 있는 부분은 정동 제일교회 50주년 기념일이 만들었다는 내용으로 보인다.

정동 제일교회 역사에 대해서 잘 설명해 주신 장로님과 단체 사진을 한장 찍었다.

이 종탑의 문으로는 차음으로 출입을 해 보았다. 평소에 안 열어 주시는 곳이였는데....장로님 감사합니다.

장로님이 사진도 한장 찍어 주신다. 그래서 나도 유일하게 사진이 한장 찍혔다. 감사하다.

1979년 4월 15일 봉헌한 머릿돌이 있고, 2018년 7월 29일 성전을 보수하여 입당한 머릿돌이 있다.

"이 성전의 나중 영광이 이전 영광보다 크리라" 학개 2장 9절 말씀이 머릿돌이다.

온누리교회의 머릿돌에는 마태복음 28장 말씀이 적혀 있는데....

배재학당 역사 박물관

배재학당은 1885년 미국 북 감리교 아펜젤러가 설립한 최초의 서양식 근대교육기관이다.

1886년 고종(高宗)황제(1852~1902)께서 "유용한 인재를 기르고 배우는 집"이라는 뜻으로

"배재학당(培材學堂)"이라는 이름을 하사하셨다고 한다.

2008년 7월 120여년의 역사를 가진 유서깊은 배재학당 동관 건물이 다양한 근대 유물둘과 함께

배재학당 역사박물관으로 새롭게 문을 열었다고 한다.

정동제일교회에서 걸어서 올 수 있는 정도의 거리에 배재학당 역사 박물관이 있다.

아름다운 건물과 아름다운 사람들이 함께 보여서 너무 조~~오  타.

배재학당은 1885년 감리교 선교사 아펜젤러가 교육선교를 위해 세운 최초의 근대식 학교로,

최초의 2명의 학생에게 영어와 성경을 가르치는 학교로 시작한 이후에

고종으로부터 배재학당(培材學堂)이라는 이름을 하사 받았다.

처음부터 학생들에게 복음을 의무적으로 강요하지 않았지만

가르치는 모든 학과에서 자연스럽게 복음을 전하는데 노력했다.

구한말에는 교육구국운동의 선구적 역할을 다하였고,

일제 강점기 36년 동안에는 민족의식과 정의감을 굽히지 않았다.

1층에는 1930년대 배재학당 교실을 재현한 공간이 있어 그 당시 교실 분위기를 체험할 수 있고,

상설 전시장에는 기독교 정신을 바탕으로 인재를 길러냈 던 배재학당의 교육이념과

고종이 하사한 배재학당의 현판, 유길준의 서유견문 등 배재학당의 역사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다.

2층에는 초기 선교사들의 다양한 활동과 아펜젤러 선교사의 일대기가 전시되어 있다.

아펜젤러 선교사의 친필 일기를 비롯, 당시 사용하던 성경, 타자기, 피아노 등의 유물을 확인할 수 있다.

배재학당 교실 체험 공간. 모두가 다 우등생일 것 같습니다. 하하하하하

1930년대의 교실 모습, 의자에 앉아 칠판에 보이는 아펜젤러의 교육 철학이 담긴 영상물을 감상하며

배재학당의 학생들이 되어 봅니다.

배재학당의 태동과 배재의 정신이 이곳에서 교육되고 항일운동 독립운으로 이어진 것이

지금의 자유 대한민국을 있게한 밑 걸음인 것 같다는 의미를 마음에 새겨 봅니다.

배재학당에서 배운 것

1. 하인을 안데리고 다니는 것이 공부의 시작입니다.

하인을 안 데리고 다니는 것 부터 공부하십시오.

신분과 연령을 초월한 한국 최초의 전인교육이 이루어진 장소가 이곳인 것 같다.

2. 실용 기술을 바탕으로한 자립교육

학자금이 없는 자는 일 자리를 주어서 자립으로 벌어서 쓰게 한다.

가난한 학생들에게 붓과 구두를 만들게하여 돈을 벌 수 있게 해 주었다.

1896년 인쇄부와 제본소를 설치하여 자립교육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3. 민주 시민을 키우는 자유교육

평등교육, 전인교육, 자립 교육을 실시하였다.

근대 문명의 지식과 기독교의 진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을 바탕으로 가르쳐

학교와 국가에 봉사하며 큰 인재 섬기는 인재로 육성하는 것에 목표를 두었다.

배재학당 같은 학교가 지금 2020년에도 꼭 필요할 것 같다.

배재학당 명예의 전당,

배재학당(培材學堂) 이라는 현판 자체를 고종 황제가 하사한 것이라는 자부심도 있게지만

배재학당의 태동과 배재의 정신에는 지금 이 시간에 대한민국이 배워야 할 시대 정신도 많은 것 같다.

이승만, 주시경, 김소월등 수 많은 인재들이 이곳 배재를 통하여 배출이 되었다.

아펜젤러는 자유, 민주, 민족주의의 교육정신에 바탕을 두고 독립운동을 통해

개혁적인 사상의 교육의 영향으로 배재학당의 학생들이 항일운동에 앞장 서서

서재필, 이승만, 윤치호등 배재학당 교수들의 영향도 매우 컷으리라 미루어 짐작이 된다.

요즘 21C에는 상상하기 어려운 급훈 인 것 같다.

조금 전에 본 배재학당의 교훈은  ‘욕위대자 당위인역(欲爲大者 當爲人役), 라고 한다.

즉 "크게 되려는 사람은 마땅히 남에게 봉사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이다.

이런 가치는 22C가 되더라도 변하지 않고 지켰으면 하는 가치인데....세상이 빠르게 변화하다 보니

정말 소중한 가치들을 놓치고 지나는 것이 아닌가하여 안타깝다.

이화학당(박물관) 예정에 없던 곳인 것 같은데 감사하게도 오픈해 주신다.
이화학당(梨花學堂)은 1886년에 서울에 설립된 근대 교육기관이다.

서울 중구 정동에 미국 출신의 감리교 선교사 메리 스크랜튼이 설립했다.

이화학당 설립자인 스크랜튼은 윌리엄 스크랜튼의 어머니이다.

학교의 이름은 명성황후로부터 받은 것이며, 한국 최초의 사립 여성 교육기관 이었다.

1904년 중등과가 설립되고, 1908년에 보통과와 고등과가, 1910년에는 대학과가 차례로 추가 되었다.

중등과 제1회 졸업생은 1908년에 배출 되었고, 대학과 제1회 졸업생은 1914년에 배출되었다.

1918년에 보통과가 이화보통학교로, 고등과는 이화여자고등보통학교로 분립되었다.

대학과는 중등과가 이름을 버꾼 대학예과와 1925년에 병합하여 이화여자전문학교로 개교했다.

1928년 에 마지막 남은 유치원 사범과가 이화보육학교로 독립하여 각급 학교가 독립적인 학제로 운영되면서 이화학당이라는 이름은 사라졌다.

"만약 여성이 남성과 같은 일을 하기를 바란다면 남녀에게 똑 같은 것을 가르쳐야만 한다." 플라톤의 국가론

"If women are expected to do the same work as man, We must teach that the same thing" platon

남녀칠세 부동석이라고 하던 시대에 가히 혁명적인 생각이지 않았을까?

이런 혁명적인 생각이 세상을 바꾸어 간다.

 

여성 교육이 기독교가 이 땅에 들어 옴으로 본격적으로 시작이 되었고

남녀평등 교육이 일재치하의 독립운동에도, 6.25 전쟁의 잿 더미가운데서도

나라를 일으킨 밑 걸음이 되지 않아나 생각해 본다.

"나라위해 내 놓을 목숨이 하나 밖에 없다는 것이 유일한 슬픔이다"

특히 일제강점기 시절 독립운동에 앞장 선 여성 독립운동가들의 이야기를 전시로 확인해볼 수 있는데요.

대한민국 애국부인회와 김마리아, 송죽회와 황애덕, 조선여자교육회와 차미리사, 농촌계몽운동과 최용신 등

이화학당 출신의 여성 독립운동가와 선각자들이 활약했던 역사적 이야기를 접할 수 있습니다.

이화박물관에 유관순 열사의 얼굴은 우리가 많이 보던 퉁퉁한 얼굴이 아니다.

일본의 고문으로 얼굴이 부어서 퉁퉁한 사진이 우리에게 많이 보여지고 익숙했던 것 같다.

문화 해설사님의 설명으로는 이 사진이 실제 얼굴에 근접한 사진이라고 하신다.

제1호, 명예졸업장 성명 : 류관순, 입학년도 : 1916년

류관순 열사는 이화학당 고등과 재학중 서울에서 3.1독립만세 시위에 참여하고 휴교령으로 학교가 휴교하자

고향인 천안군 병천면 용두리로 내려가 4월 1일 시위 운동을 주도하다가 체포되어

서대문 형무소에 복역중 모진 고문에도 굴하지 않고 투쟁하다 옥사하였다.

정부는 1962년 대한민국 건국공로 훈장을 그에게 추서하였다. 

이에 이화여고는 창립 110주년을 맞아 그의 애국 정신을 다시 기리면서 명예졸업자격 심의를 거쳐

이 졸업장을 드린다. 1996년 5월 30일 이화여자고등학교장 최종옥

소녀 유관순의 기원

"오오 하나님이시어

이제 시간이 임박하였습니다.

원수 왜를 물리쳐 주시고 이 땅에 자유와 독립을 주서서.

내일 거사할 각 대표들에게 더욱 용기와 힘을 주소서.

이로 말미암아 이 민족이 행복한 땅이 되게 하소서.

주여 같이하시고 이 소녀에게도 힘을 주옵소서."

1919년 3월 31일 (음력 2월그믐) 매봉에서 기도하며

남녀7세부동석이라고 하던 시절의 조선 시대에 특히 이 이화학당에는 기혼자는 입학을 할 수 없는 시절에

김란사는 정부 관리인 하상기님과 이미 결혼을 한 상태였지만 이화학당 소식을 듣고 가슴에

뜨거운 불씨가 생겼다고 한다.

 

"나의 인생은 이렇게 한 밤중 처럼 캄캄합니다"

어는 늦은 밤 김란사는 등불을 든 하인을 앞세우고 이화학당의 문을 두드렸습니다.

기혼 여성이라는 이유로 이미 몇 차례 입학을 거절 당한 터에 이번에도 프라이 선생(학당장)이

이번에도 거절을 하자 김란사는 등불을 훅 끄더니

"우리나라는 저 꺼진 등불과 같이 매우 어둡습니다"라며 간곡히 입학을 요청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이화는 김란사의 등불이 되었다고 한다.

 

이후에 1895년에 일본 게이오 기주쿠대학에서 유학을 하고, 1900년 미국 오하이오 웨슬리안대학에서

7년간 공부하여 한국여성 최초로 학사학위를 받았다.

 

영어와 서양의 사고 방식을 배우며 신 여성이 된 김란사는 이화학당으로 돌아와

사감으로서 조선의 여성교육에 앞장서 꿈을 주고 도전할 수 있는 길들을 열어 주었다.

새로운 시대를 열어간 교육자 김란사는 학생들에게 늘 "꺼진 등에 불을 켜라"라고 말하며

시대적 사명을 강조했다.

무너져 가는 약소국가의 여성으로 한치 앞도 내다 볼 수 없는 암울한 시대에 맨몸으로 많은 여성들에게

도전과 희망을 주었던 김란사. 그 분이 꿈꾸었던 희망을 공감하고 꺼진 등에 다시 불을 켜는 시간이 된다.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다 내려놓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놓아 둔다.

그래야 등불이 집 안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환희 비친다" 아멘.

김란사 그녀는 죽었다. 그러나 그녀를 기억하는 자들이 있다. 그녀의 뜻을 이어가는 자들이 있다.

그리고 이들이 다시 켜는 등불이 곳곳을 환히 비친다. 무리는 모두 그녀의 빚진 자들이다"

정말 그렇다 우리는 모두 복음에 빚진자들이다. 산 위에 올라가서 널이 전해야 할 복음의 빚이 있다.

등불을 켜서 사람들에게 비취게해야 할 사명이 나에게도 있다.

책상 가운데 금을 긋고 못 넘어오게 싸우던 어린 시절이 생각나는 교실의 모습니다.

난로 가운데 밴또라고 부르던 양은 도시락 덮혀 먹던 시간들도 기억이 나고

칠판에 사인 코사인 함수들은 전혀 기억이 안난다. ㅋㅋㅋ

옛날에 보던 포스타들도 박물관에 있으니 유심히 보게 된다.

"5월 15일 오후8시 쥐약을 놓아 남은 쥐를 모두 잡자"라고 된 포스타도 있다. 아직도 쥐를 다 못 잡았구나. ㅋㅋ

그때도 없애던 모기인데 아직도 안 없어지고 있다. "모기를 없애라".

"낯선사람 신고하고 수상하면 살펴보자" 이런 표어도 있다.

"간첩을 신고하면 상금 100만원을 줍니다. 이런 포드타도 있다.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호텔. 손탁빈관(Sontag賓館)이라고도 한다.

손탁(Sontag,A. 孫澤, 1854~ 1925)은 1885년 10월 초대 주한 러시아공사 웨베르(Waeber,K. 韋貝)를 따라

내한하여 25년간(1885~1909) 한국에서 생활하였다.

손탁은 웨베르 공사의 추천으로 궁내부(宮內府)에서 외국인 접대업무를 담당하면서

고종과 민비와 친밀하게 되었다.
손탁은 궁내부와 러시아 공사관의 연결책을 담당, 한러 밀약을 추진하는 등

친러거청(親露拒淸) 정책을 수립, 반청(反淸)운동을 통해 조선독립운동을 전개했다.

그녀의 독립운동 공로가 인정되어 조선정부는 1895년 서울 정동 29번지 소재 1,184평 대지의

한옥 한 채(현 이화여자고등학교)를 하사하였다.

손탁의 배일운동이 성공하여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할 수 있게 되었고,

이에 대한 감사의 뜻으로 고종은 손탁의 사저에 서양식 벽돌 건물을 지어주었다.

1898년 3월 16일자로 된 「양관하사증서」에서 고종은 노고에 보답하는 뜻 (以表其勞事)을

각별히 표시한다. 손탁은 이를 호텔식으로 개조했다. 따라서 본격적인 호텔 업무는 이때부터 시작된다.

손탁 호텔에는 주로 서울에 오는 국빈들이 머물렀다.

그러나 외국인들의 서울 방문이 빈번해지자 방 5개로는 협소하게 되었고

이에 고종은 왕실재정으로 이를 확장해 주었다. 1902년 10월에 2층으로 된 서양식 벽돌건물이 준공되었다.

이 시기 손탁 호텔의 모습은 현재까지 남아 있는 사진들을 통해 알 수 있다.

러시아 건축기사 사바틴이 설계한 증축된 손탁 호텔은 벽면 전체를 아케이드 처리한

전형적인 러시아풍의 아름다운 근대 건축물이다.
손탁 호텔에는 영국수상 처칠도 묶었고 미국 시오도어 루즈벨트 대통령의 딸 앨리스도 이용했다.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도 이 호텔에 투숙하여 조선의 대신들을 초청하여 회유하고 협박했다.

배일운동의 중심지가 을사늑약을 체결토록 하는 일제강점의 현장이 되고 말았다.

손탁은 한일합방 이전인 1909년 보에르에게 이 호텔을 매각했고,

보에르는 1917년에 이를 다시 이화학당에 매각했고, 이화학당은 이를 기숙사로 사용하 다가 철거한 후

1923년에 이 자리에 프라이 홀(Frey Hall)을 신축했다.

11월 토요일 오후 정동의 가로수길이 참 한가롭게 보인다.

카페에서 차도 한잔 마시고......

정동교회로 돌아와서 이천 선교에 대해서 못다한 이야기도 함께 나누고......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는지 기억에 하나도 없다. (내가 외 이렇까?)

2달 전인가 이곳에 와서 추어탕을 먹어 보고 싶다고 생각만 하고 지났던 집이다.

전화 번호도 없고 사전 에약도 안 받는다 오시는 순서대로 줄 서서 먹는 집이다.

추어탕이 참 맛있엇습니다. 잘 먹었습니다. 토요일 오후 역사 공부 열심히 하고 돌아 갑니다.

2020년에는 선교 역사 어디로 가게 될지 참 기대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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