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 말씀

탈육신 시대의 성육신적 교회 (눅5:33~39) 2020.05.16

다이나마이트2 2020. 5. 16. 20:09

탈육신 시대의 성육신적 교회 (눅5:33~39)            말씀: 이재훈 목사님

 

지금 우리들은 코로나 전염병으로 인하여, 급변하는 사회에 살고 있습니다.

지금은 신체접촉이 불법인 것 같지만, 앞으로는 이런 [비대면]이 건강한 사람들에게는

인격적인 장애처럼 느껴질 것입니다.

 

그렇다면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 우리들은 어떻게 변해야 합니까?

우리들의 안전을 위해서, 서로 대면하지 않는 [비대면]을 해야 하고, 사회적인 거리두기를 계속해야 하지만,

그러나 교회는 언제나 서로 [대면]해야 하고, 서로 모이고, 함께 만나야 합니다.

 

사회의 중심이 이렇게 변한 것을 [짐 캐리]라는 사람은

가까운 미래에 우리는 기계를 사용해서만 의사소통을 할 것이다.”라고 말했듯이,

지금 우리들은 기계(=핸드폰)를 통해서, 의사소통을 하고 있습니다.

 

최근에 우리나라에서도 성 착취 동영상을 만들어, 사회적인 물의를 일으켰다는 뉴스가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성을 망각한 행동이고, 끔찍한 죄악을 저지르는 일입니다.

 

이런 것들은 [성육신]의 반대되는 개념으로, [탈육신의 시대]라고 말합니다.

 

호주의 [마이클 프로스트]라는 학자는

교회 안에 만연한 종교적 습관과 사역의 모습들을 보면서, 마치 암세포를 찾아 제거해 나가는 의사처럼,

하나하나씩 찾아내어 진단해서, 그가 내리는 처방은 예수님이 보여주신 [성육신적 삶]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를 따르는 것은 단지 그분의 가르침을 동의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사는 온 세상이 그분의 통치 아래 들어가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이 소위 종교적 영역에서만 전문가들이 되는 것이 아니라,

연약한 몸을 갖고서 혹독한 현실의 문제에 천착하고 고민과 갈등의 현장을 지키는 것이야말로

[성육신의 삶]을 실제로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저자는 [해체][탈육신]의 시대에, 그리스도의 몸이 더 완전하게 구현된 신앙,

즉 예수가 몸소 보여주었던 [성육신적] 생활방식을 반영하는 삶을 독자들에게 제시합니다.

 

[탈육신]은 무슨 말입니까?

[탈육신][성육신]의 반대 개념입니다.

[탈육신]은 고대의 풍습으로, 죽은 사람의 몸에서 뼈만 남기고, ”모든 육신을 제거한다.”는 의미이니까,

인간의 몸을 해체시키는 타락한 문화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정신 분열의 모습을 탈육신 시대의 현상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와이 원주민들은 지위가 높은 분을 숭배하기 위해서, ”뼈만 남기고, 육신을 해체하였다는 풍습이 있었다고 합니다.

 

만약에 [탈육신]의 문화가 교회 안에 들어왔을 때, 어떤 현상이 나타날까요?

교회에 분리주의적인 모습이 나타날 것입니다.

사회에서 사는 모습과 교회에서 사는 모습이 다르게 나타날 것입니다.

 

교회는 [거룩함]으로 구별되어야 하는데, 어떤 의식으로든지 교회가 분리되어,

우리들 자신만의 공동체가 되면, 안됩니다.

 

예수님 당시에, 바리새인들은 다른 사람들과 구별되어, 인정받기를 원했고,

거기에 반대되는 사람들은 모두 죄인으로 구별했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누가복음 531-32절 말씀을 함께 읽으십시오.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습니다. 건강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 없고, 병든 사람에게만 의사가 필요하다.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5:31~32)

 

예수님 당시에도하나님을 더 많이 알고 있다는 바리새인들도, [차별의식]을 갖고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자신은 구원받은 자라는 [선민의식]을 갖고 있었고,

다른 사람들을 차별함으로써, 자신을 [구별된 사람]으로 인정받기를 원했습니다.

 

그런 가운데, 예수님은 그것을 깨뜨리려고 노력을 다하셨습니다.

 

오늘의 본문의 앞 절에 나오는 34-35절 말씀을 함께 읽으십시오.

예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너희 같으면, 신랑이 함께 있는 동안에 초대받은 사람들을 금식하도록 하겠는가?”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 때가 되면, 거들고 금식할 것이다“(5:34~35)

 

[금식]은 유대인에게 아주 중요한 영성훈련이자, 신앙의 덕목입니다.

바리새인들은 금식을 [제도화] 하거나, [형식화] 해서, ”보여주기식으로 금식을 했어요.

 

예수님은 그런 모습을 보고,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은밀히 금식하라고 가르치십니다.

[금식]은 마음을 다하고, 겸손히 나가야 하고, 은밀히 행해야 하는데,

바리새인들은 금식을 행하면서 더 교만해 지고, 다른 사람들을 정죄하고 있습니다.

 

[금식]은 하나님 앞에 더 가까이 가려는 것인데, [금식]을 이용하여 위선을 보이고,

자신을 나타내는 자랑을 하고, “종교적 울타리로 사용했다는 것입니다.

 

[금식]은 영혼을 위하여 만든 제도인데, 육체를 자랑하는 제도가 된 것입니다.

이것은 [탈 육신화 현상]이라고 합니다.

 

코로나 재난이 우리에게 큰 고통을 안겨 주었지만, 이번 기회에 [교회의 본질]에 대하여 생각하게 하고,

회복하게 만들어 주는 효과도 있었습니다.

 

우리의 영혼을 위해 만들어진 교회가 육신을 위한 것이라면, [탈 육신적인 제도]가 됩니다.

그러므로 [참된 교회]가 되려면, [교회의 본질]을 회복해야 합니다.

 

우리는 교회에 다니던 신앙에서, 내가 교회로 존재하는 신앙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그러니까 내가 [교회 자체]“이므로, ”내가 교회로 존재하는 사람인가?”를 깨달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오늘의 말씀에서 3가지 [비유], 육신적인 교회가 되지 않게 교훈을 주십니다.

(1)첫 번째 비유로, 예수님이 신랑으로, [성육신]하는 그리스도의 임재를 느껴야 합니다.

 

, 다시 말해, “결혼의 비유입니다.

 

예수님이 이 [비유]를 통해서,“새로운 시대가 왔다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예수님이 오신 것은 신랑을 기다리는 신부의 기쁨과 같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신앙의 본질]은 무엇입니까?

신랑 되는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는 것이지, 바리새인과 같이 종교적 규칙을 통해서, 만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신앙의 중심에 그런 기쁨이 있습니까?

그런 기쁨이 우리가운데 살아 있어야 합니다.

 

바리새인들은 그런 기쁨이 없었습니다.

유대인들은 규율에 들어오지 않으면, 버려진 사람으로 취급을 했으니까요.

 

[교회]는 그런 [기쁨]이 있어야 해요.

[예배]는 신랑 되는 예수님을 만나는 [신부의 기쁨], 우리가운데 나타나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창조하시고, 우리를 이끌어 주는 목자이니까,

우리와 연합하기 위해서 예수님은 신랑 되신 분으로 오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결혼식에서 신랑과 신부의 만남은 [교회의 본질]과 같습니다.

대부분 신랑이 신부를 기다리지만, 유대인들의 결혼식에서는 신부가 신랑을 기다립니다.

 

그런데 언제 올지 모릅니다. 기다리는 동안 기쁨으로 예배하고, 나타났을 때는 더욱 기쁘게 맞이하는 것입니다.

이런 [기쁨]을 알았기 때문에, [예배]가 더욱 즐거운 거예요.

 

(2)두 번째 [비유]는 세상 속으로 [성육신] 하는 그리스도의 모습이어야 합니다.

, “새 옷을 입는 비유입니다.

 

36절 말씀을 읽으십시오.

낡은 옷을 기우려고, 새 옷을 자르는 사람은 없다. 그렇게 하면 새 옷이 찢어져 못쓰게 되고,

새 옷의 조각도 낡은 옷에 어울리지 않는다.”(5:36)

 

[]이란 자신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문화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의 전통은 세상과 분리하여 자신은 의롭다고 하고,

다른 사람들은 정죄하였는데, 그것을 여기서 [헌옷]이라고 비유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복음][새 옷]으로 비유합니다.

[복음]은 바리새인들이 만들어 놓은 율법적이고, 전통적인 분리주의입니다.

 

[헌옷]을 고치기 위해, [새 옷]을 찢어 붙이는 사람은 없습니다.

여기서 [헌옷]은 바리새인들이 만들어 놓은 종교적 울타리입니다.

 

[율법]을 지키기 위해 만들어놓은 [문화]들이 있는데, 그런 것을 지키면 하나님이 사랑을 받고,

그것을 지키지 않으면, “죄를 짓는 일이라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은 그런 [헌옷]은 벗고, “[새 옷]은 입으라는 말씀입니다.

 

신약에 나타난 [정신]은 무엇입니까?

율법을 통한 [헌옷]을 벗고, “그리스도 안에서 [새 옷]을 입으라는 말씀입니다.

 

[율법]을 통해 주신 낡은 []을 벗고,

그리스도 안에서 [구약]에 메이지 말고, [새 옷]을 입어야 합니다.

 

우리들도 오랫동안 익숙한 [문화]에서 벗어야 합니다.

유대인들이 그랬고, [율법] 속에서 [이방인]들에게 강요했어요.

 

(3) 세 번째 비유는 성령의 교통하심으로, [성육신]하신 그리스도의 임재입니다.

, “새 포도주와 새 부대의 비유입니다.

 

37-38절의 말씀을 읽으십시오.

또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부대에 넣는 사람도 없다.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그 부대를 터뜨려서 포도주는 쏟아지고, 부대도 못쓰게 될 것이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5:37~38)

 

[복음]새 포도주와 같습니다.

여기서 새 포도주는 예수님을 중심으로 확장되는 <하나님 나라>의 역동성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말입니다.

 

[새 포도주]의 반대 개념으로, [묵은 포도주]는 구원이 멀어진 구약종교의 지도자들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말입니다.

 

여기서 새 포도주는 [포도즙]입니다. 우리나라가 김치를 담그듯이, 포도의 열매를 따서,

기계의 틀에 넣고 발로 밟으면 즙이 나오는데, 그 마지막 끝에 [가죽 부대]를 달아놓으니까,

그 속에 그 [포도즙]이 들어가게 됩니다.

 

그러면 그 속에서 [발효작용]이 일어나고, 가스가 나오니까, 팽창하게 됩니다.

그럴 때에 [가죽 부대]는 늘어나기도 하고, 줄어들기도 합니다,

[] 가죽부대는 가스가 많이 차면 팽창하여 폭발합니다,

여러 번 사용하면 터지게 되므로, [] 부대를 사용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그걸 비유하여, 생명이 없는 종교적 체계는 [헌 부대]이니까,

[헌 부대]에는 예수그리스도의 생명을 가두어 둘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니까새 부대를 사용하라는 말씀입니다.

 

[헌 가죽부대]는 생명력이 있는 것을 가두어 둘 수 없으니까, [새 부대]를 준비하라는 것입니다.

종교적 울타리가 예수님의 생명을 가두어 둘 수 없으니까, [헌옷]을 벗고 [새 옷]을 입듯이,

새 가죽 부대로 바꾸라는 말씀입니다.

 

한 마디로, [옛 것]은 버려야 하고, [새 문화]를 받아드려야 합니다.

바리새인들의 가죽부대는 터질 수 밖에 없는 낡은 옛 가죽 부대이지만,

바리새인들의 가죽부대는 전통적인 [분리주의] 이기에, 감당할 수 없습니다.

 

[복음][가죽부대]는 새 부대이니까,

또한 새 부대의 운동력은 엄청 크기 때문에, 찢어지지 않습니다.

 

그것이 [성령의 능력]입니다.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 없는 [성령의 팽창력]을 느껴야 합니다.

 

왜냐하면? 성령이 임하면, 팽창력이 발생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성령의 교통하심을 우리 안에 나타나야 합니다.

[주기도문]에 나오는 성령의 교통하심이 우리 안에 나타나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모여서 함께 예배를 드리게 됩니다.

 

, 우리는 모여서 예배를 드립니까?

성령의 교통하심이 있기에, 함께 모여 있을 때, [능력]이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혼자] 할 수 없는 때는 언제입니까?

결혼하는 일과 신앙생활하며 예배드릴 때입니다.

 

성령이 함께 하면, 성령이 교통함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함께 모여 예배를 드립니다.

[주의 영]이 함께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기 때문에, 함께 해야 합니다.

 

[교회의 능력]은 어떤 것입니까?

[교회의 능력]은 성육신하신 교회의 모습으로 존재할 때, 나타납니다.

이 세상은 점점 더 [탈육신화] 되어, 육체와 영혼을 분리시킬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복음]의 옷을 입고, 세상 속에서 승리하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