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육신 시대의 성육신적 교회 (눅5:33~39) 말씀: 이재훈 목사님
지금 우리들은 코로나 전염병으로 인하여, 급변하는 사회에 살고 있습니다.
지금은 신체접촉이 불법인 것 같지만, 앞으로는 이런 [비대면]이 건강한 사람들에게는
인격적인 장애처럼 느껴질 것입니다.
▶그렇다면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 우리들은 어떻게 변해야 합니까?
우리들의 안전을 위해서, 서로 대면하지 않는 [비대면]을 해야 하고, 사회적인 거리두기를 계속해야 하지만,
그러나 교회는 언제나 서로 [대면]해야 하고, 서로 모이고, 함께 만나야 합니다.
사회의 중심이 이렇게 변한 것을 [짐 캐리]라는 사람은
“가까운 미래에 우리는 기계를 사용해서만 의사소통을 할 것이다.”라고 말했듯이,
지금 우리들은 기계(=핸드폰)를 통해서, 의사소통을 하고 있습니다.
최근에 우리나라에서도 “성 착취 동영상을 만들어, 사회적인 물의를 일으켰다“는 뉴스가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성을 망각한 행동이고, 끔찍한 죄악을 저지르는 일입니다.
이런 것들은 [성육신]의 반대되는 개념으로, [탈육신의 시대]라고 말합니다.
호주의 [마이클 프로스트]라는 학자는
교회 안에 만연한 종교적 습관과 사역의 모습들을 보면서, 마치 암세포를 찾아 제거해 나가는 의사처럼,
하나하나씩 찾아내어 진단해서, 그가 내리는 처방은 예수님이 보여주신 [성육신적 삶]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를 따르는 것은 단지 그분의 가르침을 동의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사는 온 세상이 그분의 통치 아래 들어가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이 소위 종교적 영역에서만 전문가들이 되는 것이 아니라,
연약한 몸을 갖고서 혹독한 현실의 문제에 천착하고 고민과 갈등의 현장을 지키는 것이야말로
[성육신의 삶]을 실제로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저자는 [해체]와 [탈육신]의 시대에, 그리스도의 몸이 더 완전하게 구현된 신앙,
즉 예수가 몸소 보여주었던 [성육신적] 생활방식을 반영하는 삶을 독자들에게 제시합니다.
▶[탈육신]은 무슨 말입니까?
[탈육신]은 [성육신]의 반대 개념입니다.
[탈육신]은 고대의 풍습으로, 죽은 사람의 몸에서 뼈만 남기고, ”모든 육신을 제거한다.”는 의미이니까,
인간의 몸을 해체시키는 타락한 문화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정신 분열의 모습을 “탈육신 시대의 현상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와이 원주민들은 지위가 높은 분을 숭배하기 위해서, ”뼈만 남기고, 육신을 해체하였다“는 풍습이 있었다고 합니다.
▶만약에 [탈육신]의 문화가 교회 안에 들어왔을 때, 어떤 현상이 나타날까요?
교회에 분리주의적인 모습이 나타날 것입니다.
사회에서 사는 모습과 교회에서 사는 모습이 다르게 나타날 것입니다.
교회는 [거룩함]으로 구별되어야 하는데, 어떤 의식으로든지 교회가 분리되어,
우리들 자신만의 공동체가 되면, 안됩니다.
예수님 당시에, 바리새인들은 다른 사람들과 구별되어, 인정받기를 원했고,
거기에 반대되는 사람들은 모두 죄인으로 구별했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누가복음 5장 31-32절 말씀을 함께 읽으십시오.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습니다. 건강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 없고, 병든 사람에게만 의사가 필요하다.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눅5:31~32)
예수님 당시에도“하나님을 더 많이 알고 있다”는 바리새인들도, [차별의식]을 갖고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자신은 구원받은 자”라는 [선민의식]을 갖고 있었고,
다른 사람들을 차별함으로써, 자신을 [구별된 사람]으로 인정받기를 원했습니다.
그런 가운데, 예수님은 그것을 깨뜨리려고 노력을 다하셨습니다.
오늘의 본문의 앞 절에 나오는 34-35절 말씀을 함께 읽으십시오.
“예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너희 같으면, 신랑이 함께 있는 동안에 초대받은 사람들을 금식하도록 하겠는가?”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 때가 되면, 거들고 금식할 것이다“(눅5:34~35)
[금식]은 유대인에게 아주 중요한 영성훈련이자, 신앙의 덕목입니다.
바리새인들은 금식을 [제도화] 하거나, [형식화] 해서, ”보여주기“식으로 금식을 했어요.
예수님은 그런 모습을 보고,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은밀히 금식하라“고 가르치십니다.
[금식]은 마음을 다하고, 겸손히 나가야 하고, 은밀히 행해야 하는데,
바리새인들은 금식을 행하면서 더 교만해 지고, 다른 사람들을 정죄하고 있습니다.
[금식]은 하나님 앞에 더 가까이 가려는 것인데, [금식]을 이용하여 위선을 보이고,
자신을 나타내는 자랑을 하고, “종교적 울타리로 사용했다”는 것입니다.
[금식]은 영혼을 위하여 만든 제도인데, 육체를 자랑하는 제도가 된 것입니다.
이것은 [탈 육신화 현상]이라고 합니다.
코로나 재난이 우리에게 큰 고통을 안겨 주었지만, 이번 기회에 [교회의 본질]에 대하여 생각하게 하고,
회복하게 만들어 주는 효과도 있었습니다.
우리의 영혼을 위해 만들어진 교회가 육신을 위한 것이라면, [탈 육신적인 제도]가 됩니다.
그러므로 [참된 교회]가 되려면, [교회의 본질]을 회복해야 합니다.
우리는 교회에 다니던 신앙에서, 내가 교회로 존재하는 신앙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그러니까 ”내가 [교회 자체]“이므로, ”내가 교회로 존재하는 사람인가?”를 깨달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오늘의 말씀에서 3가지 [비유]로, 육신적인 교회가 되지 않게 교훈을 주십니다.
(1)첫 번째 비유로, 예수님이 신랑으로, [성육신]하는 그리스도의 임재를 느껴야 합니다.
즉, 다시 말해, “결혼의 비유”입니다.
예수님이 이 [비유]를 통해서,“새로운 시대가 왔다”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예수님이 오신 것은 “신랑을 기다리는 신부의 기쁨과 같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신앙의 본질]은 무엇입니까?
신랑 되는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는 것이지, 바리새인과 같이 종교적 규칙을 통해서, 만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신앙의 중심에 그런 기쁨이 있습니까?
그런 기쁨이 우리가운데 살아 있어야 합니다.
바리새인들은 그런 기쁨이 없었습니다.
유대인들은 규율에 들어오지 않으면, 버려진 사람으로 취급을 했으니까요.
[교회]는 그런 [기쁨]이 있어야 해요.
[예배]는 신랑 되는 예수님을 만나는 [신부의 기쁨]이, 우리가운데 나타나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창조하시고, 우리를 이끌어 주는 목자이니까,
우리와 연합하기 위해서 “예수님은 신랑 되신 분으로 오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결혼식에서 신랑과 신부의 만남은 [교회의 본질]과 같습니다.
대부분 신랑이 신부를 기다리지만, 유대인들의 결혼식에서는 신부가 신랑을 기다립니다.
그런데 언제 올지 모릅니다. 기다리는 동안 기쁨으로 예배하고, 나타났을 때는 더욱 기쁘게 맞이하는 것입니다.
이런 [기쁨]을 알았기 때문에, [예배]가 더욱 즐거운 거예요.
(2)두 번째 [비유]는 세상 속으로 [성육신] 하는 그리스도의 모습이어야 합니다.
즉, “새 옷을 입는 비유”입니다.
36절 말씀을 읽으십시오.
“낡은 옷을 기우려고, 새 옷을 자르는 사람은 없다. 그렇게 하면 새 옷이 찢어져 못쓰게 되고,
새 옷의 조각도 낡은 옷에 어울리지 않는다.”(눅5:36)
[옷]이란 “자신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문화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의 전통은 “세상과 분리하여 자신은 의롭다”고 하고,
다른 사람들은 정죄하였는데, 그것을 여기서 [헌옷]이라고 비유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복음]은 [새 옷]으로 비유합니다.
[복음]은 바리새인들이 만들어 놓은 율법적이고, 전통적인 분리주의입니다.
[헌옷]을 고치기 위해, [새 옷]을 찢어 붙이는 사람은 없습니다.
여기서 [헌옷]은 바리새인들이 만들어 놓은 “종교적 울타리”입니다.
[율법]을 지키기 위해 만들어놓은 [문화]들이 있는데, 그런 것을 지키면 하나님이 사랑을 받고,
그것을 지키지 않으면, “죄를 짓는 일이라”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은 그런 [헌옷]은 벗고, “[새 옷]은 입으라”는 말씀입니다.
▶신약에 나타난 [정신]은 무엇입니까?
율법을 통한 [헌옷]을 벗고, “그리스도 안에서 [새 옷]을 입으라“는 말씀입니다.
[율법]을 통해 주신 낡은 [옷]을 벗고,
그리스도 안에서 [구약]에 메이지 말고, [새 옷]을 입어야 합니다.
우리들도 오랫동안 익숙한 [문화]에서 벗어야 합니다.
유대인들이 그랬고, [율법] 속에서 [이방인]들에게 강요했어요.
(3) 세 번째 비유는 성령의 교통하심으로, [성육신]하신 그리스도의 임재입니다.
즉, “새 포도주와 새 부대의 비유”입니다.
37-38절의 말씀을 읽으십시오.
“또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부대에 넣는 사람도 없다.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그 부대를 터뜨려서 포도주는 쏟아지고, 부대도 못쓰게 될 것이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눅5:37~38)
[복음]은 “새 포도주”와 같습니다.
여기서 “새 포도주”는 예수님을 중심으로 확장되는 <하나님 나라>의 역동성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말입니다.
[새 포도주]의 반대 개념으로, [묵은 포도주]는 구원이 멀어진 구약종교의 지도자들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말입니다.
여기서 새 포도주는 [포도즙]입니다. 우리나라가 김치를 담그듯이, 포도의 열매를 따서,
기계의 틀에 넣고 발로 밟으면 즙이 나오는데, 그 마지막 끝에 [가죽 부대]를 달아놓으니까,
그 속에 그 [포도즙]이 들어가게 됩니다.
그러면 그 속에서 [발효작용]이 일어나고, 가스가 나오니까, 팽창하게 됩니다.
그럴 때에 [가죽 부대]는 늘어나기도 하고, 줄어들기도 합니다,
[헌] 가죽부대는 가스가 많이 차면 팽창하여 폭발합니다,
여러 번 사용하면 터지게 되므로, [새] 부대를 사용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그걸 비유하여, 생명이 없는 종교적 체계는 [헌 부대]이니까,
[헌 부대]에는 “예수그리스도의 생명을 가두어 둘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니까“새 부대를 사용하라”는 말씀입니다.
[헌 가죽부대]는 생명력이 있는 것을 가두어 둘 수 없으니까, [새 부대]를 준비하라“는 것입니다.
종교적 울타리가 예수님의 생명을 가두어 둘 수 없으니까, [헌옷]을 벗고 [새 옷]을 입듯이,
“새 가죽 부대로 바꾸라”는 말씀입니다.
한 마디로, [옛 것]은 버려야 하고, [새 문화]를 받아드려야 합니다.
바리새인들의 가죽부대는 터질 수 밖에 없는 낡은 옛 가죽 부대이지만,
바리새인들의 가죽부대는 전통적인 [분리주의] 이기에, 감당할 수 없습니다.
[복음]의 [가죽부대]는 새 부대이니까,
또한 새 부대의 운동력은 엄청 크기 때문에, 찢어지지 않습니다.
그것이 [성령의 능력]입니다.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 없는 [성령의 팽창력]을 느껴야 합니다.
▶왜냐하면? 성령이 임하면, 팽창력이 발생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성령의 교통하심”을 우리 안에 나타나야 합니다.
[주기도문]에 나오는 “성령의 교통하심”이 우리 안에 나타나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모여서 함께 예배를 드리게 됩니다.
▶왜, 우리는 모여서 예배를 드립니까?
성령의 교통하심이 있기에, 함께 모여 있을 때, [능력]이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혼자] 할 수 없는 때는 언제입니까?
①결혼하는 일과 ②신앙생활하며 예배드릴 때입니다.
성령이 함께 하면, 성령이 교통함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함께 모여 예배를 드립니다.
[주의 영]이 함께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기 때문에, 함께 해야 합니다.
▶[교회의 능력]은 어떤 것입니까?
[교회의 능력]은 성육신하신 교회의 모습으로 존재할 때, 나타납니다.
이 세상은 점점 더 [탈육신화] 되어, 육체와 영혼을 분리시킬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복음]의 옷을 입고, 세상 속에서 승리하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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