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 말씀

어린 아이 다움 (막9:33~37) 2020.05.02 토요예배

다이나마이트2 2020. 5. 2. 16:13

어린 아이 다움 (막9:33~37)              말씀: 이재훈 목사님

 

세상에서 가장 슬픈 광경은 어린 아이 답지 않은 어린이의 모습을 볼 때입니다.

어린 아이가 성장했는데도 [성인아이]의 모습이 보여 질 때입니다.

 

[성인아이]의 모습은 어떤 모습입니까?

주변 사람들에게 관심을 끌기 위해서, 겉으로는 착하게 보이고, 실제로는 어린아이 같지 않은 모습입니다.

이런 모습은 어린 아이가 [애 어른]처럼 행동하거나, 착한 아이 콤프렉스에 빠져있는 경우인데,

어른들의 관심과 사랑을 얻어내기 위해 하는 행동입니다.

 

이런 모습은 관계의 어려움을 가져올 수 있습니다.

진짜 어린아이의 모습은 미성숙한 모습 그대로, 표현해야 합니다.

 

오늘은 [어린이 주일]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이 한 아이를 껴안으셨습니다.

이 상황을 보면, 예수님이 그 아이를 껴안아야, 가만히 있는 아이일 것입니다.

 

그 집안에서 말을 잘 듣는 아이가 아니고, 예수님은 힘들지만 달갑지 않은 아이를 선택하여,

교훈을 주기 위한 행동입니다. 그러니까 그 아이는 다루기 힘든 아이였을 것입니다.

 

아마도 저는 베드로의 아이일 것으로 추정하지만, 한글 성경에는 집안에 계실 때라고 쓰여 있지만,

원본에는 가버나움에 있는 바로 그 집에 있다는 것을 보면, [익숙한 집]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마가복음 936-37절 말씀을 읽으십시오.

예수께서 한 아이를 데려와 그들 가운데에 세우셨습니다.

그리고 아이의 팔로 껴안고 제자들에게 말씀 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는 사람은 나를 영접하는 것이고,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는 사람은, 나를 영접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을 영접하는 것이다.“(9:36~37)

 

이 말씀은 피상적으로 생각을 하면, ”어린이를 소중하게 품어 주어야 한다는 말이지만,

연약한 어린이를 잘 품으면, “예수님을 품은 것이다.“라고 연결 지어,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 속에는 더 깊은 진리가 숨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어린아이다운 어린아이를 비추어, ”나를 영접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영접하는 것이라

자신을 얘기하셨습니다.

 

이 말씀에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예수님 자신을 어린아이와 동일하게 생각하시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단어는 내 이름으로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본질]이기 때문에,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은 ”[성부 하나님]을 영접하는 것이다.”는 말씀입니다. 또 다른 하나는 [어린 아이의 모습] 속에는 [예수님의 모습]이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33절에서 35절까지, 제자들은 길을 가면서 서로 다투고 있습니다.

그것은 누가 큰 자 인지?“에 대해 논쟁을 하고 있습니다.

 

사실 [큰 사람]이 되는 것이 나쁜 것은 아닙니다. 33-34절 말씀을 읽으십시오.

그들은 가버나움으로 갔습니다. 집안에 계실 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물으셨습니다.

오는 길에 너희끼리 왜 논쟁했느냐?‘ 그러자 제자들은 말이 없었습니다.

들은 길에서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 하는 문제로 다투었기 때문입니다.”(9:33~34)

 

가버나움은 예수님의 두 번째 고향과 같은 곳인데, 거기서 예수님은 서신 채로 말씀하십니다.

제자들의 다툼 내용은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 라는 문제입니다.

 

스승이 계신데, “제자들이 다퉜다고 하면, 그것은 문제입니다.

이것은 마치 부모님이 중병에 걸렸을 때, 부모님 침상 옆에서 자식들이 재산 분배에 대해

싸우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의 12제자들은 서로 친해질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마태는 세리였고, 세리라는 직업은 사람들의 분노를 일으키는 사람입니다.

 

시몬은 마태와 서로 다투는 사이이고, 어부와 서로 문화가 다르니까 서로 다투기 마련입니다.

저는 이 상황을 보면서, 순장님들이 순원들과 어려움을 느끼는 것을 이해하려 합니다.

 

제자들의 마음속에, ”누가 큰 자인가?”라는 것은 누가 지배를 하는가라는

[지배욕]에 대한 다툼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런 [지배욕]은 공동체 안에서 자주 나타나서 다툼이 벌어집니다.

 

우리들 자신에게도 이런 [지배욕]이 있습니다.

인간 안에는 [권세의 욕구][지배의 욕구]가 남아 있습니다.

 

인간은 누가 더 크냐?”는 논쟁 속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서로 지향점이 다르기 때문에수난이 온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어린아이다움]을 통해서, ”하늘나라의 본질을 설명하려고 합니다.

하늘나라에서는 왕이 가장 [큰 일꾼]이고, 백성들을 섬기는 []입니다.

 

그래서 935절 말씀에서,

예수께서 자리에 앉으시면서, 제자들을 불러놓고 앉아서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사람의 꼴지가 되어야 하고, 모든 사람을 섬기는 종이 돼야한다.“.(9:35)

 

여기서 앉아서라는 말씀은 이제부터 본격적인 말씀이 시작 된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은 12제자를 불러놓고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 싶은 사람은

모든 사람의 끝이 되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이 앉아서 하시는 말씀은 낮아지라.“는 말씀이십니다.

이것은 [낮아짐]의 원리를 통하여, ”하향성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이것은 성공의 법칙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사람은 지배하려는 욕구가 있으므로 꼴찌가 되어야 하고,

모든 사람을 섬기는 종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오실 때, 하나님의 본체이시고, 모든 영광을 받으시는 분인데도,

자기를 낮추시고 [구유]로 오셨고, 그리고 모든 사람들을 섬기다가 죽는 순간에도

[십자가]의 형틀에 자신의 생명을 내어드린 분입니다.

 

그러니까 모든 사람들의 첫째이신 예수님은 모든 사람들의 []이 되어 사시다가,

모든 사람들을 위해서, 돌아가신 분입니다.

 

그래서 마가복음 1045절 말씀에, “인자 역시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많은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 치를 몸값으로 자기 생명을 내어 주려고 온 것입니다.”(10:45)

 

이런 모습을 보고, [죠지 맥도날드]어린아이다움은 사람다움의 가장 심오한 핵심이고,

사람이 갖고 있는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우리 주님은 영원히 어린아이다우신 분입니다.

어린아이다움은 하나님의 본질에 속한 것입니다.”라고 기술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모습은 어떤 모습일까요?

예수님의 모습은 가장 순수한 어린아이다움을 간직한 모습이고,

사람이 갖고 있는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예수님은 영원히 어린아이다움을 지니신 분입니다.

 

예수님은 [낮아짐]을 설명하기 위해, 어린아이를 데려와 [삶의 태도]를 모델로 제시 하셨습니다.

여기에 왜 아이를 내세우셨을까요?

아이는 돈과 인기와 권력에 영향을 받지 않기 때문에, 아이를 선택한 것이지요.

아이는 한 마디로, [청정지역]이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37절 말씀에서,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는 사람은

나를 영접하는 것이고,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는 사람은 나를 영접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을 영접하는 것이다.“(9:37)라고 말씀을 마치십니다.

 

여기서 예수님을 영접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내 마음 속에 주인으로 모신다.“는 뜻이고, 마음속으로 예수를 받아드린다는 의미입니다.

 

그럴 때에 우리의 마음은 어때야 합니까?

[어린아이다움]의 순수함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사회적인 약자인 어린 아이를 도와주면서도, 나의 [지배욕]이 일어납니다.

그러나 우리는 정반대로, 예수님의 이름으로 어린아이다움이 나의 내면에 형성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어떻게 됩니까?

내 마음속에 있는 [지배욕]이 뽑히게 되는 것입니다.

만일 나에게 [어린아이다움]이 회복되면, 모든 사람의 []이 되지만,

결과적으로 그 자체가 기쁨으로 충만하게 됩니다

 

부모는 어린 자녀에게 돌보는 것으로 만족하고, 그 자체를 기뻐합니다.

부모는 아이에게 선물을 주는 것을 기뻐하고 만족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영접하고도, 예수님의 임재가 나타나지 않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요?

그것은 내 안에 [어린아이다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 원인은 내 안에 어린이의 순수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 [애 어른]처럼, 가식적으로 행동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어린 아이처럼, 하나님 앞에 순수하게 나가야 합니다.

 

[야망][비전]이 차이는 무엇입니까?

[야망]은 자기가 스스로 높아지려는 마음이고,

[비전]은 하나님의 마음으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비전]은 남을 높이는데 지향점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비전이 있는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첫째는, 남을 높이고

둘째는, 하나님께 영광이고

셋째는, 내가 낮아지는 사람입니다.

 

오늘, 어린이 주일에,

예수님의 천진스런 어린이 모습이 내 안에 나타나길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