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 말씀

아버지와 아들의 동행 (창22:1~14) 2020.05.10

다이나마이트2 2020. 5. 10. 18:56

아버지와 아들의 동행 (창22:1~14)  말씀: 이상준 목사님

 

5월은 [가정의 달]이고, 오늘은 [어버이주일]입니다.

오늘은 아브라함과 이삭의 어색한 동행에 대해,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창세기 22장 1-2절에는, “이런 일이 있은 후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시험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브라함아, 그가 대답했습니다.

’예, 제가 여기에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네 아들, 네가 사랑하는 네 외아들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지시하는 산에서 그를 번제물로 바치라’”(창22:1~2)

 

아브라함이 75세의 나이에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 믿음의 조상이 되었으나,

100세의 나이에 어렵게 아들을 낳았는데, “그 아들을 번제물로 바치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이해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시험]은 우리를 연단하고, 테스트를 하는 것이지만, 이건 너무 심합니다.

하나님이 갑자기 “아브라함아?”라고 부르니까, 아브라함이 “예 제가 여기 있습니다.”라고 대답합니다.

그 다음에 “네가 사랑하는 아들을 데리고 모리아 산으로 가서 번제물로 바치라”고 명령을 하십니다.

 

번제물이 무엇입니까?

[번제]라는 말은 “대속의 의미”가 있습니다.

[번제의 제물]이란 “다른 사람의 죽음을 대신하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아들을 불에 태워 바치는, “제사의 제물로 바치라“는 의미입니다.

 

아브라함이 눈에 넣어도 아깝지 않은 사랑하는 외아들을 태워서 “번제물로 바치라니?”

이건, 정말 이해할 수 없는 난제입니다.

 

아브라함이 아무리 [믿음의 조상]이고, “하나님을 신뢰한다.“고 해도, 이건, 너무 심합니다.

[사랑의 하나님]이 어떻게 이런 엉터리 같은 말씀을 하실 수 있습니까?

 

나의 생명보다 더 소중한 ”아들을 바치라”는 것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무엇을 주겠다"는 것이 아니라, “바치라”는 것은 "뺐겠다"는 것이니까,
"아들의 생명을 가져가겠다."고 하니, 얼굴색이 변하게 만듭니다.


우리는 여기서 [믿음]의 중요한 정의를 발견하게 됩니다.

믿음의 첫 단계는 아들을 얻었듯이, 구원을 얻는 것이지만, 그러나 믿음의 마지막 단계는 주신 것을

다시 빼앗아 가는 것이니까, 믿음이란 나를 포기하고,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하나님이 “무엇을 얼마나 주시는가?“가 아니라, ”자신을 얼마나 포기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이 세상의 비극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자신을 의지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2절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너를 포기하라"라고 하지 않고, "네 [자식]을 포기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부모는 자식이 죽게 되었을 때, 대부분 자식이 죽는 것보다, 자신이 죽기를 원합니다. 이것이 [부모의 마음]입니다.

 

3절에서,“아브라함이 다음날 아침 일찍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얹고, 하인 두 사람과 아들 [이삭]을 준비시켰습니다.

번제에 쓸 나무를 준비한 후,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곳을 향해 떠났다”고 했는데,

여기서 뭐가 좀 이상합니다.

 

▶3절의 말씀에서, 이상한 게 있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먼 길을 떠나는데, 아내인 [사라]의 이름이 나오지 않습니다.

[사라]가 이 사실을 알았다면, 그냥 가만히 있을 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사라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혼자 결정하고, 떠났어요.

가정사는 함께 상의해야 하는데, 이 가정의 결정권은 ”아브라함에게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4절 말씀을 보십시오. "3일째 되던 날,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그곳을 멀리 바라보았습니다."(창 22:4)

여기서 3일이란 시간동안, 아브라함은 [이삭의 죽음]을 묵상했을 것입니다.

 

이삭과 같이 걸어가고 있지만, 그의 마음속에는 ”자기 아들을 자기 손으로 죽여야만“ 하는

결코 거부하고 싶은 사실일 것입니다.

 

[죽음]을 묵상하는 사람은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사람들이 죽음 앞에서 당황하는 이유는 죽음을 깊이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죽음을 생각했던 사람은 죽음이 현실로 다가왔을 때,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것을 담담하게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는 3일 동안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그가 아버지의 마음을 가진 사람이었다면, 그는 통곡을 했을 것입니다.

순간순간마다 그는 견딜 수 없는 시간을 보냈을 것입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았지만, 하나님이 나 때문에, 얼마나 눈물을 흘리며 기다렸는지,

아브라함은 그 3일 동안, 많은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사람은 [사랑]을 깨달을 때, [성숙]해 집니다.

하나님의 사랑, 부모님의 사랑을 깨달을 때, 우리는 할 말을 잃고 겸손해 집니다.

 

5절 말씀을 함께 읽으십시오. "그가 하인에게 말했습니다. 너희는 나귀와 함께 여기서 기다리라.

나와 아이는 저기 가서 경배한 다음에 너희에게 함께 돌아오겠다."(창 22:5)

 

아브라함에게는 "목적지에 도착했다"는 사실이 기쁨도 슬픔도 아닙니다.

한편으로는 하나님께 순종하는 기쁨이기도 했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는 자기 아들을 죽여야 하는 슬픔일 수도 있습니다.

5절 말씀에서 특이한 사실은 "내가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경배하고 너희에게로 돌아오겠다."라고 태연히 말합니다.

이 문장을 보면 슬퍼하는 표현은 전혀 없고, "경배하고 다시 돌아올 것"이라고 말하니,

 

"아들을 죽인다."는 말인지, "아들을 죽이지 않겠다."는 말인지,

아니면 "경배하는 척 하고, 그저 돌아오겠다."는 말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아브라함의 [믿음]의 세계를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다시 돌아오게 될 것이라는 마음이 생겼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의 기적]입니다.

 

5절 말씀에서 또 하나 발견하는 것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데리고 [번제]하러 가고 있는데, 아브라함은 [경배]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번제]는 죽는 것인데, [경배]라는 단어를 사용하니, [죽음]을 [예배]로 승화시킵니다.

 

즉, 어린 양,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의 구원을 이루게 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죽음에 머무르지 아니하고, 부활하심으로,

그 [십자가 사건]이 우리에게 [예배의 사건]이 된 것과 같습니다.

 

[번제]가 [예배]로 바뀔 수 있는 것은 바로 [순종]입니다.

아브라함은 나는 내 아들 이삭을 죽이러 가고 있지만, 그것은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와 같다"는 뜻입니다.

[번제]는 [예배]로 바뀌었고, [예배]는 [부활]로 바뀐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마음속에는 [번제] 전에, [부활의 신앙]으로 충만해 있었기에, 그렇게 말한 것입니다.

 

저는 아브라함과 이삭의 동행하는 과정에서, 그들의 대화에 감명을 받습니다.

말없이 가고 있는 아버지에게 아들이 먼저 말을 걸었습니다.

 

7-8절 말씀을 읽으십시오.

“이삭이 자기 아버지에게 말을 걸었습니다. ‘아버지’, 아브라함이 대답했습니다.

‘왜, 그러느냐? 내 아들아?’ 이삭이 말했습니다. ‘불과 나무는 여기 있는데, 번제로 드릴 양은 어디 있나요?’

아브라함이 대답했습니다. ‘내 아들아? 번제로 드릴 양은 하나님께서 친히 준비하실 것이다’

두 사람은 함께 계속 길을 갔습니다.”(창22:7~8)

 

여기에서 [함께]라는 단어는 자주 나오는데, 아들이 답답해서 먼저 말을 합니다.

번제할 양이 보이지 않으니까, “번제물은 어디 있습니까?”라고 묻습니다.

 

드디어 [이삭]이 입을 엽니다. [이삭]은 이미 자신이 죽게 될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님도 태어날 때부터 자신의 삶도 "십자가를 향해 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아마 아브라함의 속마음은 [이삭]이 입을 열지 않는 것이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할 말이 없기 때문입니다.

 

8절 말씀에서, 하나님은 침묵했지만, "번제할 어린양은 하나님이 준비하신다."고 믿고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이 하는 일이 있고, 사람이 하는 일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것은 순종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이 역사해서 기적을 베풀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큰 그림을 볼 수 없지만, 하나님은 그걸 미리 아시고, [숫양]을 미리 준비하십니다.

전염병으로 우리가 어려움을 겪지만, 우리는 견디며 함께 기도하고, 기다리십시오.

 

아브라함처럼 순종하고 기다리면, 하나님이 다 준비해 주실 것입니다.

아브라함처럼 고난의 길을 걸어가도, 하나님은 우리에게 좋은 일을 준비하실 것입니다.

 

내 아이를 사랑한다면, 어려운 역경의 선물을 체험하도록 하실 것입니다.

그 후에 아브라함은 설교할 내용이 없을 정도로, 평탄한 삶을 이어 갔습니다.

 

그날, 모리아 산에서 아버지와 아들의 동행은 [해피엔딩]으로 끝났어요.

[번제물]로 아들 대신에, 하나님이 [양]을 준비함으로, 모두 해결 되었어요.

 

5월 가정의 달에, 우리의 삶도 하나님을 신뢰하면서 하나님과 함께 같이 동행하면,

모두가 [해피엔딩]으로 마무리 지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