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 내게 원하시는 것 (미6:6~8) 말씀: 이상준 목사님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하여, 두 달 만에 예배를 다시 시작하면서
“참된 예배란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됩니다. 그
동안 우리들의 모든 활동을 정지시키고, 사회적인 [거리두기]를 시행하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게 하시니, 감사를 드립니다.
말라기 1장 10절의 말씀에서, 개역개정 성경에는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내 제단 위에 헛되이 불사르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너희 중에 성전 문을 닫을 자가 있었으면, 좋겠도다.
내가 너희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너희가 손으로 드리는 것을 받지도 아니하리라.(미1:10)
쉬운 말로 하면, ”너희가 내 제단 위에 쓸데없이 불을 놓지 않도록,
너희 중 하나가 성전 문을 닫았으면 좋겠다. 나는 너희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너희가 드리는 것을 받지도 않을 것이다.”(미1:10)
내가 언제 너희에게 제물을 원했느냐?
나는 너희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너희가 드리는 제물도 받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예배를 다시 시작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먼저 “교회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고, ”참된 예배가 무엇인지?”를 묵상하기 바랍니다.
오늘의 말씀인 미가서 6장 6절의 말씀을 함께 읽으십시오.
“내가 무엇을 가지고 여호와 앞에 나아가며, 높으신 하나님께 경배할까?
내가 번제물을 가지고 나아갈까? 1년 된 송아지를 가지고 그분께 나아갈까?”(미6:6)
[미가서]는 선민 이스라엘의 도덕적인 부패와 거짓 선지자들과 제사장들의 타락을 고발하며,
하나님의 심판이 있을 것을 경고하는 내용입니다.
미가서의 저자인 [미가] 선지자가 사사시대에 활동했던 선지자로,
시골마을 출신으로, 수도 예루살렘의 심판을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예언하고 있습니다.
아하스 왕은 악한 왕으로, 우상숭배에 열을 올리므로,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 아람 군대에게 짓밟히게 만드는 영적으로 암울한 시대의 이야기입니다.
우리 자신의 신앙도 중요하지만, “믿음의 공동체가 어떤 상황인가?“도 중요합니다.
그 당시가 영적으로 암울한 시대이고, [물질 만능]이나, [기계 문명]에 젖어 있으니까,
많은 사람들이 우상에 빠져 있습니다.
그러니까 가면 갈수록 생활은 어려워지고, 이단 사이비들이 난무하고 극성이니까,
”과연 어떻게 살아야 하나?”가 [미가] 선지자의 고민입니다.
그래서 [미가] 선지자는 7절 말씀에서,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여호와께서 수천 마리의 숫양이나 수만 마리의 강 같은 기름을 기뻐하실까?
내가 내 악행을 벗기 위해, 내 영혼의 죄를 위해, 내 몸의 열매인 맏아들을 드릴까?”(미6:6)
[미가] 선지자가 “하나님, 이 땅을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울부짖습니다.
먹구름이 끼면 하늘을 볼 수 없듯이, “우리가 예배를 드리고 싶은데, 예배를 볼 수 없으니,
어찌해야 합니까?“라고 기도하는 우리들의 심정과 동일합니다.
[미가] 선지자가 울부짖듯이, 우리의 심정도 이와 같습니다.
내 악행을 벗어나기 위해, 내 죄를 위하여 어떻게 해야 합니까?
수천 마리의 숫양을 받쳐도, 수 만 마리의 기름을 드려도 하나님이 기뻐하실까요? 아니면,
극단적인 방법으로 “내가 낳은 맏아들을 드려야 기뻐하실까요?“라며 하소연 하고 있습니다.
이런 것으로 감동하는 하나님이라면, 그건, [샤머니즘] 이겠지요.
나의 실제의 삶이 어떻게 살든지 간에, 성공하고 출세를 해야 한다면,
그것은 나만의 이기주의적인 사고방식입니다. 그건 아니지요.
그래도 하나님이 나를 지켜주고 계시니까, 이 만큼이나 예배를 드리고, 감사하고 지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그릇된 신앙이 개개인에게도 물론 있지만, 우리 공동체 안에도 존재합니다.
우리 사회는 [성공 지상주의]와 [물질 만능주의]가 자리를 잡았고, [편견]과 [선입견]으로 채워져 있으므로, 우리는 세상을 탓하지 말고, 우리 자신의 문제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왜, 그럴까요?
[십자가의 영성]은 사라지고, [형식적인 신앙]만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각자에게 이런 끔찍한 신앙생활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악행과 술수를 거리낌 없이, 서슴치 않게 하는 것은 문제입니다.
우리는 복을 받기 위해 신을 찾는 것은 [기복주의] 이지만,
이런 [기복주의]로 부터 시작되는 모습이 우리 안에 있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본질]이 먼저 회복되지 않으면, 곤란합니다.
교회를 교회답게 하고,
성도를 성도답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점점 더 [인본주의]의 쓰나미가 몰려오고, [종교 다원주의]로 인해, 문제가 발생할 것입니다.
그래서 앞으로는 교회 문을 닫을 수 있는 날이 올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배를 드리고 싶어도, 드릴 수 없는 날이 올 것입니다.
[교회]는 영혼을 구원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합니다.
우리가 [복]을 받기 위해, 교회에 나오는 것은 아닙니다.
”말초적인 신앙생활”이 아니고, [본질적인 신앙]으로 회복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근본적인 신앙]으로 바뀌지 않으면, 우리는 바로 설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미가] 선지자는 8절 말씀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합니다. 8절 말씀을 읽으십시오.
”오, 사람들아, 무엇이 좋은지, 이미 그분께서 네게 말씀하셨다. 여호와께서 네게 원하시는 것은
공의에 맞게 행동하고, 긍휼을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다.“(미6:8)
이 말씀을 쉽게 다시 풀어보면,
”여호와께서 선한 것이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먼저 알려 주셨습니다.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요구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①첫째로, 옳은 일을 행하는 것이며,
②둘째로, 한결같은 사랑을 보이고,
③셋째로, 겸손한 마음으로 너희 하나님과 교제하며, 사는 것이다.“(미6:8)
히브리어로 ”좋다”는 단어는 [토브]입니다.
이 말은 하나님의 관점에서 옳고, 선한 것을 “보시기에 좋았더라”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내게 원하시는 것은 무엇입니까?
①첫째로, 공의에 맞게 행동하고,
②둘째로, 긍휼을 사랑하고,
③셋째로, 겸손히 하나님과 함께 동행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공의]는 무엇입니까?
[공의]는 “바르게 사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기의 의]가 아니고, [하나님의 의]를 우선해야 합니다.
오늘 말씀에 나오는 [정의]는 “상대적인 것”이 아니라, “절대적인 관점”에서의 정의를 말하는 것입니다.
시편 15편 2-3절의 말씀을 읽어보십시오.
“올바르게 행동하고, 의를 행하며, 마음으로 진실을 말하고, 혀로 헐뜯는 말을 하지 않으며,
이웃에게 해를 입히지 않고, 동료에게 누명을 씌우지 않으며”(시15:2~3)
이 말씀을 정리하면, ①올바르고 정직하게 행동하고, ②옳은 일을 행하고,
③마음으로 진실을 말하고, ④남을 비방하지 말고, ⑤이웃에게 해를 입히지 않고,
⑥동료에게 누명을 씌우지 않는 사람이 되라“는 교훈입니다.
▶누가 여호와의 장막에 머무르는 사람입니까?
앞에서 열거한 사람으로, 선하게 살고, 규례를 지키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들이 일하면서 남을 속이는 일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사람들은 ”목사님, 요즘엔 그렇게 살수 없어요?“라고 말을 하겠지만,
그렇게 행동하고, 규례를 지키는 사람이 ”순종하는 사람“입니다.
오늘 날에는 [쾌락주의]와 [물질 만능]의 시대에 살고 있지만,
[쾌락]이 [말씀] 보다 우위에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준행해야 합니다.
그런 나쁜 [사상]이 크리스천에게도 스며들어 있지만, 그래도 [돈]이 전부가 아니듯이,
그런 [사상]에 물든 신앙이 아니라, 전능자이신 하나님을 만나는 신앙으로 생활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예배자의 삶]은 바르게 살고, 선악을 구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물론, 죄인도 받아드리는 하나님이지만, ”공의에 맞게 살라“는 뜻입니다.
(2) 둘째로, 하나님이 내게 원하는 것은 ”사랑하며 사는 것“입니다.
즉, 다시 말해서 ”긍휼을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긍휼을 베푸는 사람이 되라”
“긍휼을 베푸는 것”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다른 사람에게, 어려운 사람에게 [정]을 나누고, [물질]을 나누어 주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외국인 노동자나, 노숙인 들에게 긍휼한 마음을 갖고, 실천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요즘 우리나라에서 시행하는 [공감 소비운동]도 아주 좋은 사례입니다.
이런 [공감 소비운동]이 어려운 이웃이나, 중소 자영업자들에게 도움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기적인 소비운동”이 아니고, 어려운 사람들에게 “공감이 가는 소비운동”이 되어야 합니다.
물론, 우리 모두가 다 어렵지만, 나보다 더 어려운 사람은 반드시 계시므로,
그런 분들에게 혜택이 가야 합니다.
사도 요한이 요한일서 3장 17절 말씀에서 이런 말을 합니다.
“누구든지 세상 재물을 갖고 있으면서, 자기 형제나 자매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줄 마음이 없다면, ‘어떻게 그 사람 안에 하나님의 사랑이 있다’고 하겠습니까?”(요일3:17)
이 말은 “문을 걸어 잠근다.”는 의미가 아니고,
형식적으로 대하지 말고, “적극적으로 도와주라“는 말씀입니다.
지금까지 [공의]와 [긍휼]에 대한 말씀인데, [공의]는 직선이고, [긍휼]은 곡선을 나타냅니다.
그러니까 [은혜]와 [진리]가 함께 가듯이, [직선]과 [곡선]은 같이 갑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바르게 사는 크리스천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올바르게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십계명]의 조항들은 ”우리에게 바르게 살라”는 말씀인데,
내 이웃을 내 몸 같이, 사랑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왜, 세상은 범죄들이 더 많아질까요?
그것은 사랑이 식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공의]가 무너졌기 때문입니다.
(3)셋째로, 하나님이 내게 원하는 것은 “겸손히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입니다.
“내가 겸손하게 하나님을 따라가는 것”이 하나님이 원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나에게 [사랑과 공의]가 존재하는가?“를 따져 보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깊이 반성하고, 돌이켜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필리핀의 선교사가 오지 벽지에 있는 마을에 들어가서, 오래 동안 아주 헌신적으로 마을을 섬겼어요.
동네 우물도 파주고, 학교도 세우고, 여러 가지 일을 도와주었는데도,
주민들이 주일날에 예배에 참석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루는 주민들을 모아놓고 호소를 하니까,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이 조용히 일어나서 하는 말이,
”당신에게서 그리스도와 같은 인격을 보여 주세요“라고 말을 했다고 합니다.
아무리 물질적인 도움을 주더라도, ”본인의 얼굴에서 [예수님의 인격]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그건 아무 소용이 없으니까요.
여러분은 ”하나님과 동행하고 있습니까?“
두 달간 교회에 나오지 못했지만, 혹시 하나님과 멀어지지는 않았습니까?
[가나안]을 거꾸로 읽으면, [안나가]인데, 교회에 [안나가]고, 자기 방의 문을 걸어 잠그고 나가지 않는
어린 아이처럼, 하나님을 멀리하는 분은 계시지 않기 바랍니다.
그동안 한 공동체에 살고 있었지만, 바이러스로 [거리두기]를 했다면,
이제는 한 공간에서, 같은 생각을 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아버지의 집을 그냥 들락날락 하기는 했지만, 진정으로 친밀하게 동행하지 않았다면,
우리의 태만을 회개하고, 바른 길로 가도록 날마다 더 겸손해 지기 바랍니다.
늘 하나님의 기준 앞에 엎드리어, 기도하는 사람이 됩시다.
세상의 기준과 타협하지 않고, 공의로운 하나님을 따라 갈 때,
[미가] 선지자의 고백처럼, ”기쁨이 넘치는 삶“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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