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 말씀

멀리서 더 가까워지는 공동체. (엡2:13~18) 2020.4.19

다이나마이트2 2020. 4. 19. 23:19

멀리서 더 가까워지는 공동체. (엡2:13~18)           말씀: 이재훈 목사님

 

요즈음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하여 사회적 거리두기를 실천하고 있습니다.

이런 사회적인 거리두기가 미덕이고, 세계적인 표준어가 되어 가고 있습니다.

 

이렇게 전염병이 창궐하는 때에 [안전]을 위해서는 꼭 필요합니다.

그러나 신앙생활을 하는 우리들은 영적생활에서 한번 생각해야 보어야 합니다.

 

오늘 저는 이 단어를 뒤집어서, 사용해 보고자 제안합니다.

그것은 사회적 거리두기가 아니고, 멀리서 더 가까워지는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까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교회]는 영적인 공동체이므로, 더 가까이 있어야 합니다.

 

지난 주일에 우리는 CGNTV[온라인 예배]와 차에서 예배를 보는 [드라이브 스루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러면서 차세대에게 교회를 방문하면 차에서 내리지 않고, 부활절 선물을 나누어 드렸고,

그리고 장애인 사업장을 돕는 [굳 웰 스토아]3,500명의 가정이 참여하였는데,

그런데 이상하게도 교회를 찾은 교인들이 스스로 눈물이 흘렀다.“고 전해집니다.

 

, [눈물]이 흐를까요? 그 눈물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교회 활동이 중지된 것에 대한 아쉬움과 그리움에서 나오는 눈물일까요?

그것은 성도들의 []에 따른 눈물이 아니고, 분명한 [영적인 의미]가 있는 눈물입니다.

 

[교회]영적인 공동체이니까, 예배당 건물이 [교회]였다면, 예배당에 모여야 예배가 가능하지만,

그동안 우리는 예배당에 모이지 않고도 예배를 드렸으므로, 교회는 우리 눈으로 볼 수 있는 것보다도,

더 큰 것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일차적인 활동은 성령 안에서 [하나] 되는 일입니다.

[성경]은 눈에 보이는 것보다도, 눈에 보이지 않는 영역을 더 강조합니다.

 

교회에서 사용되는 단어의 주어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두 사람]하나 되게하고, ”한 성령 안에서하나 되게 하십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드리는 활동이나, 헌신이나, 우리의 섬김은 모두가 2차적인 활동입니다.

이것은 교회의 본질이 어떤 존재인지?”를 알려주는 것입니다.

 

이것은 교회를 [기능]으로 보아서는 안 되고, [존재]로 보아야 합니다.

이것은 교회의 본질이 무엇이고, ”어떤 존재인가?”를 알려 주는 내용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기회에 우리는 교회의 존재를 다시 깨닫는 기회가 되어야 합니다.

 

오늘 말씀인 [에베소서 2]은 그리스도 안에서 살게 되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교회]는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있는 사람을 한 성령 안에서 하나 되게합니다.

 

에베소서 213절의 말씀을 한 목소리로 읽으십시오.

그러나 그때는 하나님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던 여러분이 이제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습니다.“(02:13)

 

여기서 하나님과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들[인간의 존재]를 나타냅니다.

사람들이 아무리 지식이 많아도, 교양이 있어도, 그 사람이 재물이 많아도,

하나님과 멀리 떨어져 있는 인간들은 항상 [불행]합니다.

 

이에 대해, 스펄 전 목사님은 인간과 하나님의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상태를 다음과 같이,

4가지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첫째로, 거대한 무지의 짙은 구름에 가리워져 있다고 말했으며,

둘째로, [죄악]이라는 거대한 산맥이 가로 막혀 있다고 표현 하셨고,

셋째로, [거룩한 진노]라는 깊은 균열을 크레바스라는 협곡이라고

넷째로, [두려움의 바다]하나님과 인간의 사이에 있다고 피력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인간과 사이에 짙은 구름과 같이, 거대한 산맥처럼 가로 막고 있고,

깊은 크레바스라는 협곡이 가로 막혀 있어도, 하나님은 인간이 스스로 선택한 [자유의지]를 존중하셨고,

[선택]을 막지 않으셨습니다.

 

, 그들이 금지된 실과를 따 먹을 때, 막지 않으셨을까요?

그것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선택의 의지]를 주셨기에, “자신이 스스로 결정하라는 뜻으로 막지 않으셨어요. 그러면서 하나님과 멀리 떨어져 있는 상태가 얼마나 힘든 것인가?”를 스스로 깨닫게 하셨어요.

 

하나님은 그렇게 우리를 위해, [구원의 길]을 열어 두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구원][회복]을 스스로 결정하고, 선택하도록 만드신 것입니다.

 

스펄 전 목사님도 그렇게 가리어져 있는 [사이]를 하나님과 가까이 하기 위해,

“[십자가의 피]로 인해, 가까이 되게 하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의 보혈]로 인해, 우리를 더 가까워지게 만드신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도 처음에는 그들에게는 죄가 없었지만, 자신이 잘못된 선택을 하므로,

하나님과 멀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자유의지]로 멀어지는 것을 선택했지만,

하나님과 더 가까이 가기 위해,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받게 하신 것입니다.

 

사람들의 [자유의지]얼마나 위험한 것인지?“를 깨닫게 만들었어요.

 

사람들은 [인간의 의지], 과학적인 지식으로, ”세상을 풍요롭게 만든다고 생각을 하지만,

인간이 [자신의 왕국]을 만드니까, 스스로 자신들에게 재앙을 만들게 됩니다.

 

그러니까 바이러스의 재앙도 인간에 대한 [자연의 역습]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멀리한 인간은 고통스럽고, 불행해 지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과 더 가까이 가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을 구속하신 후에, 하나님과 더 가까이 더 친밀해 지도록, 우리를 회복시켜 주십니다.

그래서 교회는 멀리서 더 가까워지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2) 두 번째로/ 또 다른 이유는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진 사람들이 서로 화평을 누리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217-18절 말씀을 함께 읽으십시오.

그리스도는 오셔서 먼 데 있는 여러분에게 화평을 전하셨을 뿐 아니라,

가까운데 있는 사람들에게도 화평을 전하셨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 모두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갈 수 있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2:17~18)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공동체 안에서 [참된 화평], [참된 평화]를 누리게 하셨습니다.

사람과 거리를 두어야 할 인간이 하나님과 거리를 두어야 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그러니까 어떤 이유이든지, []는 하나님과 멀어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거리를 두어야 하는 인간이 죄의 모습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피]로 인해, 한 성령 안에서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어떤 분들은 저는 교회 안에서 상처를 받아, 화평을 잃어 버렸다고 하지만,

그럴수록 우리는 예수님의 피로 더 가까이 나가야 합니다. 결코 우리에게 주신 화평을 포기하면 안 됩니다.

 

사실 신앙생활하면서, 이미 [사회적 거리두기]를 실천하시는 분들이 계십니다.

그들은 신앙생활은 하지만, 관계 속에서 거리를 두고, [나 홀로 신앙]이거나,

때로 심심하면 만나거나, “교회에 출석하는 신앙생활을 신앙의 전부라고 생각을 해요.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면, 곤란하지요.

 

자신의 속마음을 터놓지 못하고, 미음 속으로 간직하는 신앙은

요즘 [사회적인 거리두기]를 실천하는 신앙과 같습니다.

그러나 물리적으로 거리가 있어도 성령 안에서 하나가 되는 신앙생활을 실천해야 합니다.

 

멀리 있어도 더 가까워지는 공동체가 되려면, 우리 자신이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나의 삶이 교회가 되는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크리스천들은 [사회적 거리두기]라는 말에 경계를 해야 합니다.

이 말은 우리 믿는 사람들에게는 매우 무서운 단어입니다.

 

최근에 유행하는 [사회적인 거리두기]로 요양병원에 계신 환자들이 사이에서,

엄청난 스트레스에 쌓여 있다고 합니다.

 

, 그럴까요?

요양병원에서 입원한 분들이 자신이 격리되었다고 생각을 하거나,

거의 봉쇄당한 것으로 오해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평소에도 자주 찾아오지 않던 자녀들이 전염병을 구실로 찾아오지 않으니까, 더욱 오해하는 것이지요.

 

[사회적인 거리두기]를 전염병 때문이라고 생각하지만, 아무리 설명해도 정신적으로 심약하고,

소외당한 환자들이니까, 더욱 더 그런 생각이 드는 거예요.

 

이런 [현상]은 본인 스스로 [소외감]을 느끼면서, 그 소외감이 [죽음]을 상상하며, 엄청난 고통으로 나타나고, 나아가서는 엄청난 [정신병]으로 번지게 됩니다. 이렇게 외곡 된 상상력이 다른 사람들을 멀리 대하게 만들고, 결국 나중에는 자기 자신도 소외시키는 결과를 낳게 만듭니다.

 

심지어 이런 현상은 교회 안에서도 나타납니다.

그것은 사도행전에 나오는 유대인과 이방인의 갈등에서 보여 줍니다.

 

심지어 사도행전 1018절에 고넬료와 베드로의 환상에서 나오는 모습과 같이,

고넬료의 집을 방문했는데도 위법인 줄 알고 있으면서도 거리를 두어야 마땅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이방인을 []라고 부르면서, 이방인을 차별하고, 구별했어요.

인류의 역사에도 이런 일들아 자주 나옵니다.

이번 선거의 결과를 보더라도, [][]가 엄연히 구분되었고,

[동서]의 색갈이 완전히 갈라지는 [거리두기 현상]이 나타났어요.

 

이런 [거리두기 현상]을 교회가 앞장서서 막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의 피]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막상 에베소서에는 [교회]라는 단어는 나오지 않지만, 오늘 말씀에는 [한 성령 안에서],

[하나 된 새 사람(= one New Man) 안에서]이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이건, 어떤 사람을 말하는 것입니까?

소외되지 않는 사람, 소위 되지 않는 공동체를 말합니다.

세상과는 거리를 두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경험한 사람들을 말합니다.

 

어떤 공동체가 그게, 가능합니까?

[그리스도의 피]를 경험한 사람들이 가능합니다.

하나님과 멀어졌던 우리들을 회복시킨 [예수님의 피]로 가능합니다.

 

[교회]는 어떤 곳입니까?

[교회]그리스도의 피로 하나 된 사람들이 모이는 곳입니다.

[한 성령 안에서], 이 말은 [하나 된 새 사람](= one New Man) 들을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그분 안에서, 그분과 함께 지내는, “연합된 세상이 교회입니다.

멀리서도 함께 모이기를 힘쓰고, 만나기를 소망하는 사람들이 모이는 장소입니다.

 

오늘은 [장애인 주일]입니다.

사람들은 각각 신분이 다르고, 사람과의 [거리두기]를 실천하지만, 장애인과 함께 지내면서 거리를 두지 않고, 멀리 있어도 더 가가이 지내는 성령 안에서 [한 새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세상에는 장벽들이 존재하지만, 우리들은 교회 안에서 [한 새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 대표적인 한 가지 사례를 소개하고자 합니다.

 

1908년에 전라북도 김제시 금산리에 있는 금산교회에서 있었던 실제 사건입니다.

그 당시만 해도, 남녀칠세 부동석이라는 시대였으니까, 남녀가 구분하여 예배를 보던 시절입니다.

 

그래서 교회의 건물을 [기억 자]로 지은, [기억자 교회]가 지금도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그 [건물]보다, 더 유명한 일화가 전해져서 소개해 드리고자 합니다.

 

양반과 상놈이라는 신분 차이를 극복하고, 봉건적 유교문화를 뛰어넘어,

헌신과 섬김의 본을 보여준 김제 금산교회를 설립한 조덕삼 장로와 이자익 목사님의 이야기입니다.

조덕삼 장로는 이 지역 용화마을의 유지였고, 그의 집에서 마부로 일하던 [머슴]으로 지내던 17살의 [이자익]이라는 청년과 함께 예수를 믿게 되어서, [주인][]이 함께 믿고, 함께 세례도 받게 됩니다.

 

무학의 이자익은 고개 너머로 배운 천자문을 줄줄 외웠으나, 그 모습을 지켜본 조덕삼은 비록 자신이 부리는 머슴이지만, 아들과 함께 공부할 수 있도록 배려했습니다.

 

이 분이 처음으로 교회에 나오게 된 것은 테이트 선교사(최의덕)에 의해, 예수를 믿게 되었는데,

그 집의 사랑채에서 교회가 개척되기 시작했어요.

 

그런데 세월이 흘러서 두 사람이 모두 장로 장립투표가 있었는데 묘하게도 두 사람이 후보에 올랐어요.

사람들은 누구나 주인이 장로가 되는 줄로 알고 있었는데, 공정한 투표 결과에서 [주인]이 떨어지고,

[]이 당선되는 참변이 일어났습니다.

 

신분의 양극화가 뚜렷했던 그 시절 주인과 머슴이 경쟁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투표결과는 놀랍게도 이자익이 주인을 누르고 장로로 선출된 것입니다.

 

술렁이는 성도들을 향해, 조덕삼이 겸손히 일어나 말을 했습니다.

"우리 금산교회 성도들은 참으로 훌륭한 일을 해냈습니다.

저희 집에서 일하는 이자익 영수(요즘 직분으로 집사)는 저보다 신앙의 열의가 대단합니다.

그를 뽑아 주셔서 참으로 감사합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얼마나 놀랐겠어요? 그런데 놀라운 것은 [주인]이 일어나서 하는 말이

이자익 장로님은 나 보다 훌륭한 신앙을 가졌고, 참다운 신앙인의 모습을 가지셨으니,

오늘 투표결과를 당연한 결과로 받아드리고, 앞으로 이자익 장로님을 장로님으로 받들고,

섬기며, 교회를 부흥시키겠다.“고 말씀을 하는 것입니다.

 

그 후에, 이자익 장로님은 테이트 선교사를 대신해 교회 강단에서 설교했고,

조덕삼은 교회 바닥에 꿇어 앉아 그의 말씀을 들었어요.

그러나 집에서는 이자익이 조덕삼을 주인으로 성실히 섬겼고,

조덕삼은 자신의 머슴을 장로로 섬겼을 뿐만 아니라,

그가 평양에서 신학을 공부 할 수 있도록 지원도 아끼지 않았습니다.

 

조덕삼은 그로부터 3년 뒤 비로소 장로가 됐고,

금산교회의 조덕삼 장로와 이자익 목사님 이야기는 성경적 신앙과 삶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합니다.

 

우리 시대에 꼭 필요한 것은 성경적인 신앙과 삶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천민을 업신여기던 시절에 [소문]이 아니고, 실제로 있었던 [팩트]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 피]화평을 이룬 사건입니다.

이 두 분의 장로님의 이야기는 이들이 예수님을 만났기에,

두 사람이 하나 되는 계기가 되었고, [한 새 사람]이 만들어 진 것입니다.

 

모든 것을 멀리하는 요즘 시대에 가까운 공동체를 민들었다.‘는 것은 이것이 [교회]라는 반증입니다.

이것은 교회가 [그리스도의 피]로 하나가 되는 증거입니다.

 

요동치는 세상이지만, 이제 [안전] 뿐이 아니라, [사회적인 거리두기]는 미덕이기는 하지만,

그것을 지키면서, 우리 교인들에게는 받아드리기 어려운 일입니다.

 

혹시 온 라인으로 예배드리는 것이 편하다고 생각하시는 분들은 그런 생각을 하지 말고,

이 어려운 재난의 때에, 우리는 서로 기도하면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하고,

함께 힘을 모아 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