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생명으로 살게 하소서. (눅24:25~35) 말씀: 이재훈 목사님
예수님께서 죽음에서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굳게 닫친 무덤이 열리고, 무덤을 지키던 군사들도 예수님의 부활을 막지 못했습니다.
[죽음]은 영원한 생명을 막지 못합니다.
때로는 예배당의 문이 닫힐 수 있지만, 믿음 있는 예배는 멈출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참으로 살아나셨습니다.
사람들은 [부활 사건]을 믿으려 하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은 “부활만 빼고, 믿으라“고 한다면, ”내가 믿겠다“고 말합니다.
이런 생각은 [불신]을 넘어서서, ”그 사람의 [편견]이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경험한 세상만 믿고, 인정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보는 세상만 인정하는 [자연주의] 사상은 한편만 보는 사람입니다
CS 루이스는 [기적]이라는 책에서
”세상에는 여러 자연이 존재합니다. 지금의 자연 위에, 새로운 자연이 존재합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의미하고, 그 [부활]은 새로운 자연의 문을 연
최초의 사건입니다.“라고 기술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부활]입니다.
[십자가 사건]의 부활을 ”새로운 자연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타락한 자연]을 ”새로운 자연“으로 만드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예수님과 함께, 새로운 자연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루이스의 말씀에서, [지금]이라는 단어에 주목하십시오.
바로 [지금], 전염병이 창궐하는 [지금], 어떤 이유든지 낙심이 되는 바로 [지금],
[부활생명]이 다시 나타나야 할 때가, 바로 [지금]입니다.
▶세상에 공포가 있더라도, 기쁨을 빼앗을 수 없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요?
그 사람 안에 [부활생명]이 있는 사람은 기쁨을 빼앗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사람은 [부활생명]으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람은 ”생명의 능력을 베푸시는“ 예수를 믿기 때문입니다.
우리 크리스천은 ”생명의 능력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2) 두 번째로/ 나에게도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다른 어떤 누구(?)가 아니고, ”나에게도“ 나타나야 합니다.
지금 이 순간에, 나에게 그런 [부활생명]이 역사하고, 나타나야 합니다.
바울의 고백처럼, ”나에게“ 나타나야 합니다.
그것은 어느 시대에 살든지, 마찬가지입니다.
앞으로의 역사는 더욱 더 힘든 시대가 올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활하신 예수님의 [부활생명]이 나에게 나타나서, 내 안에 있어야 합니다.
▶어려움을 어떻게 극복해야 하나요?
부활하신 예수님의 생명이 ”내 안에 나타나“, 내 안에 있어야 합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르던 동기는 각각 다르지만, ”예수님은 메시아이고,
나의 주님이라“는 확신이 나에게 있어야 합니다. 그들의 마음속에 ”소망을 불러 일으켰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후에, 제자들은 깊은 절망에 빠져 있습니다.
제자들의 공통적인 생각은 ”예수님은 죽임 당할 사람이 아니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예수님은 의롭고, 순결하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예수님이 불법재판으로 넘겨지고,
십자가형에 처해졌을 때 엄청난 두려움에 빠지게 되었고, 그들의 귀를 의심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부활 했을 때에는 예수님의 제자들은 모두 환호성을 질렀지만,
심지어 예수님을 직접 보았던 제자들도 그 사실을 믿지 않았습니다.
▶왜, 제자들도 부활하신 사실을 믿지 않았을까요?
그것은 인간의 불신이 “그렇게 뿌리가 깊다“는 것입니다.
엠마오로 가는 길에 두 제자가 있었는데, 예수님이 가는 길에 나타나셨습니다.
엠마오로 가는 길은 약 11km나 되는 길로, 두 시간을 걸어야 가는 길인데,
예수님은 함께 걸어가면서 그들을 만나 주셨어요.
예수님은 서두르지 않고, 두 사람 사이에서 자연스럽게 대화에 끼어들었습니다.
잠시 나타났다 사라진 게 아니라, ”그 먼 길을 함께 동행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특이한 점은 오랜 시간동안 걸으면서 만났는데,
2명의 제자들은 “예수님을 전혀 알아보지 못했다“는 점입니다.
▶이 사실이 무엇을 의미하나요?
예수님이 “제자들의 삶에 동행했다“는 의미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성령 안에서 우리의 삶에도 동일하게 임재하고, 참여하는 분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처음에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어요.
우리의 인생에도 동행하시는데, 그 때 제자들은 예수님을 몰라봤어요.
누가복음 24장 16-17절을 함께 읽으십시오.
"그러나 그들은 눈이 가려져서 옆에 있는 예수를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이 그들에게 물었습니다. 당신들이 걸어가면서 서로 주고받는 이 말이 무슨 얘기인가요?
그들은 슬픈 기색으로 가던 길을 멈추어 섰습니다."(눅 24:16~17)
여기서 꼭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아직 예수를 몰라볼 때에도 "예수님은 우리에게 질문을 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왜, 몰라 봤을까요? 15-16절에 그 대답이 나옵니다.
”그들이 이야기하며 토론하고 있는데, 예수께서 가가이 가서 그들과 함께 걸어가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눈이 가려져서 예수를 알아보지 못했습니다.(눅 24:15~16)
그들의 [눈이 가려져서] “예수를 볼 수 없었다.”고 얘기합니다.
새로운 자연의 실체를 보는 것은 지식이나 과학이 아닙니다.
▶왜, 알아보지 못했을까요?
예수님을 지극히 평범한 한 사람으로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16절에서, 알아보지 못한 원인이 나옵니다.
그것은 “그들의 눈이 가려져서 알아보지 못했다”고 합니다.
우리는 “육신의 눈”으로 보아도, 그것을 보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세상의 교육은 [지식]을 더해 주기는 하지만, [영적인 실체]를 볼 수는 없습니다.
▶여기에 나오는 “눈”은 어떤 눈입니까?
요즘 말로 “세계관”이라고 할 수 있는 [눈]을 말합니다.
보여도 보는데, “세계관”이 없으면, 보아도 보이지 않습니다.
▶가려져 있는 [눈]은 어떻게 해야 열립니까?
가려진 눈은 오직 [믿음]으로 열립니다.
우리의 눈에, [영의 눈]이 열려야 볼 수 있고, [영의 실체] 볼 수 있는 것입니다.
19-24절의 말씀에서, 예수님은 능청스럽게 다시 질문합니다.
“내가 부활한 예수다”라고 얘기하면 되는데, 예수님은 모른척하고 이야기 합니다.
▶여기에 나오는 내용이 무엇입니까? 3가지 내용이 나옵니다.
①첫째, 예수님은 “능력이 있는 예언자” 이고,
②둘째, 예수님은 “십자가로 인해, 죽은 사람” 이고,
③셋째, 여인들은 “무덤이 비었다“고 말을 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죽었다“는 것은 아는데, ”예수님이 부활했다“는 사실은 모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절망했고, 슬퍼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자기들은 구원해 주는 [메시아]로 알고 있었으니까,
그가 [죽음]으로써 절망하고 슬퍼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빠진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게 뭘까요?
제자들에게 “믿음이 없다”는 것입니다.
▶왜, 제자들이 믿음이 없습니까?
예수님이 말씀하신 “내가 죽임을 당하지만, 3일 후에 살아난다.”는 사실을 믿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25~26절 말씀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의 [눈]을 열어 주셨어요.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어리석고 예언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게 믿는 사람들이요, 그리스도께서 마땅히 이런 고난을 겪고서, 자기 영광에 들어가야 한 것이 아니냐?”(눅 24:25-26)
예수님은 그들에게 너희는 정말 미련하고, 예언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더디 믿는 구나”라고 알려 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마음에 더디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보는 눈이 열리지 않았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어떻게 눈을 열어 주었습니까?
①첫째로, “예수님의 죽음이 절대로 필요하다“고 그들에게 깨닫게 만들어 주었어요.
나는 왕관을 쓰러온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너희를 구원하러 왔다”고 했고,
우리 스스로는 구원할 수 없으므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그분이 오셨습니다.
②둘째로, 예수님은 성경 전체를 풀어주심으로, 십자가와 부활의 관계를 설명해 주셨어요.
사실 교회에서 [십자가]를 강조하지만, [부활]을 강조하지 않는 것은 잘못입니다.
[십자가]와 [부활]은 서로 연결된 것입니다.
이것은 DNA가 같으면 서로 연결되어 있는 것과 같이,
마음에 더디 믿는 사람이 되면, 안 됩니다.
이들의 모습이 바로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그렇다면, 부활하신 예수님은 우리네 생활에서 항상 동행하시는 분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그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마음에 더딤이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 [눈]에 보이지 않아도,
언제나 그 분은 “우리와 함께 성령 안에 같이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날, 예수님은 제자들이 스스로 알아볼 수 있을 때 까지,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구약 성경을 통하여 설명해 주십니다.
27절 말씀을 읽으십시오. “그리고 예수께서는 모세와 모든 예언자들로부터 시작해,
성경 전체에서 자기에 관해 언급된 것을 그들에게 자세히 설명해 주셨습니다.” (눅24:27)
모세와 모든 예언자들로부터 시작하여, 자기에 관해서 모든 성경에 기록된 것을
그들에게 자세히 설명해 주었습니다. 성경 전체가 [십자가 부활]을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분을 모르고 있었으나, 언제, 알았을까요?
예수님으로부터 구약 강의를 들었으나, 그때까지 몰랐고,
집에 들어와서 식사하는 중에, 예수님을 알아보았습니다.
30~31절 말씀을 읽으십시오.
“예수께서 그들과 함께, 상에 기대어 앉아, 빵을 들고 감사 기도를 드린 후에, 떼어 그들에게 나눠주셨습니다. 그제야 그들이 눈이 열려, 예수를 알아보았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그들의 눈앞에서 사라지셨습니다.”(눅24:30~31)
예수님은 그냥 가려고 했는데, 이들이 붙잡고, “식사하자”고 합니다.
예수님이 “손님”이고, 그들이 “주인”인데, 예수님이 갑자기 이상한 행동을 합니다.
예수님은 감사 기도를 드린 후에, 떡을 떼어, 그들에게 나눠주니까,
그제야 그들의 [눈]이 열려, 제자들은 예수님을 알아보았어요.
한 순간의 체험으로 눈이 열립니다. 그러나 눈이 열리는 것은 쉽게 열리는 것이 아닙니다.
[눈]이 열리는 것은 시간이 필요합니다.
32절에서 “그들이 서로 물었습니다. 길에서 그분이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성경을 풀어 주실 때,
우리 마음이 뜨거워지지 않았느냐?”(눅 24:32)
▶이들이 왜 마음이 뜨거워 졌습니까?
그들은 잘 몰랐지만, 예수님과 식사를 하는 도중에, 마음이 뜨거워지기 시작했어요.
길에서 구약을 설명해 줄 때, 마음이 뜨거워지고, 그들의 눈이 열린 것입니다.
그들의 무지가 깨어나,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마음이 뜨거워지는 것은 [부활 생명]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언제 눈이 열립니까?
우리가 박사 학위를 받아도, 눈은 열리지 않습니다.
우리의 눈에 “보인다.”고, 다 보이는 것이 아니고,
우리의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없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육신의 눈]으로 보이지 않지만, 너무나 분명히 존재하는 하나님은 분명히 살아계십니다.
어쩌면 예배에 출석하면서도, 이걸 모르는 사람들도 많이 계실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생명 안에 들어가야” [눈]이 열리는 법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 안에 들어가야, 성령이 역사해서 “그때에 눈이 여리는 법”입니다.
눈이 가리워져 있으면 마음이 굳어지고, 강팍해 져서 [영적 실체]를 모릅니다.
오로지 [부활의 생명] 만이 눈이 열리게 만듭니다.
오늘은 2020년, 부활 주일 아침에 우리를 부릅니다.
엠마오로 가는 길은 결코 과거의 사건이 아닙니다.
그동안 수많은 부활의 증인들이 있었지만, 우리들의 마음에 [더딤]이 있어서,
마음에 느끼지 못하신 분이 계시다면, 오늘 그것을 느껴 보시기 바랍니다.
[부활]은 예수님의 죽음이후의 사건이 아니라,
일상생활 가운데에서 "우리가 부활을 느낄 수 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오늘 부활절 아침에, [부활절]은 때가 되면, 지키는 절기가 아니라,
우리의 삶속에서 “살아나야 하는 현실”이 되어야 합니다.
▶아직도 부활을 믿지 않는 분에게 꼭 필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자기 마음속에 [부활 생명]을 간직하는 일입니다.
[부활]은 “우리들의 삶속에서 체험으로 나타나야 하는 것”입니다.
아직도 눈이 닫힌 사람에게 눈이 열려지는 일이 나타나기를 바라며,
그렇게 쓰임 받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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