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에 의해 십자가에 넘겨지다, (눅15: 1~15) 말씀 이재훈 목사님
성경의 역사 속에 [빌라도]라는 이름이 나오는 것은 단지 4시간 정도 나옵니다.
그러나 그는 [사도신경]에 나오듯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게 한 대표적인 인물이 되었습니다.
물론, 군중들의 요구가 있었지만, 그 배후에 유대 지도자들의 죄가 더 큰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왜, 역사학자들은 빌라도에게만 책임을 물었을까요?
그것은 빌라도가 예수님의 죽음에 “최종 결정권자”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신경]에 다른 사람들의 이름은 다 빠지고, 빌라도의 이름이 언급된 것입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음을 맞이하는데, 핵심적인 역할을 한 사람입니다.
빌라도는 로마인이 아닌데, 로마에서 가장 높은 직책에 오른 사람입니다.
그가 그 위치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능력이 뛰어나서가 아니라, 혼인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티베리우스의 황제의 세 번째 아내인 “클라우디아의 딸과 결혼했다“는 이유로 친족이라는 배경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는 A. D 26년에 유대 총독에 올랐는데, 그 자리는 그의 성품이나 능력으로 볼 때, 너무 높은 자리였습니다.
그는 그 자리를 제대로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 그가 임기를 맡은 10년 동안 유대는 한시도 조용할 날이 없었을 정도였습니다.
잘못된 리더십이 세워지면, 공동체나 국가는 시끄럽기 마련입니다.
빌라도의 성품은 잔인하고 지배적이고 독선적이었습니다. 그는 상대방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역사가들은 ”그는 처세술에 매우 뛰어난 사람이었다.”고 평가합니다.
[엘리코트]라는 사람은 “빌라도는 철저하고, 완벽하며 처세술에 능하며, 약삭 빠르며 세속적인 사람입니다.
빌라도는 불법적이면서도 비겁했으며. 무엇이 옳은지를 알면서도 의심 없는 행동을 서슴없이 행하는
인물입니다.”라고 평가했습니다.
빌라도는 유대지도자들이 예수님을 합당하지 않은 죄목으로 고소한 것을 알았지만,
그들의 뜻에 끌려 다녔습니다.
빌라도는 유대지도자들의 시기에 의해, 예수를 죽이려는 음모를 미리 알고 있었습니다.
산헤드린공의회는 “힘으로는 죽일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종교적인 죄목[=신성 모독죄]을 씌우고,
거기에다 [성전 모독죄]를 더하여 예수님을 구속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로마 법정에 세울 때는 다른 죄목으로 넘깁니다.
그것은 정책적인 이슈로, [내란 음모죄]와 [내란 선동죄]로 엮은 것입니다.
마가복음 15장 1절 말씀을 함께 읽으십시오.
“새벽이 되자 곧 대제사장들은 장로들과 율법학자들과 온 공회원들과 함께 회의를 소집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예수를 끌고 가서 빌라도에게 넘겨주었습니다.”(막15:1)
그는 평소에는 새벽에 출근 하지 않았는데, 그날은 이미 새벽에 관저에 나와 있었으며,
이른 새벽에 밖으로 나와서 심문을 했습니다.
여기서 “빌라도가 이른 아침에 밖으로 까지 나와서, ”이 문제를 처리하였다”는 것은 간밤에 유대지도자들과
이미 “어떤 정치적인 거래가 있었다“는 것을 증명해 주고 있으며, “사전에 서로 모의가 있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2절 말씀을 읽으십시오. “빌라도가 물었습니다. 네가 유대 사람의 왕이냐?”
예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그렇다. 네가 말한 대로다.“(막15:2)
▶그들이 예수님을 고소한 내용은 세 가지입니다.
①첫째, 군중을 선동해 “반란을 일으키려고 했다“는 것. [내란 음모 죄], [반란 죄]
②둘째, 로마 황제에게 “세금을 내지 말라“고 선동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거짓말입니다.
③셋째, 자신이 왕이라고 칭하며, 자칭 ”유대 사람의 왕“이라고 [사칭한 죄]
예수님은 군중을 선동하지 않았고, 반란을 일으키지도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죄목은 십자가형에 넘겨지도록 죄를 만들어 씌운 것입니다.
마가복음에 보면, 예수님이 내란을 음모한 것으로, 정치적인 왕인 것처럼 보일지 몰라도,
요한복음을 보면, 마가복음보다 더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2절에 나오는 ”유대 사람의 왕이냐?“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죄목입니다.
마가복음과 요한복음을 대조해보면, 마가복음에는 예수님이 고소한 내용을 인정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요한복음 전체를 보면, 예수님은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진리의 왕]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에 대해서 호의적이었기 때문에, 예수님을 풀어주려고 노력을 했습니다.
그러나 결국 그의 결정으로 예수님은 십자가형을 선고받았습니다.
[가톨릭]에서는 사도신경을 “본디오 빌라도 통치하에 고난을 받으시고“라고 번역했지만,
[개신교]에서는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라고 번역했습니다.
이것은 빌라도만 “예수님에게 고난을 주었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예수님을 죽게 만든 사람들의 죄를 대표하는 인물이 [빌라도]라는 것을 언급한 것입니다.
▶왜, 빌라도가 악인이 되었나요?
(1) 첫째로, 빌라도는 “유대 지도자들이 시기심 때문에“ 예수님을 자신에게 넘긴 것을 알았습니다.
그런 [음모]를 알면서도, 빌라도가 유대 지도자들을 따라갔기 때문입니다.
빌라도는 유대 지도자들의 [악한 마음]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마음에 시기심이 가득하다”는 것도 알았지만, 묵인했습니다.
상급자가 악을 행하는 것을 묵인하는 것은 악에 동조하는 것이기 때문에, 동일한 악을 행하는 것입니다.
(2) 둘째로, 빌라도는 예수님이 [무죄]라는 것을 알면서도 “십자가형에 넘겼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기 죄를 변명하지 않았지만, 빌라도는 모두 다 알고 있었습니다.
빌라도는 억울한 죄목으로 끌려 온 예수님이 적극적으로 변호하지 것을 보면서, 이상하게 생각했습니다.
빌라도는 아마 수많은 죄인들을 만났을 것입니다. 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죄가 없다“고 변명하는 죄인들도 만났을 것이고, 실제 죄가 없기 때문에 억울하다고 항변하는 사람들도 만났을 것입니다.
누구든지 빌라도 앞에서 자신을 변호하기 위해 애쓰는 사람들에게 익숙해졌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말씀이 없으셨습니다. 마치 죽기로 작정한 사람처럼 말입니다.
그러니까 이상하게 여길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3)셋째로, 빌라도는 군중들의 비위를 맞추려고, ”바라바를 풀어주라“고 결정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입성할 때에는 호산나를 부르던 군중들이,
거짓 선동에 넘어가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칩니다.
군중들은 소리를 지르다가 마지막에는 유월절에 죄인을 풀어 주는 제도를 이용해서,
빌라도는 예수님을 풀어주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당시에 폭동을 일으켰던 [바라바]라는 죄인과 예수님을 함께 세웠습니다.
빌라도가 생각하기에는 “당연히 예수님을 풀어주라“고 생각하고,
바라바가 십자가형을 선고받을 것이라고 생각했으나,
그런데 군중들은 예수님을 향해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라고 외쳤습니다.
“그래서 빌라도는 군중들의 비위를 맞추려고, 바라바를 풀어 주었습니다.
빌라도는 예수를 채찍질한 다음 십자가에 못 박도록 넘겨주었습니다.“(막15:15)
아마 대제사장들도 얼굴을 가리고, 군중들의 틈에 서서, 소리를 질렀을 것입니다.
빌라도는 깜짝 놀랐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이 죄가 없다는 것을 확신했더라면,
어떠한 압력에도 불구하고 석방을 했어야 했는데, 그는 양심의 소리를 외면했습니다.
여러분, 이렇게 악에 이끌려 가는 지도자들이 세워서는 안 됩니다.
이 시대 지도자들은 악에 이끌리고, 상황에 이끌리는 사람이 아니라,
양심의 소리에 순종할 수 있어야합니다. 이것이 선거를 맞이하는 그리스도인들의 자세입니다.
빌라도는 가장 중요한 소리를 외면했기 때문에, 역사의 [중죄인]이 되었습니다.
”대중의 소리가 높다“고 반드시 옳은 것은 아닙니다.
특히 요즘에는 [포플리즘]이 대세이듯이, [빌라도]도 대중에 의해 끌려 다닙니다.
국가의 미래를 걱정하는 것이 아니고, 군중의 비위를 맞추는 모습이 너무나도 어리석어 보입니다.
그런 [악한 지도자]는 백성들의 판단력을 흐리게 만듭니다.
[바나바]와 [예수님]을 “같이 평가한다”는 것은 말도 되지 않는 [외침]입니다.
역사의 미래가 어두운 것은 선동에 넘어가서 잘못된 결정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나라도 지도자를 뽑아야 하는데, 군중의 비위를 맞추는 사람은 곤란합니다.
내가 원하는 것을 해 주는 지도자보다도, 나라와 미래를 준비하는 지도자를 뽑아야 합니다.
▶왜, 빌라도는 군중에 끌려 다녔을까요?
그것은 빌라도 자신의 정치적인 입지 때문입니다.
빌라도는 이미 너무 많은 실수를 했기 때문에 대중을 두려워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동안 빌라도가 사고를 많이 쳤으니까, 민심을 잃었어요.
한 번 만 더 폭동이 일어나면 해임될 위기에 처해 있으니까, 그런 잘못된 결정을 내린 것입니다.
빌라도는 정치적인 입지에 따라 자신의 실정을 가리려고 했고,
유대 지도자들은 자기네 이익을 위해 빌라도를 압박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군중들의 어리석음이 우리 안에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분별력이 회복되어야 합니다.
그런 악에 의해 예수님은 십자가에 돌아가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죄의 실체를 분명히 깨닫고,
나라와 만족의 앞날을 위해, 빌라도와 같은 지도자가 세워지지 않도록 함께 싸워야 합니다.
빌라도의 죄가 우리 안에 있습니다.
우리도 어리석은 군중이 되지 않기 위해, 정의롭게 판단하고, 올바르게 행동해야 합니다.
오늘 말씀의 결론입니다.
①우리는 양심의 소리를 따를 것인가?, 아니면 비겁한 소리를 따를 것입니까?
②하나님의 뜻을 추구할 것인가?, 아니면 개인적인 야망을 추구할 것입니까?
③선을 선택할 것인가?, 아니면 일시적이고 세상적인 성공을 위해 타협할 것입니까?
바로 이러한 선택의 기로에서 [양심의 소리]를 외면하고, 불의를 선택한 것은 우리들 입니다.
바로 우리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고난주간을 보내면서, 우리 안에 있는 [빌라도의 모습]을 드러내고, 회개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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