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전을 정결케 하시다. (막11:12~25) 말씀: 이재훈 목사님
예수님이 유월절에 예루살렘으로 들어 가셨습니다.
예수님은 유대지도자들에게 넘겨지고 넘겨져서, 하나님의 구원에 이르도록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루살렘의 마지막 여정에는 ”넘겨지고, 넘겨지다“는 단어에 주목해야 합니다.
예루살렘에 입성한 예수님은 수많은 사람들에 의해, 계속 넘겨지게 됩니다.
①처음에는 유대 지도자들에 의해, 모함으로 넘겨지고,
②악한 의도를 가진 빌라도 총독의 군병들에게 넘겨졌고,
③그 과정의 끝에는 십자가에 못 박히게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도착하여 성전을 둘러보며 첫 번째 행하신 모습입니다.
▶그것은 무엇입니까? 성전을 정결하게 하신 사건입니다.
거룩해야 할 성전이 [강도의 소굴]이 되신 것을 보면서, 분노를 느끼며 화를 내신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타락한 시대에는 두 가지 현상이 나타납니다.
①첫째는, 권력을 종교화했습니다.
권력을 종교화 하는 것은 독재자들이 시도하는 행위입니다.
권력자들은 자신의 권력을 종교로 만들기 위해, 자신의 권력이 영원할 것처럼 포장하지만,
“권력을 종교화 한다”고 해서 살아남은 권력은 하나도 없습니다.
②둘째는, 종교를 권력화 했습니다. 이 모습은 종교개혁 이전의 중세교회가 그랬습니다.
종교가 종교의 기능과 목적을 잃어버리면, 종교는 권력을 지향하게 됩니다.
마틴 루터는 종교개혁이 일어나기 전에 교황에게 서한을 보내, 권력화 된 로마교회의 부패를 지적했고,
그것은 어느 때부터 종교는 방탕하고, 수치스러운 사망의 왕국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두 가지 사건이 일어나는데, 그 두 가지 사건은 서로 연결되어 있어서,
당시의 크리스천들의 영적 상태를 잘 이야기해 주고 있습니다.
이런 모습이 예루살렘 성전에도 나타났기 때문에 진노하고, 뒤엎으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실 때, 유대교회는 종교개혁 이전의 로마교회와 같았습니다.
마가복음 11장 12-13절 말씀을 읽으십시오.
“이튿날 베다니를 떠나시려는데, 예수께서 배가 고프셨습니다.
예수께서 멀리 잎이 무성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는 열매가 있을까 해서 가 보셨습니다.
가까이 다가가 보시니 잎만 무성할 뿐, 무화과 열매는 없었습니다.
무화과 철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막 11:12~13절).
이 사건은 신약에서 가장 해석하기 어려운 부분이라고 생각됩니다.
예수님은 무화과나무의 열매를 기대하셨는데 열매가 없는 것을 보고, 무화과나무를 저주했습니다.
예수님이 저주를 한 것도 이상하지만, 그 저주의 대상이 식물인 것도 놀라운 일입니다.
그러니까 이 사건은 예수님의 선하신 성품과 어울리지 않습니다.
또 20-21절 말씀을 을 읽어 보면,
“이튿날 아침, 예수와 제자들이 지나가다 뿌리째 말라 버린 무화과나무를 보았습니다.
베드로는 생각이 나서 예수께 말했습니다. ‘선생님, 보십시오.
저주하셨던 무화과나무가 말라 버렸습니다.’(20~21절).
지금까지 예수님은 기적을 통해 사람을 살리셨는데,
오늘 본문에서는 무화과나무를 뿌리째 말라 죽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파괴적인 기적을 행하신 것은 이번이 처음입니다.
▶왜, 예수님이 그렇게 저주까지 했을까요?
유명한 무신론자인 버트란트 러셀이 “온 세상의 구세주인가?”라는 책에서도 비난했지만,
참새 한 마리도 귀하게 여기시고, 들풀도 정성껏 키우시던 하나님의 아들이 성품이 지나치게 과격해졌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여기서 저는 두 가지 의문이 드는 부분이 있습니다.
①첫째, 예수님이 그때에 배가 고프셨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 때문에 예수님이 아침을 드시지 않고, 길을 나서서 무척 배가 고팠는데,
무화과나무에 열매가 없는 것을 보고 “화가 나서 저주했다“라고 오해를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②의문이 드는 두 번째 단어는 “무화과 철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무화과가 익을 철이 아닌데, 예수님이 무화과나무의 열매를 기대한 것은 상식이 없거나,
불합리한 판단이라는 것입니다.
슈바이처는 이 본문을 보면서 예수님이 죽음을 앞두고 극도의 긴장상태에 있었으니까,
순간에 이성을 잃었을 것이라고 해석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모든 것이 오해입니다.
▶그런 오해를 풀기 위해서는 무화과나무가 ”어떻게 열매를 맺는 지?“에 대해서 알아야합니다.
무화과나무는 4월에서 10월까지 5번 열매를 맺게 되는데,
제일 첫 번째로 열리는 열매는 [빠개]라고 하는데, 당도도 없고, 상품성이 없습니다.
그래서 [빠개]가 열리지 않는 것은 진짜 열매도 맺어지지 않을 것에 대한 염려가 생깁니다. 그
래서 성전에서 진노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기대한 열매는 [첫 열매]입니다.
[첫 열매]는 비록 상품가치는 없지만, 누구나 따 먹을 수 있기 때문에,
배고픔을 해결해 줄 수 있고, 또한 첫 열매가 열려야, 다섯 번째까지 열매가 열리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무화과나무에게서 본 것과 같이, 당시 성전에서 본 것은 ”잎만 무성한 모습“입니다.
이것은 [거짓 종교]의 모습입니다.
[거짓 종교]는 의미를 잃어버린 종교의 모습입니다.
열매 없는 종교 일수록, 겉은 화려합니다. 그러나 열매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기대하는 것은 [열매]이지, [잎]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기대하는 열매는 우리가 예수님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한 나무가 뿌리부터 마르게 하셨을까요?
예수님의 이런 행동은 어떤 충격적인 메시지를 주기 위한 것입니다.
이것은 [권력화]하여 변형된 유대 교회에게 어떤 교훈을 주기위한 것입니다.
진정한 [생명]을 잃어버린 영적 공동체에게는 <뿌리부터 말라 버리게 하신>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동일한 교훈을 주기위해서 사람을 먼저 저주하지 않고, 나무를 저주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대한 것은 무엇입니까?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 맺는 것과 같이, "우리 인생의 삶속에도 열매를 맺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신앙의 목표는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참된 종교]는 언제나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그러나 [거짓 종교]는 열매는 없고, 잎만 무성합니다.
예수님이 기대하는 것은 “열매가 맺히지 않는 나무는 아무 쓸모없는 나무”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택한 백성인데, 열매 없는 민족이 되는 것이 안타까워하는 것입니다.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하여, [텅 빈 예배당]을 보며, 같은 생각을 합니다.
뿌리가 마른 나무는 [생명]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기도가 없는 영적공동체는 뿌리부터 마릅니다.
잎이 무성해서 살아있는 것 같지만, 영적인 근원이 말라 버린 것은 공동체의 타락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이 무화과나무를 통해 가르쳐주시는 교훈은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기대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기 위해,
무화과나무를 선택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듯이, 우리의 인생도 철을 따라 열매 맺기를 기대하고 계십니다.
[신앙]의 목표는 ”열매“입니다. 하나님은 열매 맺기를 기대하고 계십니다.
[참된 종교]는 언제나 열매가 맺힙니다. 그러나 거짓된 종교는 잎만 무성할 뿐 열매가 없습니다.
[신앙의 본질]은 뿌리가 하나님과 연결되어 풍성한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열매]를 통해, 신앙을 설명한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 안에 거했더니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고 용서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참된 신앙]입니다.
그러나 [참된 신앙]은 단순합니다. 그저 예수님을 닮아 가면 됩니다.
예수님을 통해 우리가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고,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그와 함께 살아가면 됩니다.
15-16절 말씀을 읽으십시오.
“예루살렘에 도착하시자마자 예수께서 성전으로 들어가 거기서 장사하던 사람들을 내쫓기 시작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돈 바꿔 주는 사람들의 상과 비둘기를 파는 사람들의 의자를 둘러엎으셨습니다.
그리고 어느 누구라도 장사할 물건들을 들고 성전 안으로 지나다니지 못하게 하셨습니다(15~16절).
이 모습은 [예수님의 모습]이라고 여기기 어려운 모습입니다.
요한복음의 기록을 보더라도 성전에서 양과 소를 파는 모습을 보고, 사람들을 내쫓고 장사하는
사람들의 의자를 엎으시는 모습은 우리가 생각하는 예수님의 모습과는 많이 다르게 느껴집니다.
성전 안에서 벌어지고 있는 모습은 두 가지입니다.
①첫째로, 제물을 사고파는 행위뿐만 아니라,
②둘째로, 환전하는 행위입니다. 당시에는 성전에서만 받는 화폐로 바꿔야만 했는데,
환전수수료를 부풀려 엄청난 폭리를 취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성전에 들어가셔서 상징적으로 그것을 뒤집어 엎으셨습니다.
예수님의 지적은 열매가 맺히지 않는 무화과나무처럼, 참된 기도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17절 말씀에서, “그리고 예수께서 사람들을 가르치시며 말씀하셨습니다.
‘내 집은 모든 민족들이 기도하는 집’이라 불릴 것이다.’ 라고 성경에 기록돼 있지 않았느냐?
그런데 너희는 이곳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고 말았다”(17절).
예수님이 분노한 이유는 바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장소가 [맘몬 신]을 섬기는 장소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기도하는 집이 강도의 소굴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도 어느 순간 [강도의 신앙]이 될지 모릅니다.
[참된 신앙]을 잃어버리면, 어느 순간에 강도의 신앙으로 될지 모릅니다.
성전에는 [참된 회계]를 통해서, [참된 기도]가 나타나야 하는데,
신성한 성전에 종교로 포장된 [강도들의 소굴]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이용한 세속화가 되었고, 이념화된 종교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기도]가 무엇입니까?
[기도]는 내 뜻을 고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맞추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나의 삶”을 통해서 이뤄지는 것이 [기도]입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이어 주고 있는 연결 줄이 [기도]입니다.
기도와 예배를 잃어버리게 되면, 어느 순간에 강도의 소굴이 됩니다.
대제사장과 율법학자들은 회개하지 않고, 예수님을 죽일 방법을 찾고 있습니다.
18절 말씀에서 “이 말을 듣고 난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은 예수를 죽일 방도를 궁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모든 사람들이 예수의 가르치심에 놀라는 것을 보고 예수를 두려워했던 것입니다”(막 11:18).
그들은 어느 누구보다도 예수님이 행하신 일을 보면서 예수님이 누구인지 알았어야 하는데,
그런데 그들은 예수님을 죽이고자 했습니다. 그들은 기도를 잃어버린 강도였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기도하는 사람이었다면, 예수님을 그렇게 대우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들은 강도가 되어 버렸기에, 예수님을 죽일 방법을 찾았습니다.
▶왜 예수님은 그런 과격한 행동을 하셨을까요?
성전 안에는 사람들이 제물이 필요로 하니까, 거기에서 제물을 파는 사람들인데, 집에서 가져온 온전한 제물은 제물로 인정하지 않고, 그 곳에서 파는 물건만 제물로 인정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그 당시 권력자인 가야바의 실속을 채우기 위한 전략입니다.
사람들의 편의를 위해서 엄청난 이득을 챙기는 가야바의 속셈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런 사람들을 가리켜 [강도]라고 하였고, 성전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었기 때문에,
예수님이 화를 내신 것입니다.
또 돈을 바꾸어 주는 환전상들은 환전수수료를 받고, 20배 이상의 폭리를 취하는 모습을 보고,
예수님은 상징적인 행동으로 상을 뒤집어엎으신 것입니다.
▶[강도의 신앙]은 무엇입니까?
자기가 하나님의 뜻에 맞추지 않고, 자기가 원하는 탐욕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포장해서
요구하는 것이 [강도신앙]입니다. 원하는 탐욕으로 이끌어 내는 사람이 [강도신앙]을 가진 사람입니다.
바로 오늘의 본문에 나오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여러분, [기도]는 프로그램이 아닙니다. [기도]는 비전을 이루는 도구도 아닙니다.
[기도]는 그 자체가 신앙의 목적이 되어야 합니다.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확인하고,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나의 삶을 거기에 맞추어 가는 것이 [참다운 신앙인]입니다.
그러니까 기도가 바로 하나님과 연결되는 뿌리가 되어야 합니다.
[참된 기도]를 드려야 열매가 맺힙니다.
[참된 기도]를 잃어버리면, 예수 믿는 감동도 종교생활 속에 빠지는 것입니다.
[참된 기도]를 드려야 열매 맺히는 것입니다.
기도하는 신앙이 되지 않으면, 어느 한 순간에 [강도]로 변하게 됩니다.
교회가 기도를 잃어버리면 권력화 되고, “우리도 [강도]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 온누리교회도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와 같은 교회가 되지 않기 위해, 회계하지 않으면,
우리도 강도와 같은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꾸준히 회계하고, 잎만 무성한 무화과나무가 되지 않도록,
거룩한 은혜 앞으로 언제나 나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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