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려진 돌이 머릿돌이 모퉁이 돌이 되다 (막12:1~12) 말씀: 이재훈 목사님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신 예수님의 행동은 매우 당혹스런 행동을 하십니다.
예수님은 악에 익숙한 유대지도자들에게 하나님의 진리를 드러내는 행동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은 예수님을 죽이려고 음모를 꾸미고 있었습니다.
유월절을 지키려는 예수님을 죽이려고,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고 있었어요.
예수님은 그 음모를 미리 짐작하고 알았으나, 겉으로 내색하지 않았어요.
예수님은 의도적으로 죽음을 자초한 것은 아니지만, 모든 것은 악이 선을 공격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악으로 대하지 않고, 선으로 대했습니다.
그러니까 이런 상황은 [인간]의 “가장 악한 모습“과 [예수님]의 “가장 선한 모습”이 대비되는 상황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예수님의 비유]는 예수님을 죽이려는 “인간의 악독함”을 보여주는 내용입니다.
여기에는 질투와 폭력, 그리고 음모와 살인이 나오는데, 유대지도자들의 악함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권세에 대해 질문했어요. “누구의 권세를 가지고 그렇게 행동 하였느냐?”
한 마디로 “뭘 믿고, 그런 행동을 하느냐?”는 말인데,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주신 권세를 가지고, 행동한다.”고 자신 있게 대답합니다.
▶오늘 말씀하신 예수님의 [비유]는 무엇을 암시해 줍니까?
①첫째는, 인류의 역사를 요약한 것이고,
②둘째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비유하는 내용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악한 포도원 농부”라고 일컬어지는 비유입니다.
1절 말씀을 함께 읽으십시오. “예수께서 그들에게 비유를 들어 말씀하기 시작하셨습니다.
어떤 사람이 포도원을 하나 만들어 울타리를 치고 땅을 파서 포도즙 짜는 틀 자리를 만들고 망대를 세웠다.
그러고는 어떤 농부들에게 포도원을 세주고 멀리 떠났습니다”(막12:1)
▶1절 말씀에서, “예수님이 그들에게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다”고 했는데, 그들은 누구일까요?
그들은 바로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 그리고 장로들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보내면서까지 인내하고 사랑하셨습니다.
그 사랑가운데 우리가 살고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내와 사랑을 배우고 실천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하신 비유는 [슬픈 비유]입니다.
▶왜냐하면? 배신과 폭력, 심지어 살인까지 이야기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자연]을 소재로 비유를 하시면, 대체로 긍정적인 내용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람을 중심으로 비유를 하신 경우에는 대부분 부정적인 내용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인간의 마음속에 있는 [죄]가 그대로 나타나기 때문일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포도원 주인의 태도”가 이해되지 않습니다.
자신이 보낸 종들이 계속해서 희생을 당함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종을 보냈기 때문입니다.
상식적으로 첫 번째로 보낸 종이 빈손으로 돌아왔을 때, 곧장 조치를 했어야 했습니다.
[악한 농부]들을 빨리 처벌해서 포도원의 주인이 누구인지 깨닫게 하는 것이 정의인데,
그런데 이 [포도원 주인]은 자신의 종들이 계속해서 희생당하는데도 종들을 보내고 또 보냈습니다.
▶이 [비유]에 나타난 [포도원의 주인]은 어떻습니까?
[포도원 주인]은 너무도 힘이 없고, 연약해 보입니다. 한편으로 어리석어 보이기도 하고,
심지어 패배자처럼 보입니다. 보내지 않아도 될 종들까지 위험한 곳에 보낸 이유가 무엇일까요?
[포도원 주인]은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아들까지 희생을 당하고 나서야 [악한 농부]들을 심판했습니다.
이 [비유]에서 나오는 [포도원 주인]은 “[하나님]을 나타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포도원 주인]의 이해할 수 없는 대응은 바로 악한 세상과 악한 사람들을
사랑하고 인내하는 ”하나님의 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왜, 농부들은 주인에게 악하게 행동했을까요?
표면적으로는 포도원을 차지하려고 욕심을 부리지만, 농부들은 포도원의 소유권을 인정하지 않고,
자기들 것으로 오해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람들은 참 여러 종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얼마 전에 ”CGN TV에 기부하겠다“는 분이 있었어요.
만나보니, 그런데 좀 이상했어요. 그분이 주신 정보를 가지고 알아보았더니, 사실과 달랐어요.
허황된 생각에 사로잡혀 사는 망상을 얘기하는 사람이었어요.
오늘 비유의 말씀과 같이, 자기 것이 아닌데, 자기 것이라고 착각하는 사람이지요.
하나님의 소유를 자기 것으로 착각하고, 확신함으로 이런 상황을 연출하는 것이지요.
[어거스틴]은 ”악은 선에 기생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고 해요.
거짓말을 하는 사람도 남이 나를 믿게 하려면 처음에는 진실을 말하듯이,
”나를 믿게 하고, 그 다음에 서서히 사기를 친다.”고 합니다.
▶[포도원 주인]은 농부들에게 요구하는 것이 뭘까요?
①첫째로, 주인의 주인 됨을 인정하고,
②둘째로, 주인이 베풀어 준 은혜에 대한 감사하는 마음인데,
그런데 농부들은 그 본심을 외곡하고 착각하여 난동을 부린 거예요.
인간은 착한 [청지기의 역할]을 포기하면, 탐욕에 빠지게 됩니다.
사람이 욕심을 부리면, 점점 더 욕심이 많아지고, 그러다가 탐욕에 빠지면 빠질수록
더욱 더 많은 탐욕에 빠지게 됩니다.
▶탐욕의 5가지 단계는 무엇일까요?
①첫 단계는 필요 이상을 소유하려는 욕망이겠지만,
②두 번째 단계는 소유와 탐욕을 동일시하는 단계이고,
③세 번째 단계는 소유한 것에 의해 자신이 소유 당하게 되고,
④네 번째 단계는 다른 사람의 소유도 인정하지 않으려고 하고,
⑤다섯 번째 단계는 다른 사람의 소유를 자신의 소유로 만들려고 하게 됩니다.
인간은 만물의 대리인으로 우리에게 맡겨진 [청지기의 의무]를 다하여,
인간은 인간다운 인간이 되어 도덕적인 판단력과 책임감을 가져야 합니다.
사람들이 싸우는 것은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판단력을 잃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책임감은 어디에서 옵니까?
책임을 맡기신 분이 있기에 책임감을 느끼는 법인데, 사람들은 그걸 거부하고,
“자기 스스로가 주인이라”고 우기니까, 그렇게 판단력이 무너지는 거예요.
그러다가 시간이 지나가면 [주인]을 공격하고,
주인의 사랑하는 아들까지 죽이게 되는 지경까지 이르게 됩니다.
(2) 두 번째로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포도원의 주인]의 태도입니다.
여기에 나오는 [포도원 주인]은 어리석어 보이고, 패배자로 보입니다.
주인은 게속해서 종들이 희생을 당하는데도 게속 종들을 보냅니다.
심지어 보내지 않아도 되는 아들까지 보냈으니, 아들마저도 죽임을 당하고 나서야,
그때서야 정신을 차리고, 농부들을 심판합니다.
[주인의 인내]는 참으로 깊은 인내입니다.
그 주인이 하나님이라면, 모든 것을 견디시는 하나님입니다.
인간이 악을 행하는 것은 [하나님의 인내]를 이용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내하시니까, 하나님은 끝까지 참으시고, 사람들은 그 인내를 이용하여
더욱 악한 행동을 계속하게 됩니다.
▶농부들이 계속 악하게 행동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주인이 오래 참고, 기다리는, [하나님의 마음]을 가졌기 때문이지요.
예수님은 패배자인 것처럼, 계속해서 끌려 다니고, 패배자가 되어 죽임을 당했어요.
이것은 사탄이 승리자가 된 것처럼 보이지만, 이 [비유]는 여기서 끝나지 않고,
더 이상 인내 할 수 없는 상황이 됩니다.
이게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여기서 [주인의 인내]가 이해되지 않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보복을 법칙처럼 생각하는데 익숙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모두 정의를 추구합니다. 그러나 사랑이 없는 정의인 경우가 더 많습니다.
정의의 관점에서 보면, 이 주인은 정의를 행할 줄 모르는 사람입니다.
우리 사회는 자신에게 조금이라도 손해를 끼치는 사람을 인내하지 못합니다.
예를 들어 이웃집에서 큰소리가 들리면, 곧장 항의를 합니다.
자신의 차 앞에 다른 차가 갑자기 끼어들지 못하게 하고, 마음속에 분노가 일어납니다.
▶[인내]란 무엇입니까? [인내]는 정의보다 [사랑]이 앞설 때 가능합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입니까? 하나님은 항상 [정의]보다 [사랑]을 앞세우십니다.
우리들이 오늘 본문에 나오는 [악한 농부]일 수 있습니다.
전도서 8장 11절 말씀에, “악한 일에 대해 판결이 빠르게 집행되지 않으면,
사람들은 악한 짓을 저지르려는 마음으로 가득 차게 된다.”(전8:11)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이 악을 담대하게 행할 수 있는 이유는 악한 일에 징벌이 속히 실행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인내하시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 인내를 이용해서 악을 행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공의롭지가 않아서도, 심판할 수 있는 능력이 없어서도 아니고,
하나님이 인내하고 있기 때문에 심판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하나님의 인내를 악용해서 끝임 없이 악을 행하고 있습니다.
그래도 하나님은 여전히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인내를 악용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 앞에 솔직해야 합니다.
악한 농부들은 자신들이 하고 싶은 대로 행동을 했지만, 주인은 그들에게 인내합니다.
[악한 농부]들이 주인의 아들까지 죽였을 때, 주인은 무력하고 패배한 것처럼 보였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었을 때, 온 세상의 권세를 가진 하나님이 패배한 것처럼 보였습니다.
가정에서 다툼이 일어나면, 누가 항상 집니까?
사랑이 많은 사람이 집니다. 사랑이 충만하고, 은혜 받은 사람이 지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 많으신 분이기 때문에, 스스로 패배자가 되신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죽으면서 역사의 주인이신 하나님이 패하고,
악한 인간들이 승리해서 악한 인간들이 역사의 주권을 차지한 것처럼 보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포도원을 맡은 농부는 주인을 모욕했습니다.
우연한 모욕이 아니라, 계획적인 모욕입니다.
모욕을 넘어서 배신하고, 도둑질하고, 악하게 반역하고, 심지어 주인의 아들까지 죽였습니다.
주인의 넒은 마음을 당연하게 생각하고 악용했습니다.
농부들은 주인이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못할 것으로 생각하고 계속해서 그를 모욕했습니다.
그들은 주인의 인내를 이용해서 자신들이 주인이 되려고 했습니다.
그들은 모든 것을 [자신의 소유]라고 주장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십자가는 하나님의 권위에 대한 최고의 모욕입니다.
악한 사람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죽임으로 만물의 주인이 되려고 했던 것입니다.
따라서 십자가는 그동안 역사적으로 하나님을 모욕하고 배신했던 인간들이 하나님께 보인 최고의 모욕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인내도 이제 한계점에 도달했습니다.
하나님 입장에서 보면, 십자가를 통해 최고의 사랑을 다 주셨기 때문에, 더 이상의 사랑은 없습니다.
이것이 사랑의 한계이며, 인내의 한계입니다. 더 이상의 인내를 요구할 수 없는 것이 [십자가의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를 거부한다면, 이제는 공의로운 심판밖에 남아 있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 않은 사람에게는 심판이 기다리고 있을 뿐입니다.
예수님께 “누구의 권세를 가지고 이런 일을 하느냐”고 질문하는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은
분명히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알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죽였습니다. 주인의 아들을 죽인 악한 농부들의 모습과 같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아들의 죽음이 끝이 아닙니다.
[십자가 사건]으로 모든 것이 끝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오늘 [비유]는 슬픈 비유가 아닙니다.
마지막으로 12장 10절의 말씀을 읽으십시오.
“너희는 성경에서 이런 말씀을 읽어 보지 못했느냐? ‘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됐다.”(막2:10~11)
여기서 [포도원] 이야기에서 갑자기 [돌] 이야기가 나옵니다.
[버려진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어요.
시편 118편은 다윗이 자신의 상황을 비유해서 고백한 내용입니다.
그는 도망자에서 왕이 되고, 버려진 사람에서 가장 필요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건축업자가 [버린 돌]에서 집 모퉁이의 [머릿 돌]이 되게 하는 말씀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했지만, 하나님이 [버려진 돌]을 사용하셔서,
아주 꼭 필요한 [모퉁이 돌]이 되게 하셨습니다.
간혹 학자들은 [돌]과 [아들]의 발음에도 “연관이 있지 않겠느냐?”고 주장하고 있지만,
더 중요한 것은 유대인들은 유월절이 되면, “시편 118편을 암송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전통이 언제부터 생겼는지는 모르지만, 그들은 유월절이 되면 [시편]을 암송했습니다.
그러니까 “[버려진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다“는 것이 십자가와 부활의 사건을 가장 잘 표현해 줍니다.
예수님은 [버려진 돌]이 아니라, 실제로는 [살아있는 머릿돌](리빙 스톤)이 되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 [산돌]이 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임 당하심으로 버려진 돌처럼 버려졌지만,
하나님은 예수님을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의 머리로 세우셨습니다. 이것은 [위대한 역전극]입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를 통해, 당시 유대 지도자들에게 자신을 정확하게 소개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종이 아닌,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단 하나뿐인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입니다.
유대지도자들이 배척하고 죽이려는 사람은 바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입니다.
[십자가]는 우발적인 사건이 아닙니다. [십자가]는 계획된 사건입니다.
[종]이 누군가에 의해 죽임을 당해도 분노가 일어날 것인데,
사랑하는 아들이 죽임을 당하는 것을 생각해 보면, 여러분은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탐욕]에 치우친 농부들을 용서하시고,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는 농부가 아니고,
우리들이 [착한 청지기]가 되어, 하나님만 섬기며 살게 하옵소서.
'주일 말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악에 의해 십자가에 넘겨지다, (눅15: 1~15) (0) | 2020.04.10 |
---|---|
성전을 정결케 하시다. (막11:12~25) (0) | 2020.04.09 |
전염병의 시험을 어떻게 이길 것인가? (마4:1~11) 2020.04.05 (0) | 2020.04.05 |
주의 날을 어떻게 지키나? (느8:9~12) 2020.03.29 (0) | 2020.03.29 |
하나님의 마음 (룻4:13-17) 2020.03.22 (0) | 2020.03.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