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날을 어떻게 지키나? (느8:9~12) 말씀: 이재훈 목사님
우리는 요즘에 한 달 가까이 전염병으로 어려운 재난의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과정을 통해서 교회가 바로 서고, 복음에 합당한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오늘은 “주의 날을 어떻게 지키나?“를 나누어 보려고 합니다.
우리는 일주일 단위로 [주의 날]을 지킵니다.
그것은 십계명의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는 4계명에 의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6일간 만물을 창조하시고, ”7일 째에 안식하며 거룩히 지키라”고 하셨습니다.
[안식일]을 지키는 일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일이고,
”하나님의 능력을 받고, 살아 간다.”는 것을 고백하는 일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6일 동안 [노동]을 하고, 하루를 [안식]하며 온전히 바쳤습니다.
그렇게 따르므로 나머지 6일도 하나님의 시간으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안식 후 첫날”을 [주의 날]로 지켰어요.
6일 동안의 노동[= 일]과 하루의 안식[= 쉼]이 하나님의 율법으로 받아 드렸어요.
요한계시록 1장 10절 말쓰에, “나는 주의 날에 성령께 사로 잡혀 있었는데,
내 뒤에서 울리는 나팔소리 같은 큰 음성을 들었습니다.”(계1:10)
여기에 [주의 날]이 나오는데, 사도행전에는 “안식 후 첫날”이 나옵니다.
요한은 [주님의 날]에 성령님의 감동을 받아, 내 뒤에서 나는 나팔 소리 같은 “큰 음성을 들었다.”는 것인데, 그 날이 “안식 후 첫날“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안식 후 첫 번째 날에 함께 모여 예배를 드렸는데,
그 시작은 ”어디서부터 근거가 시작되었을까요?”를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마태복음 12장 8절 말씀에 나오는,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다.“는 기록에서부터 시작됩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안식일의 주인“이기 때문입니다.
[안식일]의 시작은 하나님의 질서를 예수님이 완성하셨기에, [주의 날]은 그때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셨습니다.
38년이 된 베데스다 중풍병자는 응급환자도 아닌데, 예수님은 왜 안식일에 그를 고치셨을까요?
그러나 그것보다도 그 광경을 본 사람들은 ”병을 고침 받은 것“ 보다도
”안식일인데, 왜 병자를 고쳤느냐?”를 따지느라 난리가 났습니다.
예수님은 의도적으로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시고, 안식일의 의미를 깨닫게 하셨어요.
요한복음 5장 17절 말씀에서 자신을 비난하는 지도자들에게
“내 아버지께서 지금까지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한다,”고 짧게 대답해 주십니다.
이 말씀은 창조주로써 세상을 통치하고, 섭리하는 하나님은 “안식일에도 일하신다.“는 메시지이고,
더 이상 안식일의 율법이나 규례에 ”얽매이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유대 지도자들은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이 “안식일의 주인이라“는 말은 ”복음 안에서 자유를 가지라”는 말씀입니다.
따라서 [주일 성수](= 주일을 지키라)는 말은 단순히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주의 날을 지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안식 후 첫날]에 모여서 예배를 드린 것은 복음 안에서 자유를 얻기 위함입니다.
예수님 안에서의 자유가 없었다면, 함께 모여 예배를 드리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한 번에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 당시에는 규례에 묶여 있어서 두려워했습니다.
갈라디아서 4장 10-11절 말씀을 보면, “여러분은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잘도 지킵니다.
내가 여러분을 위해 수고한 것이 헛될까 두렵습니다.”(갈4:10~11)
여러분이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지킨다고 하니,
내가 여러분을 위해 수고한 것이 헛되지 않았을까 걱정이 됩니다.
그러나 역사가 흘러가면서 세상이 바뀌어 안식 후 첫날에 모였던 것입니다.
그날을 여기서는 [주의 날]이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인식 후 첫날]은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1) 첫째로, [주의 날]은 예수님이 부활을 기념하고, 기뻐하고 즐긴 날입니다.
제자들은 부활을 기뻐하고, 즐긴 공동체를 만들어 갔어요.
느헤미야 시대에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슬퍼한 것은 참된 [주의 날]을 기념했기 때문에,
여호와를 즐거워하는 날이 된 것입니다. 그날은 거룩한 날이니, 슬퍼하거나 울지 않는 날입니다.
▶왜, 그럴까요?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승리한 날이기 때문이지요.
안식일에 “어떻게 지내느냐?“가 중요하지 않고, 부활을 기뻐하고, 승리한 것을 즐거워하는 날입니다.
(2) 둘째로, [주의 날]은 새로운 창조를 시작하는 날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심으로, 새로운 창조의 날이 시작한 것입니다.
안식의 실체인 [예수님]이 새 창조가 시작되었고, 새로운 출발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주의 날]은 새 창조가 시작되고, 새로운 날이 이루어지는 날입니다.
고린도후서 5장 17절에 말씀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5:17)
그러므로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옛 사람은 지나갔으니 없어지고, 새 사람이 된 것입니다.
여기서 “새로운 피조물“이라는 것은 ”완전히 새롭게 바뀐 창조물“이라는 뜻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 창조의 일원이 되어, [주의 날]에 함께 모여 찬양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슬픔이 사라지고, 기쁨이 임해야 합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새로운 창조의 능력의 역사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 주의 시작이 [주의 날]로 시작되는 것입니다.
(3) 셋째로, [주의 날]은 궁극적인 [안식]으로 ”영원한 쉼“을 얻으니, 주님의 능력을 받고,
새로운 힘을 얻는 날입니다.
사도 요한이 계시록 1장 10절 말씀에 하신 “나는 주의 날에 성령께 사로 잡혀 있었는데,
내 뒤에서 울리는 나팔소리 같은 큰 음성을 들었습니다.”(계 01:10) 라는 말씀은
[주의 날]에 성령께 사로잡혀서 영원한 날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초대 교회 때에는 그 날을 “8번째의 날”이라고 했습니다.
성경을 보면, [8]이라는 숫자가 노아 홍수에 살아남은 사람의 숫자를 예표 합니다.
키프리아누스는 여덟째 날을 아직 오지 않은 소망의 날이고, [주의 날]이라고 주장합니다.
[주의 날]을 지키지 못하는 것을 안타까워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이번 기회에 형식적인 예배를 타파하고 더 넓은 의미의 여원한 날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주의 날]을 율법적으로 지키는 것은 복음이 주는 자유를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17세기에는 ”율법을 엄격하게 지키다가 “심지어 전쟁이 일어났는데도 참여하지 않고, 방관했다“는 말도 있습니다.
그 후에 너무 지나칠 정도가 되다보니, 보스톤 의회에서는 ”주일을 지키라“는 의미에서,
주일에 거리에 돌아다니는 사람들에게 벌금을 네게 하는 일도 벌어졌어요.
청교도들은 주일을 안식일로 지키도록 법으로 정하기도 했고,
이런 전통은 우리나라에도 일부 도입되어 주일성수를 엄격하게 지키는 어른들이 많았어요.
▶여기서 잠시 [주의 날]의 역사를 살펴보겠습니다.
①먼저 AD 321년 까지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칙령을 내려 ”안식 후 첫 날에, 모였다“고 했어요.
그 당시에는 [휴일]이라는 개념이 없었으니까 이른 새벽에 모여서 예배보고, 일하러 나갔어요.
사도행전 20장 7절에, “안식 후 첫날에, 우리는 빵을 떼기 위해 모였습니다.
바울이 사람들에게 말씀을 전했는데 그는 다음 날 떠날 예정이었기에 때문에
강론은 한 밤중까지 계속됐습니다.”(행 20:7)
그 후에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칙령을 내려 “일요일은 쉬라“고 하여,
일요일 오전에 예배당 중심으로 모여서 예배를 보기 시작해서, 기독교의 안식일이 되었어요.
▶이것은 무얼 의미하나요?
그들은 ”가정에서“ 예배를 드리거나, ”공동묘지“에서 [주의 날]을 지켰다”고 해요.
그러므로 예배의 장소가 어느 곳이든 상관없이 참된 예배를 드리는 일이 더 중요합니다.
요즘과 같이 현대적인 건물에서 사람들이 예배를 드리지만, 장소가 어느 곳에서 예배를 드리던지.
참된 예배를 드리는 것이 중요합니다.
②두 번째로, 초대 교회 말기에는 일요일이 휴일로 지정되어
그리스도인들은 일요일에 모여서 예배를 드리게 되었어요. 그 날이 예배드리는 날이고, [주의 날]이 되었어요.
전염병 사태로 주일 성수를 지키지 못하는 것은 [주의 날]이 무너진 것이 아닙니다.
이번 기회에 주의 날]을 지키는 의미를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주의 날]은 어떤 날입니까?
①[주의 날]은 예수님이 부활을 기념하고, 즐기는 날입니다.
②[주의 날]은 새로운 창조를 시작하는 날입니다.
③[주의 날]은 주님의 능력을 받고, 새로운 힘을 얻는 날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교회는 [새로운 예배]를 시도하려고 준비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드려지는 [주일 날] 예배는 그대로 존속하고, 사회적인 거리두기의 일환으로
옆 사람과의 거리를 유지하기 위해, [토요일 예배]를 신설하여, 사람들이 모이는 것을 분산하려고 합니다.
①토요일 아침 9시 예배는 60대 이상인 시니어들을 위한 예배를 드리고,
②토요일 오후 4시 예배는 차세대를 동반한 젊은이 예배이고,
③토요일 오후 6시 예배는 청년부 예배를 드리고자 합니다.
물론, [주일예배]와 [토요예배]는 같은 내용이니까, 어느 예배를 참석해도, 한 번만 드리면 됩니다.
미국의 토요일은 서울의 주일날입니다.
그러니 어느 날에 예배를 드리던지, 참된 주일을 지키는 일이 중요합니다.
▶오늘 말씀에서 뭘 발견하십니까?
그것은 “말씀에 대한 <목마름>과 <갈증>이 백성들에게 있었다.”는 거예요.
그동안 그들은 밤과 낮을 가리지 않고, 52일간 성벽재건 공사에 열중했기 때문에,
말씀을 들을 시간이 없었어요. 그래서 말씀을 듣고 싶었던 거예요.
여기서 중요한 것은 <말씀에 대한 목마름>입니다.
요즘은 옛날과 달라서 성경 말씀을 어디서나 너무나 많이 들을 수 있습니다.
즉, [말씀]의 홍수 속에서 살지만, 정작 홍수가 나더라도, 정작 먹을 [물]이 없어요.
그래서 흙탕물과 같은 물이 너무나 많기 때문에 <깨끗한 생수>를 갈망하고 있어요.
우리들은 오염되지 않은 깨끗한 <생수>를 원하는데, 그런 <생수>가 그리 많지 않아요.
9절 말씀을 보면 “온 백성들이 율법의 말씀을 듣고 울었습니다.
그러자 총독 느헤미야와 제사장이자 학사인 에스라, 백성들을 가르치던 레위 사람들이
모든 백성에게 말 했습니다. 이날은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거룩한 날이니, 슬퍼하거나 울지 말라“(느8:9)
이 말씀을 듣고, 깨닫는 순간에 감동이 되어 내가 가슴을 치고, 내 영혼을 <찡하게> 울린 거예요.
그러니까 ①눈물이 나오고, ②감동이 오니까, ③회개를 하게 되고, ④기쁨이 몰려와요.
10절 말씀을 보면 “느헤미야가 그들에게 말했습니다.
가서 좋은 음식과 단것을 마시고 아무 것도 준비하지 못한 사람들에게도 나누어 주라,
이 날은 우리 주의 거룩한 날이니, 슬퍼하지 말라. 여호와께서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다.“ (느8:10)
그리하여 온 백성들이 가서 먹고, 마시고, 먹을 것을 나누어 주며, 큰 잔치를 벌립니다.
그것은 자기들이 들은 말씀을 이제사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을 읽으며, 이들은 전능하신 하나님이 크고 두려워 눈물을 흘립니다.
자신의 죄가 하나씩 하나씩 발가벗겨지는 것을 보면서 너무 부끄러워서 웁니다.
백성들은 회개를 하면 할수록 그들의 마음에 새로운 희망이 솟아오르게 됩니다.
하나님을 아는 느헤미야는 오히려 ”너희는 살진 것을 먹고 단 것을 마시라. 근심하지 말라.
말씀의 찔림 받을 때 근심하지 말라. 말씀이 내게 다가올 때에 근심하지 말라”고 선포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용서해주시고, 새롭게 하시고, 우리의 삶을 새롭게 창조하십니다.
“말씀을 만났다”는 것은 “그 사람이 변했다”는 것이요, “새롭게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이제까지 자신의 생각으로 살아왔다면, 이제부터는 그 말씀의 능력에 사로잡히는 것입니다.
신앙이 어릴 때는 [말씀]을 따라다닙니다. 그러나 어른의 신앙은 말씀에 사로잡히는 [신앙]입니다.
느헤미야는 그것을 알기 때문에 “너희가 말씀을 재어보고 따져보고 해석해보고 말씀이 네 기분에 맞으면
따라왔지만, 이제는 사신 하나님의 말씀이 너를 사로잡았으므로 슬퍼하지 말고 기뻐하라”고 합니다.
화려한 집이 아닐지라도 아주 작은 초막에서도 기뻐하고 즐거워 할 수 있습니다.
환경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가진 것은 우리의 기쁨과 관계가 없습니다.
[소유]는 중요하지만, [소유]가 우리를 “평안하게” 하지 않습니다.
[말씀]이 우리 가운데 채워질 때에, 우리는 자족한 삶, 자유로운 삶을 누리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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