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 말씀

고통 속에서 올바른 자세 (출15:22~27) 2020.04.25 토요예배

다이나마이트2 2020. 4. 27. 19:47

고통 속에서 올바른 자세 (15:22~27)               말씀: 이재훈 목사님

 

토요일, [유튜브]로 드려지는 오늘 예배에도 성령님이 함께하는 시간이 되기 바랍니다.

우리 교회는 15년 전에 시작한 CGNTV로 온라인 예배를 준비하게 하셨으니 더욱 감사합니다.

 

요즘, 사회적인 소비운동의 일환으로 [공감 소비운동]에 적극 참여하여,

어려운 자영업자들과 전통시장의 활성화에 기여하고자 합니다.

한 때는 [절약]이 미덕이었지만, 요즘에는 [소비]가 미덕이 되었으니, 어려운 상권에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거기에 사용되는 상품권의 이름이 은혜롭게도 [온누리 상품권]이니, 더욱 그 의미가 크다고 생각 됩니다.

 

이제는 [코로나]라는 단어만 들어도 고통스럽게 느껴지지만,

하나님께서는 이런 어려운 과정을 통하여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십니다.

그것은 이러한 고통을 통해서 역시 하나님은 일하고 계십니다.

 

시편 405절의 말씀에, ”,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주께서 하신 놀라운 일들이 너무나 많고,

우리를 향한 주의 생각이 너무나 많습니다. 내가 그것들을 말하려고 해도 너무 많아 일일이 다

열거 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시편40:5)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들은 너무나 많아, 일일이 열거할 수 없지만,

 ”하나님은 고통을 통해서도 일하고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고 [고통]이 하나님의 뜻은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고통을 사용하시면서,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고통을 두 가지 방법으로 변화시켜 주십니다.

첫 번째는, 하나님은 고통을 빨리 제거해 주십니다.

두 번째는, 고통 속에서도 내면을 변화시켜서 올바르게 만드십니다.

 

그러니까 고통으로 엉망진창이 되었어도 결국에는 올바르게 자리를 찾게 하십니다.

먼저 우리 삶의 목적이 어디에 있는지?“를 알게 하시고,

하나님과 어떤 관계에 있는지?“결국은 알도록, 드러내십니다.

 

[고통]이 우리 자리를 빼앗은 것 같지만, 우리가 있어야 할 자리로 돌아오게 하십니다.

코로나가 그동안 우리에게 고통만 준 것 같지만, 코로나가 [기여한 일]도 있습니다.

 

그것은 끊임없이 계속되던 전쟁이 멈추게 하였고,

우리들의 삶을 뒤돌아보면서, 반성하게 하고, 올바른 자리를 찾게 하셨습니다.

 

그럴 때마다 하나님은 언제나 [고통]을 사용하셨습니다.

애굽 땅에서 탈출할 때에도 그랬고, 그 후 광야에서도 [고통]을 겪게 만드셨습니다.

 

가장 먼저, 광야에서 []이 없게 만들어, 고통을 느끼게 했어요.

당시에 장정만 60만 명이었다고 하니, 그곳에 물이 없다는 것이 얼마나 큰 고통입니까?

그러나 그 물이 [쓴물]이었으니, 백성들의 불만은 극에 달했을 것입니다.

 

홍해를 건넌 이스라엘 백성들을 모세가 인도하는데,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인도하는데,

수르 광야로 들어가서 3일 동안 뙤약볕의 메마른 광야 길을 걸었지만, 물이 없었습니다.

 

[마라]에 이르렀는데, 그 곳 물이 써서, 마시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백성들이 [마라]의 쓴 물로 인하여, 모세를 원망하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인간의 본질입니다.

불과 3일 전에 이스라엘의 60만 백성들은 엄청난 하나님의 위대함을 눈으로 보았어요.

 

홍해 바닷길을 마른 육지처럼 모두가 건너서, 애굽으로 부터 구원을 받았지만,

추격하던 군대와 마병과 전차는 모두 바다에 수장되었으니 얼마나 감격스런 일입니까?

 

그렇게 홍해를 육지처럼 건넌 이스라엘 백성들은 구원의 하나님을 춤추며 찬양했습니까?

그들은 기뻐 춤을 추며, 하나님을 찬양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상황이 어려울 때는 곧 원망하며 불평합니다.

한 번의 승리로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모세가 울부짖으며 기도할 때, 하나님은 방법을 알려 주십니다. 25절의 말씀에서,

여호와께서는 모세에게 나뭇가지 하나를 보여 주시며, 물에 던지자, 그 물이 달게 되었습니다.

한 나무를 지시하시니, 그가 그 나무를 물에 던지매, 물이 달아졌습니다.”(15:25)

 

마라의 쓴 물로 인하여, 원망하는 백성들로 인하여, 모세는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이것이 영적 지도자가 취하여야 할 중요한 태도입니다.

 

백성들의 원망으로 인하여, 회의를 소집하지 않았고, 세미나를 개최하지도 않았어요.

모세는 조용히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기도했고, 하나님의 응답이 바로 나타났어요.

 

[기도]가 문제 해결의 지름길입니다.

[쓴물][단물]로 바꾸어 주시는 주님을 찬양합니다.

 

, 그렇게 하셨을까요?

사람은 [쓴물]을 맛보아야, [단물]의 고마움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자유도 그렇습니다.

사람은 구속을 받아 보아야, “자유가 좋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자신이 살아 있다는 것을 느끼는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그것은 장례식에 참석하는 사람들입니다.

인생에서 마시는 [쓴물]은 사랑의 통로가 되는 것입니다.

 

이어서 26절 말씀에서, ”그분은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음성을 잘 듣고,

나 여호와가 보기에 옳은 일을 하며, 너희가 계명에 귀를 기울이고, 그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이집트 사람들에게 내린 질병가운데 어느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않겠다.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다.“(5:26)

 

인생의 쓰디쓴 문제는 하나님이 치료하십니다.

[출애굽]하여 처음으로 하나님께서 수르광야 마라에서 율례와 법도를 정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로, 여호와의 음성을 잘 듣고,

둘째로, 여호와 보시기에 옳은 일을 하며,

셋째로, 계명에 귀를 기울이고,

넷째로, ”모든 규례를 지키라고 명령하십니다.

그리하면 모든 질병을 내리지 않으시겠다.“고 약속하시며,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죽게 되는 것은 물이 없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마라]의 쓴 물도 달게 만드신 치료의 하나님입니다.

치료하시는 하나님은 [라파의 하나님]입니다.

 

[]를 짓지 않는 길은 무엇입니까?

[]란 가고자 하는 목적지를 스스로 결정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중심적인 방향에서 --> 하나님 중심적인 방향으로 바꾸는 것입니다.

자기가 정한 목적지에서 --> 하나님이 정한 목적지로 바꾸는 것입니다.

 

[광야]는 목적지가 아닙니다.

[광야]는 그냥 통과하는 낯선 땅입니다.

 

그 곳은 정착할 곳이 못되니까 오래 머무를 필요가 없습니다.

그 곳에 머무르는 사람은 이상한 사람이니, 그 땅에서 불평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사람들은 목적지를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광야]는 목적지가 아니고, 그들이 가야 할 땅은 가나안이 목적지입니다.

 

(2) 두 번째로, 우리는 이 고통 속에서도, 감사를 깨달아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마라]에서 불평했지만, 거기서만 불평한 게 아닙니다.

그들은 애굽에서 노예생활을 할 때에도, 불평이 익숙했던 사람들입니다.

 

[출애굽]으로 그들의 불평하는 습관을 없애버리지 않았고, 계속 불평했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이 있었는데도 그들은 죄의 습관을 버리지 못했고, 더 큰 죄에 빠집니다.

 

[마라의 고통]은 축복받기 위한 하나의 과정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엘림의 축복]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마라]에서 [엘림]까지 약 11키로 떨어져 있으니, 그리 먼 길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고통을 참지 못하고, 마라에서 불평을 합니다.

 

조금만 더 참으면, [엘림]에 도착하는데, 그걸 참지 못하고, 난리입니다.

그들은 [마라]에서 고통스러웠기 때문에, [엘림의 축복]을 몰랐기 때문입니다.

[마라에서 고통]이 이제는 엘림에서 축복으로바뀌게 됩니다.

 

(3) 고통을 통해, 순종하는 삶의 자리로 바뀌게 됩니다.

 

시편 11967절 말씀을 보면,

내가 고난을 받기 전에는 방황했는데,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킵니다.”(119:67)

 

개역개정 성경에는 고난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

주는 선하시므로 선을 행하시오니, 주의 율례들로 나를 가르치소서.”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고난이 있으면 방황하는 인생이지만, 잘 지키면 축복받는 인생이 됩니다.

 

욥기 425절 말씀에는,

내가 주에 대해 지금까지 내 귀로만 들었는데, 이제 내 눈으로 주를 보게 됐습니다.”(42:15)

 

이 말씀은 내가 지금까지 귀로만 들었는데, 이제 부터는 내 눈으로 보게 되었다고 고백합니다.

여기서 눈으로 보았다는 것은 [체험적 신앙]을 말해 줍니다.

 

하나님에게 순종하는 사람은 말씀을 체험한 사람입니다.

그들은 배가 부른 사람이 아니고, 배가 고픈 사람입니다

 

특히 사랑하는 가족의 죽음이 있을 때에 더 빨리 알게 해 줍니다.

그러니까 그런 고통 속에 있을 때에 더욱 생생하게 들려줍니다.

 

코로나 재난을 겪으면서 우리는 [예배의 소중함]을 더욱 더 실감하게 됩니다.

어쩌면 불순종했던 사람들은 더 어려워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어려움 속에서도 돌이키고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면, 우리들을 회복하게 만들어 주십니다.

 

슬픔 속에서 역경을 딛고 일어나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고아였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은 고통이 자신을 창조적으로 바꾸었다고 고백을 합니다.

 

[고통], 그 자체가 창조적인 것은 아니지만,

그 고통에 적극적으로 반응한 사람들은 성공하는 사람이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적극적으로 순종하는 사람은 반드시 창조적으로 바뀌어서,

[위기][기회]로 바꾸는 사람이 됩니다.

 

우리가 고통 속에 있을 때에도, 우리만 고통 속에 내 버려두지 않고,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고통 가운데 계십니다.

 

오늘 말씀에 나오는 고통의 쓴물에 있던 나뭇가지[십자가의 나무]를 표시합니다.

[십자가]를 통해, 우리를 치료하시고, 창조적으로 바꾸어 주십니다.

 

[십자가]는 고통, 그 자체를 멈추게 할 수도 있지만,

분명한 것은 고통은 창조적인 능력으로 바뀔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여호와 라파]가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그런 능력이 우리의 생활하는 가운데, 나타나길 기대합니다.

 

우리 인간은 불평할 수 밖에 없지만, 멀지 않아 우리도 [엘림]에 도달 할 수 있다는 희망을 품으시고,

이 어려운 코로나의 고통을 모두 다 잘 참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스라엘 백성들은 얼마 전에 구원을 체험 했지만,

오늘 말씀에서 원망과 불평이 터져 나오는 백성들의 원망을 보았습니다.

 

이것이 그들만이 것이 아니고, [내 모습]임을 고백합니다.

그러므로 환경과 상황에 휘둘리지 않고, 우리는 주님을 더욱 의지하기 원합니다.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와 같은 우리들의 감정을 붙잡아 주시고,

중심되시는 예수그리스도의 은혜에 내 삶의 중심이 되게 붙잡아 주옵소서.

 

마라의 [쓴물][단물]로 바꾸시는 주님,

내 인생의 [쓴 뿌리]도 뽑아주시고, 겸손하고 온유한 마음으로 바꾸어 주세요.

 

광야 같은 인생길에 [엘림]과 같은 오아시스를 허락하신 주님을 찬양합니다.

내 인생에도 이런 [엘림]과 같은 풍성한 마음으로 채워 주십시오.

 

율례와 법도를 제정하신 주님, 그 말씀에 따라 살게 하시고,

치료하시고 변화시키시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