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비 소리가 들리지 않는가? (왕상18:41~46) 말씀: 이상준 목사님
오늘의 말씀은 2,850년 전에 유대 땅에서 벌어진 [비]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혼자서 450명과 싸워 이긴 선지자 [엘리야]가 벌린 실제적인 이야기입니다.
[엘리야의 기도]는 하나님과 우상 사이에서 머뭇거리고, 방황하고 있는 그 시대에,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기도입니다.
당시 이스라엘의 왕 [아합]은 정의와 사랑과는 거리가 먼, 아주 못된 나쁜 왕이었습니다.
아합 왕은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숭배하는 나라로 만들었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가 회개하고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3년 반 동안, 이스라엘에 비를 내리지 않겠다."고 통고합니다.
그 당시가 농경문화 시대이므로, "비를 끊겠다."는 것은 얼마나 무서운 말입니까?
더구나 이스라엘이 농경국가인데, "3년 반 동안에 비를 내리지 않는다."는 것은 정말 큰일입니다.
그 후 [엘리야]는 깊은 산속으로 몸을 숨겼고, 3년 반 동안 정말로 비가 오지 않았습니다.
그러고 나서 3년 반이 지나고, 갈멜 산에서 바알 신과 왕과 엘리야가 만났는데, [엘리야]는 엄청난 “배팅“을 합니다.
제단에 제물을 차려 놓고, 바알의 선지자 450명 앞에서 "너희는 너희들의 신에게 기도하고, 나는 하나님한테 기도하여, 누구든지 하늘에서 불과 비를 내려서, 이 제물을 사르게 하는 자가 진짜 신이다" (왕상 18:24) 라는 것을 제안입니다.
오늘의 말슴은 비]에 대한 얘기입니다. 41절 말씀을 읽으십시오.
”엘리야가 아합에게 말했습니다. 큰 빗소리가 들리니, 이제 올라가서 먹고 마시시오.“(왕상 18:41)
▶여기서 ”큰 빗소리가 들린다.”는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그것은 하늘이 내리는 [징벌]을 의미합니다.
“3년 동안 비가 내리지 않았다“는 것은 큰 재앙으로, 하늘의 노하심을 나타내는 현상입니다.
갈멜 산에 모여 있는 사람들은 아무 소리도 듣지 못하고 있는 상황인데,
”엘리야만 그 소리를 들었다”는 말입니까?
[소리]는 신체적으로 민감한 사람만이 들을 수 있는 것입니다.
[소리]는 물리적인 사운드인데, 자연의 소리보다 [하나님의 음성]에 민감하니까,
영성이 발달된 [엘리야]가 그 소리를 들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날에도 경제적으로 어려운 시대입니다,
“어떻게 하면 이 위기를 넘길 것인가?”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은 그런 예감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몽골의 에스키모인들은 “시력과 청력이 좋다“고 합니다.
그들은 보이는 게 없어도, 민감하게 [시력]을 느끼고,
그들은 들리는 게 없어도, 민감하게 ”[청력]을 느낀다“고 합니다.
예수님도 같은 맥락에서, [8복]을 얘기 하셨습니다.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의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라고 말씀 하신 것은
먼저 자기 자신을 비우고 나서, 그 빈자리에 채우는 것이 [복]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아무 감각이 없는 사람들은 아무 것도 들리지 않지만,
조금이라도 깊이 집중하는 사람에게는 무슨 소리가 들려오는 법입니다.
요즘같이 어려운 시대에 소 상공인들은 ”언제까지 계속해야 하는가?”를 걱정하지만,
그래도 엘리야처럼 하늘의 빗소리를 듣기 위해, 경청하는 사람에게는 그 소리가 들려오는 법입니다.
42절 말씀을 읽으십시오. “그러자 아합은 올라가 먹고 마셨습니다.
그러나 엘리야는 갈멜 산꼭대기로 올라가, 얼굴을 무릎 사이에 파묻고, 땅에 꿇어 엎드렸습니다.”(왕상 18:42)
여기에서 대조적인 장면이 나오는데,
[아합]은 먹고 마시고, [엘리야]는 산꼭대기에 올라가 기도했습니다.
[아합] 왕은 왕궁에 돌아가면, 무서운 이사벨이 기다리고 있으니, 얼마나 근심 걱정이 많았겠습니까?
그러니까 “큰 비가 내린다”고 하니, 현실을 잊어버리려고, 향락에 빠져서 축배를 들고, 마십니다.
그러나 [엘리야]는 “비를 주신다”는 약속은 주셨지만, “과연 비가 내릴 것인가?”를 걱정하며,
산꼭대기에 올라가 머리를 무릎에 파묻고, 간절히 기도를 드립니다.
지금은 [축배의 시간]이 아니고, 자중하고, 좀 더 기다려야 합니다.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좀 더 기다리는 시간입니다.
[하나님의 손길]이 “이 상황을 어떻게 끌고 갈지?”를 모르니까,
[엘리야]는 기도하면서, 비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당신은 [아합] 왕처럼, 편한 인생입니까?
▶아니면, [엘리야] 처럼, 기도하는 인생입니까?
우리 가정이 이렇게 잘 사는 것도 부모님의 기도 덕분인데,
혹시 우리 아이들 중에서 그걸 모르고, 날 뛰는 그런 아이들은 없으십니까?
솔직히 말해서, [아합]은 기도하지 않고, 덕을 보려는 사람입니다.
북이스라엘이 경제적인 풍요를 누리던 시대에, 편승해 가려는 사람입니다.
지금도 어른뿐이 아니라, 자녀들도 물질만능 시대에 물들어서, 즐기려고 하는 사람들이 많아서 걱정이 됩니다.
42절 말씀을 보니, [엘리야]는 얼굴을 무릎 사이에 파묻고 기도합니다.
[엘리야]가 기도하니까, 이루어졌습니다.
[엘리야]는 확신에 가득 차 있었기 때문에, 이루어 진 것입니다.
▶왜, 이루어졌습니까?
그것은 완전한 하나님의 승리를 기대했기 때문입니다.
갈멜 산은 지중해가 내려 다 보이는 산입니다.
43절 말씀에서, [엘리야]는 자기 [종]에게 “뭐가 보이는지? 를 알아보라“고 지시했습니다.
[종]은 “아무 것도 보이지 않습니다.”라고, 계속해서 대답합니다.
그러나 일곱 번째에, [종]은 “사람 손바닥 만한 작은 구름이 바다에서 올라오고 있다”고 보고합니다.
그러자 [엘리야]는 [아합]에게
“비가 와서 길이 막히기 전에, 전차를 준비해 내려가십시오.”라고 말했습니다.
여기서 세 사람을 서로 비교해서 점검해 봅시다.
①첫 번째로, [아합]의 포지션을 보면, 당시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런 영역입니다.
②두 번째로, [종]의 포지션을 보면, [종]은 시키는 일만 하는 사람입니다.
③세 번째로, [엘리야]의 포지션을 보면, [엘리야]는 영혼을 쏟아 부어 기도합니다.
이 세 사람을 다시 분석해 보면,
①첫째로, [아합]은 즐기는 인생이고,
②둘째로, [종]은 수고하는 인생이고,
③셋째로, [엘리야]는 하나님만 바라보는 인생입니다.
▶그렇다면, 지금의 나는 어떤 인생입니까?
---여러분, 각 자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여기서 “비구름이 바다에서 올라오고 있었다“는 것은 사실은 수평선 너머에서 올라오고 있는데,
”바다에서 온다“고 표현한 것입니다.
이것은 [아브라함]이 모리아 산에 아들과 함께 올라갈 때,
그 반대편에서 숫양이 올라오는 것을 볼 수 없었지만, 분명히 하나님은 양을 준비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이것은 [믿음의 응답]으로 받아드리고, 느껴야 합니다.
▶그러니까 ”수평선 너머에서 올라오는 것“을 [안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그것은 하나님만 바라보는 사람에게서 느낄 수 있는 감각입니다.
그런 감각이 있는 사람은 하늘에서 보내주는 작은 조각구름을 보면서, 비가 올 것을 느끼게 됩니다.
내가 보는 것과 내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은 다른 거예요.
이미 ”조각구름을 본 사람“은 [엘리야]뿐이고, [종]은 보아도 느낄 수 없습니다.
[아합]의 인생은 볼 수도 없고, 보이지도 않습니다.
그러니까 그는 전혀 아무 것도 볼 수 없는 인생입니다.
마지막으로 45-46절 말씀을 함께 읽으십시오.
”한편 하늘은 구름과 바람으로 시커멓게 되고, 바람이 일어나 큰비가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아함은 전차를 타고 아스르엘로 갔습니다. 여호와의 능력이 엘리야에게 내려 왔습니다.
그는 허리띠를 동여매고, 아합 보다 먼저 이스르엘로 달려 갔습니다.“(열상 18:45-46)
[엘리야]는 친절하게도 [아합] 왕에게 ”미리 전차를 준비해서 내려가라”고 얘기해 줍니다.
그것은 비가 내리면 산길이라, 진흙탕이 되어 빠져나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인생으로 살아야 합니까?
우리는 [아합]과 같이, 성공하고, 모든 물질을 다 가진 사람입니까?
사람들은 모두가 성공에 목숨을 거는데, 하나님의 사람도 거기에 동참해야 합니까?
▶왜, 우리는 [엘리야]같은, 사람이 되지 못합니까?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틈틈이 새벽에 나와서 기도하는 인생입니까?
아니면, [아합] 같이, 관람석에 앉아서 구경하며 신앙생활을 하는 인생입니까?
[아합]은 튼튼한 전차를 타고 산을 내려가지만,
오늘 말씀의 이후에 3장만 지나가면, 그 전차에서 최후의 순간을 맞이하게 됩니다.
그러나 [엘리야]의 마지막 순간은 다릅니다.
[엘리야]는 하늘에서 내려 온 전차를 타고, 하늘로 올라갑니다.
나는 [아합]의 무소불능의 영향력을 가진 인생이 되는 것보다도,
무릎 꿇고 기도하는 [엘리야]의 인생으로 살기를 바랍니다.
그러니까 나도 무릎에 얼굴을 묻고 엎드려 기도하는 인생으로 변한다면,
“내일은 빗소리를 들을 수 있는 귀가 열릴 것인가?“에 대해, 깊은 묵상이 있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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