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전한 기쁨 (삼하6:11-22) 말씀: 이재훈 목사님
“신은 주었다“고 망언을 한 [니체]라는 철학자가 자기 친구에게
그리스도인이 믿는 하나님은 구원받은 사람이 그 얼굴에 기쁨이 나타나야 하는데,
”그 얼굴에 기쁨을 보이지 않았다”고 편지를 보냈다고 합니다.
[니체]의 생각에 “진정한 기쁨이 없다.”고 생각한 것은 그분이 성경을 읽어보지 못했기 때문이지요.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집나간 아들이 돌아 왔을 때, 아버지가 기뻐하고, 잔치를 베풀어 주며,
춤을 추었던 아버지의 모습을 보지 않았기에, 그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탕자의 비유]라고 하지만, 어느 학자는 [춤추는 하나님]이라고 비유했습니다.
이 장면은 넘어지고 실패한 아들을 감싸주고 회복시키는 ”춤추는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역사는 마치 “왈츠를 추는 춤과 같다.”누가 말했어요.
1816년 영국에 [왈츠]가 처음 들어 왔을 때, 사람들은 “상스럽고 추악하다“고 했으나,
나중에 보급되고 나서는 ”그 어떤 춤보다, 더 친근하게 다가왔다”고 평가했습니다.
오순절 성령강림이 일어났을 때도, “술에 취한 것 같다“고 하였으나,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는 기쁨을 막을 수가 없었다“고 표현하게 되었습니다.
▶[신앙생활]이란 무엇입니까?
[신앙생활]이란 ”하나님과 함께 거룩한 춤을 추는 것“입니다.
[시편]에는 ”하나님과 함께 춤추는 장면”이 여러 번 나옵니다.
[시편] 149편 2-3절에, ”이스라엘은 자기를 만드신 분을 즐거워하며 시온의 자녀들은 그 왕을 기뻐하라.
춤을 추며, 그분의 이름을 찬양하고, 템버린과 하프로 그분께 찬양하라.“(시 149:2~3)
하나님과 함께 ”거룩한 춤을 춘 사람“이 [다윗]입니다.
오늘 본문에도 [다윗]이 춤추며, 기뻐하는 모습이 나옵니다.
이 모습이 우리가 원래 본받아야 할 [신앙인의 모습]입니다.
이것은 [자기도취]나 [자기만족]이 아니고, ”잃어버린 하나님의 영광“을 맛보는 일입니다.
이것은 [세상의 춤]이 아니라, 믿음의 사람들이 본받아야 할 ”온전한 기쁨의 춤“입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잃어버렸던 [하나님의 영광]을 회복하는 것을 기뻐하는 표현의 춤입니다.
다윗은 자신의 영광을 추구하지 않았지만, 그가 해야 하는 일은 두 가지 입니다.
①첫째로, 예루살렘 성을 되찾아 오는 일이고,
②둘째로,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가져 오는 일입니다.
그 핵심이 [법궤]입니다.
▶[법궤]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그럼, [법궤는 어떤 것입니까?
①[법궤]는 성막을 만들 때, 함께 만들어서 [지성소]에 안치했고,
②[법궤]는 길이가 112 Cm, 폭과 높이가 68 Cm의 직사각형의 상자 모양으로 만들어졌고,
③[법궤]를 광야에서 이동할 때는 제사장이 어깨에 메고 갔으며,
④여리고성을 돌때도 [법궤]를 메고 행진했고, 요단 강도 [법궤]가 맨 앞에서 건넜으며,
⑤[법궤]를 만지거나, 들여다 볼 수 없으며, “만약에 뚜껑을 열면 죽는다.”고 생각했습니다.
⑥[법궤] 안에는 [만나]를 담는 금 항아리가 있고, [십계명 돌판]과 [아론의 싹 난 지팡이]가 들어있고,
“하나님이 말씀하면 반드시 성사된다.”는 증표로 보여주는 성스러운 것입니다.
▶그럼, [다윗] 왕이 [법궤]를 움직이려는 목적은 무엇입니까?
①법궤를 다시 예루살렘 성으로 옮겨서, 첫째로, 여호와의 신앙을 회복하고,
②그동안 흩어진 민심들을 다시 모으고,
③서로 떨어진 지파들을 모아서, 정치적인 목적으로, [법궤]를 모셔 오려고 합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법궤]를 이동”하는 것은 국가적인 행사로 그 규모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일을 하는 실무자가 삼만 명이라“고 하는 것은 국가적인 프로젝트입니다.
이를 다윗 왕이 직접 총괄 지휘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법궤]는 무엇을 상징합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법계]가 “여호와의 이름을 상징하고, [하나님의 임재]를 나타내는 징표로,
그 자체만으로도 “권위의 상징”입니다.
그러므로 이 [법궤]를 수도인 예루살렘 성(=다윗 성)으로 옮기는 데는, 다른 의견이 없었을 것입니다.
이제 [법궤]를 이동하게 하는데, 원래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빼앗겨서 60년 이상이나,
[아비나답]의 가문에서, [법궤]를 보관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울 왕 때부터 법궤가 무시되고, 왜곡 되어서 문제가 되었습니다.
불레셋에게 빼앗겼을 때, 다곤 신상이 부러지고, 폭등이 일어나고, 환란이 일어나니까,
그때부터 두려워하기 시작했습니다.
제사장이 메고 와야 할 [법궤]를, 수레에 실고 오던 [웃사]가 죽임을 당하고, 그제사 의미를 깨닫게 되었어요.
▶이것이 무얼 의미합니까?
[법궤], 자체가 [축복의 도구]는 아닙니다.
[십자가] 목걸이가 “악령을 물리쳐 준다“고 생각하면, 그건 틀린 생각입니다.
우리가 [십자가]를 걸고 다니면, ”복을 받는다“고 생각하면, 그건 잘못된 생각입니다.
[십자가] 자체가 [하나님]이 아닙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는 도구이지만, [십자가] 속에 하나님을 가두면 안 됩니다.
▶오늘의 교훈은 무엇입니까?
[법궤] 자체는, “축복의 상징”이 아닙니다.
[법궤] 자체를, 우상으로 섬기는 어리석음을 보이면 안 됩니다.
사무엘하 6장 14-16절 말씀을 함께 읽으십시오.
“다윗은 베(모시) 에봇을 입고, 여호와 앞에서 온 힘을 다해 춤을 추었습니다.
다윗과 이스라엘의 온 집들이 나팔을 불고, 환호하며 여호와의 궤를 모셔 왔습니다.
여호와의 궤가 다윗 성에 들어올 때 사울의 딸 미갈이 창문으로 내다보고 있었습니다.
미갈은 다윗 왕이 여호와 앞에서 껑충껑충 뛰며 춤추는 것을 보고, 마음속으로 비웃었습니다.”(삼하6:14~16)
법궤를 옮기는데, 3만 명의 인원이 동원되고, 모든 악기들을 동원하여 국가적인 행사로 치러졌어요.
이것은 잃어버린 하나님의 영광을 되찾아 오려는 의도가 있었기에, 그렇게 큰 행사를 벌린 것입니다.
다윗이 추는 [기쁨의 춤]은 “슬픔이 기쁨으로 변하는 사건”입니다.
세상에서는 기쁨은 슬픔이 없는 것이라고 하지만,
[슬픔의 내용]이 변하여 [기쁨의 내용]으로 변하는 것입니다.
다윗은 수많은 슬픔이 있었지만, 슬픔을 기쁨으로 바꿔 때로는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는 슬픔 속에서 하나님의 섭리가 있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이런 슬픔을 통과해야 하고, 하나님의 기쁨을 생각했습니다.
시편 30편 11절 말씀에는,
“주께서 내 슬픔이 춤이 되게 하셨고, 내 베옷을 벗기고, 기쁨의 옷을 입혀 주셨습니다.”(시30:11)
다윗이 [기쁨의 춤]을 추기 시작하는 첫 번째 스탭은 슬픔이 있었고, 그 슬픔을 이겨내고,
하나님은 “내가 너의 슬픔을 춤으로 변화시켜 주겠다”고 하시면서,
하나님과 함께 춤추는 인생으로 바꾸어 주신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우리가 기쁜 일 속에서는 자신의 방법만 고집하기 때문이지요.
자신의 고집을 내려놓고, 나의 주인이 되시는 하나님을 생각하면, 나의 고집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슬픔을 당해야 나의 고집을 내려놓는 어리석은 인간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슬픔을 기쁨으로 바꾸어 주십니다.
▶다윗이 춤을 출 때, [미갈]의 모습은 어떻게 행동했나요?
다윗의 아내인 [미갈]은 왕궁의 창문으로 내다보며 비웃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예배자의 모습]이 아니고, [구경꾼의 모습]으로 멀리서 쳐다보고 있었어요.
미갈이 걱정하는 것은 [다윗의 명예]를 걱정하는 것이 아니고,
자신의 허영심을 걱정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오늘 이스라엘 왕이 정말 볼만 하시더군요.
신하의 계집종들 앞에서 몸을 드러내시다니요.”라고 비아냥거리고, 비꼬며 말했습니다.
이때 다윗이 “나는 하나님 앞에서 그렇게 춤을 춘 것이오.
그분이 당신 아버지와 당신 집안 대신 나를 선택해 여호와의 백성 이스라엘의 통치자로 세우셨으니,
나는 언제든 여호와 앞에서 기뻐 뛸 것이오.”라고 자신 있게 대답했습니다.
[다윗의 춤]은 경박한 [세속적인 춤]이 아니고, 하나님과 함께하는 [기쁨의 춤]입니다.
[다윗의 춤]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를 낮추는 춤입니다.
[다윗의 춤]은 내가 이끌어 가는 춤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끌어 가는 “성령이 움직인 춤”입니다.
우리에게 기쁨이 없는 것은 우리가 교만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보다 [나] 자신을 높일 때, 그런 증상이 나타납니다.
다윗이 경험했던 것은 슬픔이 변하여, 기쁨이 된 춤입니다.
이것은 [자기의 영광]이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를 즐거워하는 기쁨입니다.
코로나 바이러스로 온 땅이 얼어붙어 있어도, 우리는 [믿음의 사람]으로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세속적인 기쁨]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쁨]이 나에게 나타나게 하옵소서.
우리도 다윗과 같이, 이런 [기쁨의 춤]을 추어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높이 보이는 [온전한 기쁨]을 맛보는 온누리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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