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예수 40일 새벽기도 말씀

작은예수 40일 특새22 2020.01.04

다이나마이트2 2020. 1. 5. 20:07

항상 일하시는 하나님   안식을 누리신다. (창2:1~3, 히4:1~3)     말씀: 이재훈 목사님

 

오늘의 주제는 항상 일하는 하나님께서, 안식을 누리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일과 안식]은 서로 상충되는 말로 해석되기도 합니다.

그것은 []고통이고, [안식]즐거운 것이라고 구분되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에게 천국에 가면 일이 있을까?“라고 질문을 한다면, 어떻게 대답할 까요?

우리가 천국의 모습을 완전히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그러나 성경을 통해 [계시]한 것을 보면,

천국에도 []이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일과 안식]이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왜, 그러냐”고 묻는다면, 하나님이 []하는 분이고, 천국은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항상 일을 하시고, 안식 가운데 계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는 []로 인해 고통이 따르지만, 하나님께서는 []이 안식을 향하는 것으로,

일하는 가운데 안식을 누리시는 분입니다.

 

이스라엘의 역사가운데 [안식]이라는 단어가 등장하는데, 창세기 21-3절의 말씀이니 함께 읽어 보십시오. “그리하여 하늘과 땅과 그 안의 모든 것이 완성 됐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다 맞추셨습니다.

그리고 그 하시던 모든 일을 마치고, 일곱째 날에 쉬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일곱째 날을 복 주시고, 거룩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시고 만드셨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이 날에 쉬셨기 때문입니다. “(2:1~3)

 

1절에서, ”모든 것이 완성되었다.”고 하고, 2절에,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셨다.”고 했어요.

이 말씀이 좀 이상합니다. 보통 같으면 6일째 모든 일을 마치고, 7일째에 <쉬셨다.>고 해야 하는데,

여기서는 같은 날인 7일 째에 마치셨다.”고 하니,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일하는 것안식하는 것을 다 같은 것으로 인식하고 계십니다.

러니까 하나님이 안식한 것은 일이 완성된 후에 안식했으니까, 7일 째 날에 [일과 안식]이 포함된 것이지요.

 

[우리의 일]은 안식을 위한 것이지만, [하나님의 일]은 일과 안식을 포함해서 생각하고 있어요.

[하나님의 안식]은 고통을 피하는 것이 아니라, 일의 목적과 열매가 다 [하나]로 같은 개념입니다.

 

3절에서, 하나님은 7일 째 날에 복되고, 거룩하게 하셨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복과 거룩]은 안식에 해당하고, [3위 일체]처럼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진정한 복]은 안식 없이 이루어지지 않고, 안식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6일 동안 <보이는 것>도 창조했지만, 7일 째 날에 <보이지 않는> [안식]을 창조하시므로,

[공간]도 함께 창조하신 것입니다.

 

▶[안식]은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두 가지 뜻이 있습니다.

첫째는 <쉰다.>는 의미이고, 둘째는 <일 한다.>는 뜻입니다.

소극적인 [안식일]<쉰다.>는 의미이고, 적극적인 의미는 <일 한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6일 동안은 세상을 창조하며,--- “보시기에 좋았다.”고 하시고,

7일 째 날에는 --- “ 복되고, 거룩했다.”고 자평하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인간]을 창조하시고는 --- “심히 좋았다.”고 평가 하셨습니다.

6일 동안의 창조를 [물질의 창조]이라면, 7일 째 되는 날에는 [시간과 공간]을 창조하신 것입니다.

 

우리들 삶의 중심에 [공간]에 있습니다. 사람들은 [시간]을 사용하여, [공간]을 만들어 갑니다.

[종교학]에서 신은 공간 속에 있다.”고 생각하니까, 사람들은 공간을 특별하게 꾸밉니다.

 

그래서 공간을 어떻게 꾸미느냐?“에 따라서 신이 그곳에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종교가 공간을 만드는데, 아주 신경을 많이 씁니다.

 

[무당 집]에 가면, 그 공간을 화려하고 찬란하게 꾸미는 것도 그런 이유입니다.

[공간]에 무엇이 있든지, 신이 존재하는 게 아닌데, 그렇게 꾸밉니다.

것은 사람들을 현혹시키려고 만들은 인간의 생각입니다.

 

▶[복되고, 거룩하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공간의 장식이 아니라, ”시간을 통한 안식을 누려야 합니다.

사실은 공간을 거룩하게 구별함으로, 물질의 세계 속에서 함께 누리며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인간의 []로 인해, 무참히 깨지고, 무너졌습니다.

[창조질서]를 지키지 않는 인간의 []로 인해, 땅의 반란이 일어나서 고통당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거룩하고 복된 안식을 []가 파괴했으므로, 인간은 고통스럽게 [노동]을 하게 되었어요.

 

▶왜, [안식]이 필요한가요?

[성경]”[안식]을 누리기 위해, []을 한다.”고 기록하고 있어요.

그러나 사람들은 “[]을 하기 위해서, [안식]이 필요하다.”고 생각을 합니다.

 

세상은 [공간]을 화려하게 장식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지만,

그러나 하나님은 [시간]을 더 중요하게 생각해요. 우리의 안식은 시간 속에서 복된 안식을 누려야 합니다.

 

▶[안식]이란 무엇입니까? 시간 속에서 [거룩함]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의 중심을 [공간]이 아니고, [시간]에 두는 것이 [안식]입니다.

7일 중에 하루를 [거룩한 시간]으로 구별하는 것은 창조주의 질서를 믿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흔히 시간 가는 줄 몰랐다.”고 얘기하지만, 좋은 말이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 믿는 사람들은 [큐티]하는 시간이 중요합니다.

 

[큐티]는 시간 속에서 하나님을 묵상하고, 하나님을 느끼고, 하나님을 만나는 시간이므로,

그렇게 [큐티]하는 시간이 우리에게 [복된 시간]이 됩니다.

그래서 [큐티]안식의 시간이 되어야 하고, “안식 가운데이루어지는 시간이 되어야 합니다.

 

6일 간의 [물질 창조]와 하루의 [안식]이 하나님의 질서 속에서 조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십계명]안식의 계명이 나오는데, 다른 부분은 딱 한 줄로 주셨는데,

안식의 계명은 서너 줄로 아주 자세하게 길게 지켜야 할 계명으로 주셨어요.

 

▶그렇게 자세히 말씀하는 이유는 뭘까요?

[안식일]복되고 거룩하게 지키라.”는 의미입니다.

여기서 말씀하는 [6 프러스 1][일과 안식]조화롭게 인식하라.“는 의미입니다.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하루의 시간을 하나님의 시간으로 한다.”는 것은

나머지는 [내 시간]이라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삶의 원리는 “[시간의 주인]이 하나님이라는 것을 가르쳐 주는 뜻입니다.

 

[시간]의 주인은 [인간]이 아니고, [하나님]입니다. 우리는 []을 통해, “나의 능력으로 사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공급하는 능력으로 산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또 한편으로 더 나아가서, 6일간의 일과 하루의 안식을 통해서,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모든 일이 하나님께서 이루신다.‘는 것을 체험하고, 고백해야 합니다.

이것은 물론, 경제적인 효과인 것은 분명하지만, 하루를 쉬면서 하나님이 공급하는 힘

내가 얻어야 합니다.

 

유대인들은 [안식일]에 대하여 많은 논쟁을 있었는데,

그것은 [원리]를 적용하지 않고, 모든 것을 [율법]으로 해석했기 때문입니다.

 

실제 [원리]를 이해하지 못하고, 인간이 만든 [법전]으로 해석하기 때문에, 논쟁하는 거예요.

요한복음 5장에 나오는 38년 된 병자를 고치는 일도 예수님이 안식일에 병을 고쳤다.”

유대인들은 항의하는 거예요. 유대인들은 병을 고치는 것 보다,

, 안식일에 일을 했냐?“고 따지는 것이고, [기적]에 놀라 것이 아니라,

안식일에 병을 고친다.”는데 더 신경을 쓰고 있어요.

 

그 환자는 38년이나 되었으니까, 응급환자가 아닙니다. 그러니까 주일 날 일하지 말고,

그 다음 날에 고치라.”는 주장에, 예수님은 놀라운 말씀을 하십니다.

[예수님]아버지께서 [] 하시니, 나도 일한다.”고 대답하십니다.

여기서 [예수님]아버님과 동일하게 보았다.”는 사실을 말씀하십니다.

 

[안식일]에도 해는 뜨고, [안식일]에도 하나님은 일하십니다.

[말씀]은 하나님 안에서 [일과 안식]<하나>이니까, [안식일]에 일하는 것은 당연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하나님]이심, [예수님=하나님]이심을 은근히 나타내십니다.

 

미국인들도 [주일 성수], (= 주일을 반드시 지키는 일)을 율법적으로 해석하는 경우가 있었어요.

미국 청교도들의 어두운 역사를 보면, 주일에 차량을 운전을 하지 말고, 걸어 다니라.“고 하거나,

주일에 기도 받으러 오는 가정을 내치는 경우가 있었고, 주일에 식당에서 밥을 사 먹는 일에

문제를 삼은 때가 많았다.“고 합니다.

 

실제로 미국에서 겪은 일인데, ”주일에 장로님이 식사를 사 준다고 해서,

우리들은 기대를 하고 같이 가서 식사를 잘 먹었어요. 그런데 마음속으로는 걱정을 많이 했어요.

그런데 장로님의 대답이 [걸짝]입니다. 장로님은 주일에 식사는 하지만,

외상 장부에 적어 놓고, ”돈은 내일 내기로 했다.“고 대답입니다.

 

[안식일]의 의미가 이렇게 이상하게 변하는 것은 [종교화]되기 때문입니다.

율법적으로는 주일에 밥을 사 먹는 일은 잘못된 일이지만, 목적과 의도에 따라 달리 적용할 수도 있습니다,

 

사람들은 공산주의가 평범한 사회를 만든다.”고 주장하지만, 거기는 더 불평등한 사회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질서][일과 안식]에서 조화가 이루어 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스텐리 하워즈씨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우리는 안식일 하루, 부자와 빈자 사이에 그리 큰 차이가 존재하지 않는 세상을 경험합니다.

그러나 현대 사회에서는 부자들만이 일손을 놓을 수 있지만, 가난한 사람들은 생존을 위해 일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안식일이 되면 이 모든 것들이 수정되고 평가되고 재조정되며,

경제 제도가 하나님님의 뜻에 합당하게 편성된 것이 아님을 우리는 기억하게 됩니다.”[Stanley Hauerwas]

 

[평등]이 이 땅에 존재하는 것은 다른 사람과 비교하는 평등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과 안식을 따라 살아가는 것이 참된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자신의 수준이 어떤 수준이든, 하나님의 [일과 안식]을 누리는 것이 더 기쁜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진짜 창조질서를 지키지 못했어요.

 

▶[안식]을 지키기 위해서 4가지 단계가 있습니다.

첫 단계는 안식은 그치는 것입니다. “그만 두는 것입니다.

자기 안에 있는 염려와 불안을 그치라는 것입니다.

둘째 단계는 안식은 쉬는 것입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쉬는 것을 말합니다.

셋째 단계는 안식은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나를 향한 하나님의 소명을 받아들일 때, “우리는 안식에 들어간다.”는 거예요.

넷째 단계는 안식은 축제와 같이 기뻐하는 것입니다.

기뻐하는 것과 같이, 하나님을 예배하는 기쁨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니까 [안식]을 거룩하게 지키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것을 고려해야 합니다.

우리의 것을 내려놓는 것과 쉬는 일과 받아들이는 일과 함께 기뻐하는 축제가 있어야 합니다.

---그런 축제의 자리가 [예배]가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 우리가 할 일은 무엇일까요?

먼저 [믿음]이 있어야 하고, 하나님의 가치를 받아드리고, 진정한 안식을 누려야 합니다.

그 일이 [고통]이 아니라, [기쁨]이 되어야 하고, 하나님의 소명에 따라 살아야 합니다.

 

[십일조]의 의미도 이와 같습니다.

(10)에 하나(1)만 하나님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 안에서 십(10)의 아홉(9)을 사용해야 합니다.

 

“7일 중에서 하루의 안식은 하나님의 시간으로 인정하고, []을 통해서 공동체에서 교제하고,

같이 함께 지내야 합니다. 우리의 24시간 중에서 적어도 칠(7) 분에 일(1) 시간,

[= 3.4시간]은 하나님을 기억하고, 하나님을 예배하는 시간이 되어야 합니다.

 

[아브라함 허셸]이라는 분이 [안식]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안식]은 하나님이 창조한 것 중에서 마지막 작품이 아니라, 하나님이 의도하신 첫 작품입니다.

이것은 천지창조의 목적과 [일하심]의 절정이 [안식]이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은 고통이 아니라, “[]은 안식을 위한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오늘의 말씀인 히브리서 41-2절을 읽어 보십시오.

그러므로 그 분의 안식에 들어가리라는 약속이 남아 있을 동안에 여러분 가운데,

혹 누구라도 거기에 이르지 못하는 사람이 있을까 두려워합시다.

그들처럼 우리도 복음 증거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들은 말씀이 그들에게 무익했던 것은

그들이 들은 말씀과 믿음을 연합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4:1~2)

 

1절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을 정복하는 전쟁의 역사[안식]으로 해석하고, 보여 줍니다.

[전쟁][]로 보고, ”안식을 위한 일[=전쟁]이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 [전쟁]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전쟁]영적인 전쟁입니다. [원리]안식으로 적용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무력]으로 이기는 전쟁이 아니라,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으로 이기는 전쟁입니다.

 

[]이 고통스러운 일이라면 내가 힘들겠지만, 하나님의 입장이라면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고통이 없고 <안식으로 나가는 여정>이 되는 것입니다.

 

▶왜 [안식]에 이르지 못했습니까?

이런 위기 속에 있는 사람들은 [유대인]이고, <우리 자신들>입니다.

[히브리서]신약 속의 구약이라고 할 정도로 구약의 말씀과 같습니다.

 

그 유대인들에게 핍박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지 않고, “안식에 이르지 못할까 두려워한다.”고 말했어요.

그 이유는 들은 말씀에 믿음의 연합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안식]은 믿음으로 화합할 때, 진정한 안식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우리에게 주어지진 일을 다 하고 난 이후에, [영원한 안식]을 누려야 합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일들이 많기 때문에 피곤한 개 아니라, 작은 일이라도 안식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고통스럽고 피곤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의 욕심과 나의 이기심, 그리고 하나님의 안식을 바라 볼 때,

[일과 안식]하나가 되어 하나님의 창조질서가 회복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은 고통이 아니라, 우리의 [기쁨]이 되어야 합니다.

[일과 안식]의 조화를 이루어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기 바라며, 금년에도 승리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