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예수 40일 새벽기도 말씀

작은예수 40일 특새20 2020.01.02

다이나마이트2 2020. 1. 2. 23:42

사랑이 한이 없으신 분   맹렬히 진노한다. (신20:4-24, 출20:2~7)     말씀: 이재훈 목사님

 

오늘의 말씀은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 이기도 하지만,

매우 맹렬히 [진노하는 하나님]이고, ”분노하시는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알게 하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만 사랑하려고 할 때, 아주 이해하기 어려운 하나님의 속성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는데, ”왜 자꾸 진노하실까?”라는 의심이 듭니다.

 

하나님이 [일하심]을 우리가 다 알 수는 없지만, [진리]를 알려고 할 때는 알려 주십니다.

그것은 더 깊은 사랑으로 나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내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알려고 노력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이런 [진리]에 근거해서, 하나님을 알아가기를 바랍니다.

 

▶그럼 “하나님은 어떤 분입니까?“라는 질문을 받으면,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다.“라고 말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본성 자체가 [사랑]이니까, 그런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에서 외우고 있는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라는 말씀과 같이,

하나님이 사랑이심으로 그렇게 기록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사랑]에 도전 받는 것은 무엇입니까?

성경의 곳곳에 진노하는 하나님의 모습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신명기] 말씀처럼, “불 태워버리는 하나님이라고 느끼기 어렵습니다.

 

하나님의 이런 분노하는 모습이 정말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에게 [질투]를 느끼시는 하나님일까?“라는 의심이 들게 만듭니다.

 

[구약] 전체에 나오는 하나님은 심판하는 하나님으로, 노아 홍수의 심판과 바벨탑의 심판,

그리고 아브라함과 후손에 대한 이스라엘의 역사에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보게 됩니다.

또 이스라엘 민족뿐만 아니고, 그 주변의 민족에게도 심판을 하셔서,

끝없는 [전쟁의 역사]가 기록되고 있습니다.

 

그렇듯이 하나님의 사랑과 진노가 모순처럼 계속해서, [전쟁의 역사]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걸 해결하려고 어떻게 노력합니까? 다음과 같이 노력합니다.

첫 번째의 방식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진노]를 단순히 부인하고, 눈을 감으려고 합니다.

또 사람들은 [하나님의 진노]를 굳이 이해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이건, ”나에게 주시는 말씀이 아니라.”고 무시하며, 그냥 지나가려고 하고, 깊이 묵상 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성경을 보더라도 [은혜와 사랑]만 골라서 보고, [하나님의 진노]가 나오면, 거부하려고 합니다.

 

▶왜, 그럴까요?

그건, 잘 이해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건 네게 주는 말씀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그냥 지나갑니다.

그렇게 골라서 읽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편식하는 행위입니다.

 

두 번째로, 초대교회부터 [구약]에서는 심판을 하지만,

[신약]의 하나님은 용서하고 사랑하는 하나님이니까, [신약]을 더 믿게 됩니다.

또 오늘 날에는 진화론적으로 해석하니까, “신이 진화한다.”고 하는 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이것은 마치 눈을 감고, 진실을 외면하는 행위입니다.

 

예수님은 심판에 대하여 많이 말씀하셨습니다. [신약]에서도 최후의 심판을 염두에 두고,

[비유]로 말씀을 하셨어요. 그것은 어떤 사람에게는 감격이지만,

또 다른 사람에게는 최후의 심판을 종교적으로, 사회적으로 성경을 해석하려고 하는 현상입니다.

 

세 번째 방식은 아주 [교묘한 방식]입니다.

[하나님의 진노]하나님의 속성이 아니라, “죄의 결과라고 해석합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은 진노하지 않으니까, “인간의 죄에 따른 설명이다.”라고 주장합니다.

많은 [신앙서적]을 잘못 읽으면, 그런 사상에 오염되기도 합니다.

 

▶왜, 그럴까요? 그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드리지 않는 이유는 그것이 부인되면,

복음을 깨달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복음의 진수[로마서]인데, 로마서 1장부터 하나님의 진노가 시작됩니다.

인간의 타락한 모습과 인간의 죄를 짓는 모습에 하나님의 진노가 쌓이고, 폭발 직전이라고 설명합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진노]가 전제되지 않고는, [하나님의 구원]이 의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왜, 인간은 구원받아야 합니까?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진노] 안에 있으니까, 구원받아야 합니다.

 

그런 심판 가운데서 건짐을 받는 구원이 있기 때문이지요.

그것을 받아드리지 않으면, 망하는 것이니까, 심판은 정해져 있는 것이니까,

우리는 복음이 깨달아 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늘 각성해야 합니다.

 

이제 새해가 되었으니, [성경통독]을 시작하는 분들이 많아졌어요.

[창세기]부터 은혜롭게 잘 읽어 나가다가, 3월이 되면 일제히 [성경읽기]가 중단됩니다.

그것은 [레위기]에 들어가면, 아무리 묵상해도 어렵고, 이해가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덮어 두거나 건너뛰고 [민수기]로 다시 시작합니다.

, 그럴까요? [레위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레위기의 제사가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럼, 왜 그런 내용을 성경에 기록해 두었을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진노]를 설명해 주기 위해, 기록한 것입니다.

 

우리가 [레위기]에서 오해하는 것은 제물을 [제사장]이 준비하는 것으로 생각하지만, 제물을 죽이는 것도 본인이 하고, 모든 준비를 본인이 직접 해야 합니다.

 

▶왜, 그걸 본인이 해야 합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진노]를 본인이 깨달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야 구원의 빛[본인]에게 오고, [본인]이 깨달아 알아지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용서]가 매우 쉬운 것으로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죄를 지으면서도 하나님은 사랑이니까, 이 정도는 용서하겠지?”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사랑하는 하나님이전에, “진노하는 하나님입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하나님은 사랑하고 용서해 주기를 기뻐하지만, [용서]는 쉽게 되는 게, 아닙니다.

 

▶그럼, [하나님]이 어떻게 용서하십니까?

하나님은 거룩한 분이지만, 빛은 어둠과 함께 갈 수 없으니까, “과감한 결단이 필요했어요.

그래서 하나님은 [용서]는 하지만, [용서]는 쉬운 게 아니니까, [십자가]가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냥 없던 일로 하자고 할 수 없으니까, 눈감아 주면 안 되는 일이니까,

[하나님의 용서]는 진노를 표출한 방식으로 [십자가]가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것은 아들의 죽으심을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의 진노]를 쏟아 낸 것입니다.

 

[하나님의 용서]는 그렇게 쉬운 게 아닙니다.

대표적인 표현으로, “하나님은 []를 미워하지만, [죄인]은 미워하지 않는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절반의 진리입니다.

이 말은 절반은 맞고, 절반은 틀린 말입니다.

 

[윌리암 템플]이라는 분이 지적한 말씀을 여기에 인용합니다.

하나님의 진로는 죄에 대한 것이지, 죄인에 대한 것은 아니라고 하는 것은 죄를 죄인과 분리된 것으로 보고, 마치 옷처럼 벗어 던질 수 있는 무언가로 여기는 <천박한 심리학>입니다.

나의 죄는 나의 의지의 잘못된 방향이고, 내가 활동하는 한 나의 의지는 곧 [나 자신]입니다.

만약에 하나님께서 죄를 미워하신다면 그분이 미워하시는 것은 [나 자신]에게 부속된 어떤 첨가물이 아니라, 결국 [나 자신]입니다.“라고 표현하셨습니다.

 

▶왜, 이런 표현을 하셨을까요?

그것은 하나님 중심의 사고가 아니고, ”인간 중심의 사고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섬기는 모습만 보였는데, ”진노하고 심판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는 것은 무서운 [인본주의]가 그 바탕에 깔려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죄와 죄인], 모두를 다 싫어하십니다.

거짓과 부정과 음란, 그리고 많은 죄악에 진노하고, 악을 행하는 사람들에게도 진노하십니다.

 

하나님이 처리한 것은 []이고, [죄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 속에 [진리]가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구원하고, 구원에 이르게 하시니까, 제가 아까 말씀드린 [절반의 승리]라고 말한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을 구분하면, “자기의 합리화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분노]는 무엇입니까?

진노하는 하나님이 어떻게 [사랑의 하나님]이 되십니까?“라고 항의하시는 분이 계시지만,

[하나님의 진노]는 죄와 죄인에 대한 하나님의 거룩한 분노입니다.

 

그것을 깨닫지 못하면, [복음]을 깨닫지 못하고, [복음]을 외곡하게 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분노]를 빼 버리는 순간에, [복음]이 외곡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오심으로 다 끝난 게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의 [십자가]만 붙들고, 의롭고 거룩하게 살아야 합니다. 그러다 보면 때로는 실패할 수 있지만, 그러나 우리는 [십자가]가 있기에 더욱 힘을 내는 것입니다.

 

[존 스토트] 목사님의 설명이 매우 정확합니다. 그 분의 말씀을 인용하면,

주위에 맞서는 하나님의 분노는 어떤 명백한 것도 이유도 없고, 이성을 잃고 폭발하지 않습니다. 그분의 진노는 수수께끼 같거나 비이성적이지 않습니다. 그분의 진노는 예측 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예측이 가능 합니다. 왜냐하면, 악에 의해, 그리고 오직 악에 의해서만, 유발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지체할 수 없는 분노는 죄와 상처 때문이고, 예측이 불가능합니다.

한 참 뒤에, 나 자신이 후회를 하지만, 타락한 본성 때문에, 그런 것이 나타나게 됩니다.

 

저도 기억하는 분노가 많지만, 다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한 가지만 얘기하면, 주차장에서 갑자기 뛰어든 사람 때문에, 제가 아주 놀란 적이 있는데, 그 사람에게 갑자기 그러시면, 어떻게 하느냐?”라고 얘기했더니, “목사님, 안녕하세요?“라고 인사를 하시는 거예요.

 

그건, 순간적인 분노이지만, [하나님의 분노]는 철저히 악에 대해서만 분노합니다.

하나님의 본질은 [사랑]이지만, []에 대해서도 분노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 가운데 있어도, 하나님의 본질적인 사랑은 변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죄와 악에 대하여 분노하지만, 우리를 사랑하시고 도와주는 일에는 변함이 없으신 분입니다.

 

▶사랑의 반대는 [진노]가 아니고, [무관심]입니다.

[무관심]도 사랑의 한 측면이고, ”사랑의 결과입니다.

 

로마서 129절의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사랑에는 거짓이 없어야 합니다. 악한 것을 미워하고, 선한 것을 붙드십시오.“(12:09)

 

▶여기에 나오는 [미움]은 무엇입니까?

[미움]분노의 시작입니다.

[미움]이 있기에, 사람들이 분노하는 것입니다.

 

자녀가 []에 물들어 가는데, 부모의 [분노]가 없다면, 그건 사랑하는 게 아닙니다.

[사랑]은 거짓을 미워하지만, 사랑의 본질은 그 죄와 미움이 일어난다.”는 것은 참된 사랑의 결과입니다. [진정한 사랑]은 악을 미워하고, 선한 것을 붙드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지옥을 만드신 분이 어떻게 사랑이냐?”고 항의하겠지만, 그건 [복음]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반응은 그런 [진노] 없이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존재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악]을 미워하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사람]을 사랑하니까, “악에 대해 분노하는 것입니다.

 

어떤 일반적인 종이에 잉크가 묻었다면, 보통 종이 같으면, 우리는 그냥 버립니다.

그러나 국보급 [고문서]에 잉크가 묻었다면, 그것은 [큰 일]이 나지요.

 

[사랑의 하나님]이 진노하니까, “구원 받는 일이 귀중한 일이 되었어요.

수 없이 [진노] 하여도 인간들이 깨닫지 못하니까, 하나님은 특별한 방법으로 [십자가]를 통해서, 하나님의 구원 방식을 이룩하신 것입니다.

 

[십자가 사건][내가] 진노를 받아야 마땅한데, [예수님]이 담당하신 사건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내가 받을 심판[예수님]이 대신 담당하신 것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용서]는 쉬운 게 아닙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진노]가 끝나야, [하나님의 용서]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십자가 사건]은 사랑에 한이 없으신 분이 진노하니까, [구원의 십자가]에 맹렬히 쏟으셨기에, 그 문제가 해결된 것입니다. 그렇게 맹렬한 [진노]를 보내신 하나님 때문에, 우리가 구원을 받게 된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은 자신의 마음을 [십자가]에 쏟으심으로, 구원을 완성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거기에 [”진노]를 뺀다는 것은 우리의 복음을 외곡하게 됩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살아갈 때에도 [십자가]를 생각하며, 의롭고 거룩하게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를 범하면, 하나님은 진노하고, 지금 내가 받을 진노를 예수님이 대신 받으신 것입니다.

 

때때로 우리는 실패 할 수 있지만, [십자가]가 있기에, 우리는 다시 시작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의 하나님으로 믿고 있지만, 죄와 악에 대해서는 진노하는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우리는 온 맘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