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예수 40일 새벽기도 말씀

작은예수 40일 특새8 2019.12.17

다이나마이트2 2019. 12. 17. 17:57

하나님의 계시  네가 웃었다  (18:9-15)         말씀: 이재훈 목사님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신 하나님, 그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것은

인간의 본성으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신 것은 아브라함이 선택하기 이전의 일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먼저 그를 선택하신 것입니다.

만약에 하나님이 그를 부르지 않았다면, 이런 일들은 벌어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의 가정은 우상을 섬기는 가정이었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내가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닙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선택하고, 그에게 믿음을 심어 주는 것입니다.

 

인간은 스스로 믿을 수 없고, 인간 스스로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어 나왔습니다.

인간에게는 [자유의지]가 있기에, 스스로 하나님을 떠났고,

의도적으로 불순종을 하는 것도 전인격적으로 자신이 선택한 일입니다.

 



[구원]은 무엇입니까?

그런 인간을 하나님께 돌아오게 하는 것이 [구원]입니다.

 

어느 날 갑자기 구세주가 세상에 오셔서 우리의 죄를 사해 주었다면,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자유의지]가 있어서 자기 의지적인 생각으로 판단할 것이지만,

하나님은 역사 속에서 아브라함을 선택하여, 구원의 역사를 준비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약속을 주시고, “믿음으로 의롭다하신 자녀에게 [행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먼저 능력을 주시고, ”그 능력을 가지고 행동하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온 마음으로 순종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약속을 믿고, 따라오라.”는 간절한 부탁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그렇게 따르기가 어려웠던 것은 그 만큼 아브라함이 의심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서두르지 않고, 그를 이끌어 주시고 기다리십니다.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은 달라진 것이 없습니다. 아브라함이 [믿음의 탈선]을 할 때에도

하나님은 변하지 않고, 약속을 바탕으로 움직이십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우리들을 전능하신 하나님을 체험하게 만듭니다.

, 하나님을, “전능하신 하나님이라고 부를까요?

하나님 안에는 모든 []을 가지고 있지만, “전능하신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것은

하나님이 택한 사람에게 약속을 주시고, 100% 신실하게 이루시는 하나님이니까,

그 분을 전능하신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구태여 약속을 하실 필요가 없는 분입니다.

[약속]이라는 말은 사전에 불신한다.“는 생각이 깔려 있는 말입니다.

 

사람들은 언제든지 약속을 깰 수 있는 불신과 의문이 있으니까, 보증서 쓰고, 도장도 찍지만,

하나님은 그럴 필요가 없으신 분입니다.

 

그런데 왜, 아브라함에게 약속을 하셨을까요?

그것은 오직 우리 안에 있는 의심을 해결해 주고, 순결한 믿음을 만들어 주기 위한

하나님의 배려이고, 방법입니다.

 

우리가 전능하신 하나님을 어찌, 다 알 수 있습니까?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은 인간을 6일 째에 창조하셨습니다.

 

, 인간을 첫날에 만들지 않았을까요?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첫째 날에 사람을 창조했으면, ”자기와 같이 이 세상을 창조했다.”고 우길 것 같으니까, 세상을 창조한 다음에 사람을 만드셨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인간은 불신과 죄가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고리로 엮으신 것이 [약속]입니다.

하나님은 그 [약속]을 통해, 우리를 이끌어 가고, 우리와 동행하길 원하십니다.

 

그러나 아브라함과 사라의 마음속에는 불신이 여전히 사라지지 않습니다.

인간 안에 있는 죄는 깊은 뿌리가 내려져 있어서 한 순간에 믿음이 있다가도,

한 순간에 믿음이 없어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믿음을 [행함]으로 실천할 때에, 견고해 집니다.

그러니까 내 안에 찾아온 믿음을 한번이라도 실천한 사람,

그렇게 행동한 사람에게는 그 믿음이 변하지 않습니다.

 

누군가에게 사랑을 고백하려고 할 때, 그 사람에게 사랑하는 행동을 하면,

내 인격 속에그 사랑이 남아 있어서, 그 사람을 사랑하게 됩니다.

 

이와 같이 내 인격 속에 그 사랑이 남아 있듯이,

내 생각 속에 그 사랑이 남아 있어서, 결국은 그 사람을 사랑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행함]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행함]은 결국 우리의 믿음을 견고하게 해 주는 방법입니다.

 

다시 말해서, ”너의 믿음을 너의 자유의지로 한번 해 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명령]이니까, 우리가 명령을 따라야 [믿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찾아오십니다.

창세기 1715-16절 말쓰에서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이름을 바꿔 주면서,

 

내가 그녀에게 복을 주어, 반드시 그녀를 통해, 아들을 낳게 해 주겠다.”고 말해 줄 때,

아브라함의 반응은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린 채, 웃으며 속으로 말했습니다.

”100살이나 먹은 사람이 과연 아들을 낳을 수 있을까?“라고 웃었습니다.

 

아브라함의 대답은 한편으로 이해가 갑니다.

100살 된 남편과 90살의 아내의 사이에서, 이 부부를 통해 아이가 생긴다.”는 것을

믿을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속으로 웃은 거예요.

예수님이 승천할 때에도 제자들은 눈으로 보았지만, 의심하는 자가 있었듯이, 인간은 모순된 존재입니다.

그러나 이런 모순이 상상하기 어렵지만, 한편으로 놀라면서 땅에 얼굴을 묻습니다.

 

이들 부부의 속마음은 어떨까요?

그럴 리야 없겠지만, 그렇게 된다면, 하나님의 경이로움에 놀라는 반응이고,

그 다음으로, 의심하며 어이 없어하는 심리적인 반응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19절에서 더 구체적으로 더 자상한 말씀을 해 주십니다.

네 아내 사라가 네 아들을 낳을 것이고, 너는 그 이름을 이삭이라고 할 것이다.

내 가 그와 내 언약을 세우고, 그 뒤에 올 자손을 위해, 영원한 언약을 세울 것이다.”(17:19)

 

하나님의 약속은 아주 구체적이고, 더 상세합니다.

먼저 사라를 통해, 아들이 태어날 것이고,

그 이름을 [이삭]이라고 하고, 그 이삭과 영원한 약속을 할 것이다.

그 때는 내년 이 맘 때 쯤이루어 질 것이다.”

----이렇게 자세하고 상세한 그림을 그려 줍니다.

이런 구원의 약속의 청사진은 처음부터 보여주지 않고, 하나님은 조금씩 보여 주십니다.

 

이제 아브라함이 벌릴 [믿음의 도전]이 더 심각해집니다.

바로 내년에, “아들이 생긴다.“고 하니, 더욱 더 마음이 설레고, 흥분됩니다.

 

창세기 18장에서, 세 천사를 통하여, 하나님이 또 찾아오십니다.

그 때는 [사람의 모습]으로 찾아오는데, ”장차오실 성육신의 모습으로 미리 나타나는 것입니다.

 

, [사람]을 통해, 나타나십니까?

결국, [사람]을 통해서, [사람]으로 이 땅에 오실 분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사랑한 사람에게 프로포즈 할 때, 다른 사람을 시켜서 고백합니까?

아니지요. 직접 고백합니다.

 

우리가 사랑을 할 사람인데, 어느 누구를 시켜서 고백하지 않습니다.

내가 직접 사랑을 전해야 하듯이, 하나님도 직접 찾아오신 것입니다.

 

창세기 189-10절 말씀을 함께 읽으십시오.

" 그들이 아브라함에게 물었습니다. 네 아내 사라는 어디 있느냐? 아브라함이 대답했습니다.

장막 안에 있습니다. 그러자 여호와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내년 이맘때쯤 반드시 네게 돌아오겠다. 그때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을 것이다.

사라는 아브라함의 뒤에 있는 장막 입구에서 듣고 있었습니다.“(8:9-10)

 

[말씀]사라에게 들으라.”고 하는 말입니다.

 

11-12절 말씀에서 사라가 웃으면서 말했습니다.

아브라함과 사라는 이미 나이가 많아 늙었고, 사라는 아이를 낳을 수 있는 시기가 지난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사라는 속으로 웃으면서 말했습니다.

내가 이렇게 늙어서 기력이 없고, 내 주인도 늙었는데 내게 과연 그런 기쁜 일이 있겠는가?”(18:11-12)

 

사라가 속으로 웃었는데, 이건 어이 없어하는 [웃음]입니다.

물론 하나님을 거부하는 것은 아니지만, “믿기 어렵다.“는 표정입니다.

 

이렇게 믿음에는 엇갈리지만, 불신하는 마음에는 아브라함도, 사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브라함과 사라의 불신앙, 그 모습은 마치 [우리의 모습]과 같습니다.

 

아브라함과 사라의 [웃음]은 어떤 의미일까요?

하나님의 경이로움에 놀라는 것이 아니라, 죄의 쓴 뿌리에서 나오는 [웃음]이고,

[웃음]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대해, 의심하는 것이니까, 불신의 장애물이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런 작은 일린데도 모두 다 보고 계십니다.

사라는 사실이 아니라고 부인하지만, 하나님은 15절에서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사라가 내가 늙었는데, 정말 아이를 낳을 수 있겠는가?“라고 하니,

여호와께서 어려워서 못할 일이 있겠느냐? 내가 내년 이맘때 쯤, 곧 정해진 때에 네게 돌아올 것이며,

사라에게 아들이 있을 것이다.” 사라는 두려워 거짓말을 했습니다.

" 저는 웃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여호와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아니다. 네가 웃었다.”(18:13-15)

 

사라는 두려워서 거짓말을 하지만, 하나님은 사라의 속마음을 다 보고 계십니다.

여기서 하나님은 두 가지 중요한 말씀을 하십니다.

네가 왜?, 웃었으며

내년 이맘때쯤이라는 시점을 알려 주십니다.

 

하나님은 사라가 웃는 것을 보면서, 네 안에 있는 불신의 장애물[웃음]이라고 지적하십니다.

이 두 부부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인정하지 못하고, 아직 체험하지 못한 상태이니까,

웃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것을 지적하며, 그런 장애물을 걷어내기 원하십니다.

우리도 이번 작은 예수 40일 새벽기도회를 통하여, 그런 [웃음]을 걷어내는 시간이 되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맘속에, 영혼 깊은 곳에 숨어있는 [의심의 웃음]을 걷어내야,

전능하신 하나님의 그늘 안에 머무르게 됩니다.

 

, 이런 질문을 했을까요?

이와 비슷한 질문으로, ”마리아에게 잉태될 것인가?“라고 질문한 적이 있습니다.

처녀의 몸에서 아이를 임신하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기에,

처녀의 몸에서 생명이 잉태된다.”는 것은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하나님의 기적]은 자연법칙을 무너뜨리지 않고, 그 사람에게 개입합니다.

모든 아이는 모태로부터 자라는 것이 자연 법칙이고, 그걸 따라야 합니다.

 

모든 생명은 모태에서 10개월이 지나야 태어납니다.

아무리 급해도 그런 과정을 거쳐야 됩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인간이 힘으로는 만들어 낼 수 없는 상황 하에서,

생명이 잉태되도록 만드는 능력을 보여 주십니다.

 

[언약]은 우리에게도 유효합니다.

우리가 거듭 태어난다.”는 것은 믿어지지 않지만, 우리가 거듭날 수 있습니다.

 

사라의 몸에 생명을 잉태하게 하신 하나님은 마리아의 몸에서도 생명을 잉태케 하셨습니다.

그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 우리는 온전히 그 분의 말씀을 믿고, 온전히 순종하고,

아이가 없는 사라가 생명을 잉태하듯이, 우리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그늘 아래에 머무시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