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예수 40일 새벽기도 말씀

작은예수 40일 특새7 2019.12.16

다이나마이트2 2019. 12. 16. 10:28

하나님의 명령  온 마음으로 (창17: 1-8)          말씀: 이재훈 목사님

 

우리의 믿음은 날마다 한 걸음씩 하나님과 동행할 때, 자라납니다.

요즘 우리는 아브람의 생애와 더불어 구약에 나타난 복음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구약을 흔히 [율법]이라고 생각하고, 신약을 [복음]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구약도 복음이고, 신약도 복음입니다.

구약도 율법처럼 보이지만 그 속에는 하나님의 은혜가 들어있습니다.

 

종교개혁의 3가지 목표는 오직 은혜, 오직 성경, 오직 믿음입니다.

그것을 설명하면, 인간의 공로가 아니라, “은혜로 구원 받는다.“는 것과,

오직 성경을 인정하는 것과 인간의 행위가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말입니다.

 

[카톨릭]에서는 행위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고,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것을 부정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 차이는 [오직]이라는 단어에 있습니다.

 

[카톨릭]에서는 믿음 풀러스 행위가 칭의를 가져 온다고 해석합니다.

그것은 믿음이 필요 없다는 것이 아니고, “행위가 더해져야 의롭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개신교]에서는 믿는 등식은 같지만, 행위를 뒤로 보내고,

믿음으로 의롭게 되며, 의로운 자에게 더해지는 것이 행위라는 것입니다.

 

▶그 차이는 무엇입니까?

다 같은 것과 같지만, ”[행위]를 어디에 두느냐?”는 것이 다른 것이고, 차이입니다.

[카톨릭]처럼, 믿음 + 행위---->결과적으로 칭의를 이룬다.“는 것이고,

이것은 우리가 볼 때는 [율법주의]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다시 [도표]로 정리하면, 로마 [카톨릭]은 믿음 + 행위 가 칭의에 이르고,

[개신교]는 믿음 + 칭의(= 의롭게 된 자에게)---> ”결과적인 행위로 열매 맺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는 행위에 대한 명령은 의로워지는 조건이나, 결과는 다르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런 시각에서 아브람의 인생은 어느 시점에서 의롭다고 했는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아브람의 인생에서 언제 의롭게 되었습니까?

[그저께]지요, 창세기 15장을 공부한 3일 전, 토요일입니다.

아브람에게 행위를 요구하지 않고, 두려움에 있는 아브람에게 하나님이 먼저 찾아오셔서,

약속을 확인해 주어서, 그 믿음이 의롭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이신칭의]입니다.

 

오늘은 창세기 17장의 말씀으로, 1-2절 말씀을 읽으십시오.

아브람이 99세 때, 여호와께서 그에게 나타나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다.

내가 나와 너 사이에 언약을 맺을 것이다. 그리고 내가 너를 심히 크게 번성하게 하겠다.“(7:1-2)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99세에 다시 나타나셨습니다.

창세기 1616절에서, ”하갈이 아브람에게 이스마엘을 낳아 주었을 때,

아브람은 86세였습니다.“라고 했으니까,

86세에 이스마엘이 태어났고, 99세에 하나님이 나타나셨으니,

99-86세를 빼면, 그 차이가 13년입니다.

 

하나님은 13년 동안 침묵한 것이 아니라, 기다리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시간동안에 무슨 일이 일어났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브람은 13년 동안에 무슨 일을 벌어 졌습니까?

아브람은 [하나님의 약속]이 있었는데도 그것을 의심하고, 불순종하고, 탈선합니다.

자식을 기다리다가 지쳐서 엉뚱한 생각을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자식을 막고 있으니, “이제 우리가 낳을 때라고 판단해서,

아내의 권유를 거부하지 않고, 사래의 말을 듣고, 자기 종인 하갈을 통해서,

[이스마엘]을 낳게 되는 사건이 벌어집니다.

 

165절에, “그러자 사래가 아브람에게 말했습니다. 내가 당하고 있는 이 고통은 모두 당신 책임입니다.

내가 내 종을 당신 품에 두었건만 이제 그녀가 임신했다고 나를 멸시합니다.

여호와께서 당신과 나 사이에 판단하시기 바랍니다.”(16:5)

 

이 말씀은 젊잔하게 설명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당신 때문이라고 항의하며 싸우는 장면입니다.

그래서 그때부터 이 가정에 불행이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기다렸으면 이와 같은 사건이 없었을 텐데,

그 사건으로 중동지방의 분쟁이 시작되게 되었으며, 역사적으로 큰 비극이 벌어집니다.

 

[중동의 갈등]은 적자인 [이삭]과 첩의 자식인 [이스마엘]의 싸움입니다.

지금도 그 아픔과 상처가 계속해서 나타나고 이어집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서두르지 않고 기다리십니다.

이제 13년의 침묵을 깨고 하나님이 나타나, ”온 마음으로 순종하며 깨끗하게 행하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의롭게 여기는 사람에게 하는 명령입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순종하는 사람에게 의롭다.“고 하셨어요.

너의 믿음에 합당한 행동을 하고, ”믿음의 온전함을 보이라.”는 말씀하십니다.

 

[믿음]은 머리 속의 생각이 아니라, 행동할 때에 나타나는 것입니다.

 

▶우리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어떻게 경험합니까?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자에게 의롭다고 여기고, 행동할 때 체험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믿음을 가짐으로, 우리에게 하나님의 명령을 이행하도록 만듭니다.

하나님은 융단폭격을 하듯이, 계속해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2-3절에서, “내가 나와 너 사이에 언약을 맺을 것이다. 그리고 내가 너를 심히 크게 번성하게 하겠다.

그러자 아브람이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렸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7:2-3)

 

계속해서 반복되는 말씀입니다.

너에게 자손을 번성케 하고, 그 땅을 통해서 복의 통로로 만들어 주겠다.“

  아브람에게 약속한 복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영원한 복을 주신다.“는 약속의 말씀입니다.

 

[약속]은 아브람, 한 사람에게 하신 약속이지만, 그 후손에게도 영원한 약속을 주신 것입니다.

 

[영원]은 시간이 길어지는 것이지만, 하나님의 영원은 시간을 뛰어넘는 삶을 허락하는 언약입니다.

 

하나님이 그런 언약을 맺으셨으니, 우리는 전능하신 그늘 안에 영원히 머무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이것이 전능자의 그늘 안에 있는 축복입니다.

 

그래서 창세기 17장에서 아브람의 이름을 바꿔 주십니다.

[아브람]에서 [아브라함]으로, 이 이름은 열국의 아비가 되라는 뜻입니다.

[사래]에서 [사라], 이 이름은 열국의 어미가 되라는 뜻입니다.

-----이 이름은 [양성 평등]의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왜, 이름을 바꿔 주었을까요?

첫째로, 하나님의 약속을 확인해 주기 위해서

둘째로, 과거의 불신앙을 씻어 주기 위해서 두 사람의 이름을 바꿔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13년 만에 나타나셔서 행함을 강조하니까, 아브라함이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렸습니다.

 

▶왜, 엎드렸을까요?

피곤해서 엎드린 것이 아니라, 말씀으로 찾아오신 하나님에게 탄복하여, 무릎을 꿇고 엎드린 것입니다.

이것은 자신의 신앙을 회개하고, 하나님께 굴복한 것입니다.

 

[이신칭의]로 구원 받는 것은 하나님이 내 버려두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그 사람에게 명령을 수행하도록 만들어 주십니다.

 

아브라함의 불순종 때문에, 대대로 중동 땅에 싸움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13년 동안 침묵하신 하나님이 다시 나타나, 아브라함의 가정에게 이름을 바꿔 주고,

새롭게 이끄시는 하나님나에게도 믿음의 생활에 합당하도록 이끌어 주시고,

내 안에 있는 불신앙을 없애 버리고,

2020년 새해를 온전하게 맞이하도록 이끌어 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