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제를 용서해야 할까요? (마18:21-35) 말씀: 이상준 목사님
유대인들은 죄에 대하여 “죄는 하나님께 빚을 지는 일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은 빚을 지고 고생하는 사람들이 많아서
예수님도 이런 비유를 들어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오늘은 “죄의 용서에 대한 말씀“을 드립니다. 21절 말씀을 읽으십시오.
"그때 베드로가 예수께 와서 물었습니다. 주여, 제 형제가 제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 (마18:21)
▶베드로가 왜 이런 질문을 했을까요?
다혈질인 베드로를 화나게 해서 하는 질문이지만 그 당시의 유대인들은 "세 번 까지 용서한다"는
개념은 있어도 베드로는 "일곱 번을 용서 한다"고 얘기하면서 아마도 의기 양양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솔직히 베드로는 용서할 마음이 별로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어떤가요? 우리도 베드로와 비슷하지 않을까요?
예수님은 질문에 대한 답변으로 22절 말씀과 같이 대답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일곱 번만 아니라 70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해야 한다" (마18:22)
예수님의 대답은 상상을 초월하는 파격적인 대답입니다.
이 말씀은 "끊임없이 계속해서 용서하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나는 계속해서 너희들을 용서하고 있는데 너희는 왜 그러느냐?"라고 꾸짖는 말씀이니
그게 "하나님의 마음" 입니다.
[용서]는 용서의 횟수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용서하려는 마음이 중요합니다.
우리의 문제는 그것을 용서할 것인가? 아니면 용납할 것인가?가 중요합니다.
[용서]와 [용납]은 다릅니다.
▶[용서와 용납]은 어떻게 다릅니까?
[용서]는 "나 중심"이고,
[용납]은 "상대편 사람이 중심으로" 그대로 끌어안는 것입니다.
[용서]는 영어로 forgive로, 용서해 주는 것이고,
[용납]은 forbear로, 서로 끌어 안아 주는 것입니다.
여기서 예수님의 대답은 명확했는데 23절 말씀에서 비유를 들어 다시 설명해 줍니다.
"그러므로 하늘나라는 마치 자기 종들과 빚을 결산하려는 왕과 같다"(마18:19)고 하십니다.
이것은 마치 베드로에게 "입장을 바꿔서 생각해 보라"고 얘기하면서,
그 때 하나님은 갑자기 "왜 하나님이 너를 용서해 주어야 하는데?"반문 합니다.
베드로는 "나는 사람이니까, 그렇게 까지는 못합니다"라고 대답 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들의 실제 생활에서 용서하지 못하는 일들이 많습니다.
요즘에 방학 철인데 1달간 자녀들이 학교에 가지 않고 집에만 있으면 즐거우신가요?
오히려 자녀들이 집에서 말썽을 피우는 것 보다 학교에 나가는 것이 더 행복하지 않나요?
우리는 하나님의 용서는 당연시 하고 나 자신의 용서는 인색합니다.
그것은 나 자신의 용서는 "나 중심이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예수님의 사랑”은 분명하고 뚜렷하고 분명하지요.
①첫째로, "내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나 중심"이 아니라, "그 사람 중심의 사랑을 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네 이웃을 네 몸 같이 사랑하라"는 말입니다.
②둘째로,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과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우리 가정에서 "신혼 때의 사랑이 식었다"고 실망하지 마세요.
그것은 사랑이 식은 게 아이라 내 마음이 식은 것입니다.
그렇게 때문에 "아무리 용서할 수 없다"고 해도
예수님은 "그래도 품어 주라는 의미에서 용서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인생이 끝나고 주님의 앞에 가면 "내가 왜, 너를 용서해야 하나?"라는
말을 듣게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24-25절 말씀을 함께 읽으십시오.
"왕이 결산을 시작하자 1만 달란트를 빚진 사람이 왕 앞에 나오게 했다.
그러나 그는 빚 갚을 돈이 없었기 때문에 주인은 그 종에게 그 자신과 아내와 자녀와 전 재산을 팔아
갚도록 명령했다."(마18:24-25)
▶여기서 1만 달란트는 얼마나 되는 돈인가요?
학자마다 다르지만 1만 달란트는 우리 돈으로 [10조원] 정도로 너무나 큰 돈입니다.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전 재산을 팔아도 갚을 수 없는 빚을 탕감 받고
또 자유도 주었습니다. 그러나
▶그 종은 나가서 어떻게 행동을 했나요?
28절 말씀에서, "그러나 그 종은 밖으로 나가 자기에게 10데나리온 빚진 동료 종을 찾아냈다.
그는 동료의 멱살을 잡으며 ‘빚진 돈을 갚으라.‘고 말했다."(마18:28)
정작 자기는 왕에게 빚을 탕감 받았는데, 100데나리온(= 우리 돈으로 천만원 정도),
"빚진 자에게 돈을 갚으라"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10조원을 탕감 받은 자가 일천 만원 빚진 자에게 ”돈을 갚으라.”고 협박했으니,
말이 되지 않는 상황입니다, 결론적으로, 35절 말씀과 같이 얘기합니다.
"만일 너희가 진심으로 자기 형제를 용서하지 않는 다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행하실 것이다."(마18:35)
우리는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 것이지 행위로 구원을 받지 않습니다.
여기에 한 가지 더 거절하기 어려운 말씀이 마태복음 6장 12절 말씀에 나옵니다.
그 말씀은"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용서한 것 같이 우리 죄도 용서해 주소서"(마06:12)
우리가 죄 지은 형제를 용서해 줄 때, 하나님이 우리를 용서해 주신 것과 같이
우리 죄를 용서해 주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말씀하시지만,
[진리]는 있는 그대로 받아 드려야 합니다. 그리고 인간적인 논리에 갇히면 안됩니다.
예수님은 실천적인 구원을 말씀하시는 게 아니고 존재적인 구원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구원을 애기할 때 이성적인 접근을 하지 말고 존재 자체로 접근해야 합니다.
행위의 구원이냐? 아니면 믿음의 구원이냐?
행위의 구원도 인간의 표현이고 믿음의 구원도 인간의 표현이니 착각하지 마십시오.
오직 구원은 하나님에게서 나옵니다.
[믿음]도 “하나님의 선물”이고, [행위]도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미쁘신 분이니까 하나님을 향해서 믿음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것은 거룩한 삶의 행위가 아니라 나의 감동으로 일어나는 주님의 은혜입니다.
그러니까 [구원]은 행위도 주고 믿음도 주지만 "오직 하나님에게서 나온다"는 사실을 믿으십시오.
우리는 수학 공식만 외우고 100점을 맞기를 바라는 사람과 같습니다
공식만 일고 깊은 체험이 전혀 없는 사람과 같습니다.
또 공식은 알고 있지만 주님이 원하는 삶을 살지 못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마태복음 7장 21절 말씀을 함께 읽으십시오.
"내게 주님 주님 하는 사람이라고 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사람이라야 하늘나라에 들어 갈 것이다."(마7:21)
누구나 주님의 이름을 부르면 "구원 받는다." 했는데 입으로 그렇게 말한다고 그렇게 되지 않습니다.
우리의 영혼이 죄 안에서 구원해 주신 예수님을 만나서 구원을 받았기에 이를 받아드려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야 하고 그런 용서의 체험이 있어야 합니다.
내가 "예수를 믿는다." 하면서 구원을 받았는데 내가 정말 구원 받을 수 있을까요?
[죄의 용서]를 수학의 공식처럼 적용하면 곤란합니다.
하나님은 용서하기 이전에 이미 당신을 용납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절대로 당신을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그것은 이미 하나님의 아들과 딸로 용납하셨기 때문입니다.
부부가 결혼하는 것은 믿을 만 하니까 결혼을 하는 것이지만 그런 사랑을 평생토록 유지하려면
이제부터는 거꾸로 해야 합니다.
믿음이 있기에 사랑하는 것이 아니고 사랑하기 때문에 믿어 주는 것입니다.
그가 당신을 사랑하지 않는 것은 그 사람이 변한 것이 아니라
내가 변했기 때문입니다.
[탕자의 비유]에서 저는 "아버지가 아들을 용서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아버지는 아들을 이미 용납했기 때문에,용서는 불필요한 것입니다.
집 나간 아들을 이미 용납했기에 아들을 그냥 받아드린 것입니다.
아니면 베드로처럼 이번 까지는 용서해 주지만, "그 이상은 곤란하다”고 여기는 것이지요.
이것은 말로만 용서하는 것이고 “마음의 용서”가 아닙니다.
26-27절 말씀에서,
"그랬더니 종이 그 앞에 무릎을 꿇고 간청했다. 조금만 참아 주시면 모두 갚아 드리겠습니다.
주인은 그 종을 불쌍히 여겨 그를 놓아주고 빚을 없애 주었다.”(마18:26-27)
그러나 28-29절 말씀에 나오는 10데나리온을 빚진 종은 동료의 멱살을 잡고,
"빚진 돈을 갚으라" 강요했습니다,
▶예수님의 두 가지 비유에서 공통점은 무엇입니까?
[전자]는 "갚을 수 없는 돈"이고 [후자]는 "갚을 수 있는 돈"입니다.
인간이 인간에게 할 수 있는 것과 인간이 할 수 없는 것은 다릅니다.
[죄의 문제]는 우리가 해결 할 수 없습니다.
▶왜,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왔습니까? 그것은 죄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오셨습니다.
그러나 내가 용서하는 것은 내가 할 수 있는 일입니다.
33절의 말씀을 읽으십시오.
"내가 너를 불쌍히 여긴 것처럼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겼어야 하지 않았느냐?
그 주인은 화가 나서 그 종을 감옥 관리들에게 넘겨주며 빚진 것을 다 갚을 때 까지
감옥에 가뒀습니다"(마18:33-34)
결국에 감옥에 갇히게 한 것은 종을 불쌍히 여기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죄를 지은 자에게는 구원이 있지만, 은혜를 모르는 자에게는 구원이 없습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죄인]입니다.
에베소서 2장 8절 말씀을 보면,
"여러분은 믿음으로 인해 은혜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것은 여러분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엡2:8)
[은혜]는 그 자체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러니까 은혜가 아니면 우리는 살 수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이상범 화가의 "진정한 화가의 실력”이라는 글을 소개 하고 끝마치려 합니다.
화가는 모델을 두고 그림을 그립니다.
그러나 완성된 그림이 훌륭한 것은 모델이 아름답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좋은 그림은 모델이 아름답기 때문에 돋보이는 것이 아니라,
화가의 솜씨가 좋기 때문에 좋은 평가를 받습니다.
훌륭한 그림을 그립니다.
좋은 사람이란 좋은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좋지 못한 사람도 사랑해서 결국에는 좋은 사람으로 만들어내는 사람을
좋은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그 능력을 우리는 [사랑]이라고 하지요.
내가 누군가를 사랑하지 않는 것은 사랑할 만한 대상이 없어서가 아니라,
내 마음 안에 사랑할 마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가장 탁월한 능력은 비행기를 만드는 기술도, 돈을 많이 버는 재주도 아닌,
바로 사람을 “사랑하는 능력”이니까요.
[은혜]는 “흘러가는 것”입니다.
그런 은혜를 체험하시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부족한 나를 용납하신 하나님, 그 은혜가 있었기에 나를 예수 믿게 하시고
나를 "은혜의 통로"로 살아가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우리를 십자가의 복음 안에서 녹아들게 하옵소서. 아멘.
'주일 말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참된 회개(2) 자기 십자가를 지라 (마16:24-25) 2019.09.01 (0) | 2019.09.01 |
---|---|
참된 회개(1) 돌이키고 돌이키라. (겔33:11) (2019.08.25) (0) | 2019.08.25 |
7가지 치명적인 죄 7. 탐색(성적인 죄) (마5:27-30) (2019.8.11) (0) | 2019.08.11 |
7가지 치명적인 죄 6, 허영 (마6:1-4) (0) | 2019.08.05 |
7가지 치명적인 죄 5. 탐욕 (왕상 21:1-16) (0) | 2019.07.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