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예수 40일 새벽기도 말씀

33. 성령과 예배 요4:23-24, 빌3:3

다이나마이트2 2019. 1. 29. 22:20

2019년 1월 18일 금요일

33.  성령과 예배   4:23-24, 3:3         말씀: 이재훈 목사님

 

오늘은 성령 안에서 드리는 예배에 축복에 대해서 말씀을 드립니다.

, 파이퍼 목사님은 열방이 기뻐하게 하라는 책에서, 다소 충격적인 말씀을 하십니다.

그것은 교회의 궁극적인 목표는 [선교]가 아니라, [예배]입니다.

 

그 이유는 [선교]가 존재하는 곳에는 [예배]가 없기 때문입니다.

[선교]하는 곳에는 [예배]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선교]는 잠깐 필요하지만, [예배]는 영원히 남습니다.

[선교][예배]의 동력이자, [예배]의 목표이기는 합니다.

 

선교의 목표는 민족이 기뻐하는 것이지만,

[예배]는 하나님이 기뻐하는 것이니까, 당연히 [예배]가 더 중요하지요.

 

시편 673-4절에 보면,

, 하나님이여, 사람들이 주를 찬양하게 하소서, 민족들이 주를 찬송하게 하소서.

민족들이 즐거워하며, 기뻐 노래하게 하소서. 주께서 사람들을 공의롭게 심판하시고,

땅위에 민족들을 통치하실 것입니다.“(67:3-4)

 

이 말씀에서 열방은 기쁘고, 즐겁게 노래할지니라는 말씀에서,

이 책의 제목을 삼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설명에서 오해하면, 안 됩니다.

 

이 말씀은 [선교][예배] 중에서 어느 것이 더 중요하냐?”는 얘기가 아니고,

선교와 예배가 분리될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선교의 목표는 예배가 없는 곳에 예배를 있게 하고,

열방들이 하나님의 보좌 앞에 드리는 것이 하나님 나라의 모습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진 곳에는, 반드시 [예배]가 있어야 합니다.

 

[예배]가 있는 곳에는 또한 [선교]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예배 공동체와 선교 공동체를 연결하는 분이 [성령님]이고,

성령 안에서 예배할 때, 반드시 [선교]를 하게 됩니다.

 

선교사들의 사역을 보면, 항상 살아있는 [예배]가 그 가운데 있습니다.

[예배]가 살아있는 곳에는 반드시 [선교]가 있고, [선교]가 있는 곳에는 반드시 [예배]가 존재합니다.

 

그렇게 이루어 주는 엔진이 바로 [성령님]이고,

온누리교회는 그런 예배공동체, 성령공동체, 선교 공동체를 지향합니다.

 

이 세 가지는 언제나 함께 이루어지는 공동체가 되어야 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는 교회는 항상 [예배][선교]가 공동으로 존재하고, 함께 연결되어 있습니다.

 

예배는 보는 것입니까, 드리는 것입니까?

[예배]는 보는 것이 아니라, 드리는 것이고,

내가 구경하는 게 아니고, [예배]를 드리는 주인공이기 때문입니다.

 

예배의 정의는 하나님이 존귀한 분이라는 것을 보는 것이고,

그렇게 받아야 되는 존귀함을 드리는 것입니다.

 

이런 사실을 우리는 예배를 드리면서 알 수 있습니다.

그 존귀함을 드리는 것이 하나님께 독백처럼 보이지만,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는 증거가 됩니다.

 

진정한 예배는 어떤 모습일까요?

예배를 드리는 자마다 성령 충만한 성도들의 모습에서,

하나님의 임재가 나타나는 예배가 되어야 하고,

예배드리는 백성들이 충만한 즐거움과 기쁨이 있어야, 하나님의 원하는 예배의 모습입니다.

 

부모는 어떤 때에 즐거워합니까?

부모가 자녀로부터 영광 받는 것은 자녀가 부모와 함께 같이 있다는 것이 가장 즐겁다고 합니다.

자녀의 얼굴을 보고, 재미있게 사는 모습이 가장 큰 즐거움이라고 말하고 계십니다.

 

나는 부모님을 기쁘게 하고 있습니까? 부모님에게 값진 선물을 드리는 것이 아니고,

자식의 얼굴을 보고 싶은 게, ”부모님의 마음입니다.

 

하나님이 가장 기쁠 때는 언제 입니까?

하나님이 가장 영광을 받을 때는 부모님의 마음과 같습니다.

하나님에게 무엇을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입장에서 보면, ”그건 이미 다 내 껀데***** “

하나님의 것을 그냥 돌려받는 일인데****“라고 하시면서 웃습니다.

 

하나님을 신뢰하고, 가장 위대하고 기뻐하시는 분이라는 사실과,

영광 받으실 분이라는 사실을 알고, 우리가 경배드리는 것입니다.

 

[조나단 에드워드]는 하나님께 영광 받으시는 두 가지 모습은,

첫째로,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할 때,

둘째로,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 안에서 즐거울 할 때,

가장 최고로 영광 받으신다.”는 사실입니다.

 

참된 예배는 무엇입니까?

예배하는 자의 모습에서 참된 기쁨이 있어야 합니다.

어떤 고난이 와도, 평안하고 기쁨으로 예배 드려야 합니다.

 

세상은 어렵게 돌아가도, 예배드리는 자에게 기쁨이 있다면,

그것은 살아있는 예배입니다. 이것이 참된 예배자의 모습입니다.

 

우리는 어떤 상황에도 무너지지 않는 기쁨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니까 예배는 어떤 취향의 문제가 아니고,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과 함께 즐거움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사마리아 수가성의 우물가에서 한 여인을 만났는데,

그 여인은 자기를 숨기기 위해, 일종의 신학적인 질문을 하지만,

예수님은 그녀의 속마음을 알고 있었습니다.

 

자기 속에 있는 죄를 감추기 위해, ”예배의 장소문제를 꺼냅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은 그리심 산에서 예배드리는 것을 원하지만,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에서 예배를 드리는 것을 원했습니다.

 

그럴 때, ”어디서 예배를 드리는 게 좋습니까?“라는 질문에,

예수님은 그 대답은 장소가 중요한 게 아니고, 영과 진리로 예배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어디에서나 계시므로, 예배 장소가 중요한 게 아닙니다.

여기서 장소는 [본질]이 아니고,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참된 예배]

영과 진리로 예배를 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개역 성경에서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 드려야 한다.“는 번역은

신령한 마음과 진정한 마음으로 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말 성경에는 영과 진리로 예배 드려야 한다.“로 번역하는데,

여기서 []인간의 영이 아니고, ’성령님의 영을 말하고,

[진정]이라는 말은 정직한 인간의 마음이 아니고, [진리]를 말합니다.

 

이것은 각각 두 개가 별개인 것으로 생각하지 말고, 실제는 [하나]입니다.

우리는 예배 가운데 진리를 듣고, 진리를 묵상하고, 진리를 나누어야,

그 말씀은 모든 삶의 기초가 되는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진리는 예수님이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고 했으니,

이것이 예배의 가장 중요한 요소입니다.

 

예배에 열심히 참석 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고,

예배드리면서 나는 무엇을 생각하는가? 예배 중에 무엇을 생각하는가?

살아 계신 하나님은 어떤 분인가?”를 생각하면서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그동안 우리가 [진리]라고 믿었던 것들이 벗겨지고, 떠나갈 때,

우리 안에 진리로 기쁨이 충만 하시는 법입니다. 그러므로 [진리]는 하나입니다.

염려하는 것은 [진리]를 우리가 잘 모르기 때문에 헷갈리는 것입니다.

 

가장 확실한 [진리]는 무엇입니까?

빌립보서 33절 말씀을 읽으십시오.

하나님의 영으로 섬기고, 그리스도 예수를 자랑하며,

육체를 내 세우지 않는 우리가 참 할례를 받은 사람입니다.”(3:3)

 

여기서 섬긴다.”라는 단어는 “[하나님의 영]으로 예배를 드린다는 말입니다. 빌립보 교회도 구약의 율법을 중요시하는 [할래 당]이 있었다고 합니다.

[참 할래] 받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영]으로 예배드리는 자입니다.

 

우리가 섬김을 할 때, 자기를 내세우는 사람은 [참된 섬김]이 아닙니다.

내가 사람에게 구제할 때, ”내가 받는다.”는 전제에서 구제하면,

그건 구제가 아니고, [하나님의 영]으로 섬기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하는 만큼 하나님이 주신다.“는 생각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물론 예배를 드리고 나면, 내 마음에 위로가 됩니다.

 

그런 마음이 드시는 분은 초보 단계의 믿음이고,

오래된 분들은 그런 생각을 하면, 안 됩니다.

그런 생각을 하면, 예배드릴 때, ” 편히 주무 신분입니다.

 

예배드리면, 마음이 가벼워지는 것은 맞는 말이지만,

내 마음이 편안한가?“를 생각하셔야 합니다.

 

현재 유럽은 일주일에 평균 10개씩 교회가 문을 닫습니다.

영국에도 자꾸 교회가 문화재로 팔리고, 교회가 술집으로 팔린다고 합니다.

 

스코틀랜드에서 치마를 입고 전통 복장을 하고, 설교를 합니다.

그때부터 교회가 소멸하기 시작했어요.

 

지난 50년 전에 교회를 보면, 그때부터 설교에서 염증을 느끼고, 교회에 위기가 찾아옵니다.

그것은 건물을 높이 세우고, 형식적인 예배가 그 원인입니다.

 

그 당시에 기도는 감동에 따라 하지 않고, 기도서라는 책자만 보고,

형식적으로 기도를 했어요. 그런 경향이 지금의 문제가 된 것입니다.

 

사람들이 자유롭게 기도하고, 찬양하는 것을 배우고, 예배 형식을 강조하다보니까 생긴 현상입니다.

그건 아주 위험한 생각입니다.

 

그렇게 크고 멋진 건물을 가지고, 감동받는 것이 문제입니다.

예배는 건물과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겉으로 신비스러운 맛은 있지만, 그것이 [참된 예배]가 아닙니다.

그런 교회에는, 경건이 아니고, 위험을 강조 하는 것이기 때문에,

[말씀의 능력]이 나오지 않습니다.

 

교회 건물이 화려하면 인간적인 느낌은 좋겠지만,

그것은 예배하고는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참된 예배][마음과 영]으로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우리의 예배는 어떻습니까?

예배의 형식과 의식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예배는 [영과 진리]로 예배 드려야 합니다.

 

어떤 형식과 질서를 강조하지만, 거룩한 게 아니고, 거북한 예배이기 때문에,

잘못된 예배는 감동이 있어야 하고, 성령 안에서 예배드릴 때 예배에는 두려움과 경외심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만 바라보고, 성령 안에서 함께 예배드리는 [설레임]

동시에 [기쁨]이 있어야 합니다.

어떤 교회에 가면, 으리 의리한 강단은 있지만, [냉냉 함]이 흐르는 교회 분위기는 좀 곤란하지요.

 

온누리교회는 강단의 장식이 없고, 아주 단순합니다.

교회는 [열정]이 있어야 하고, 성령님과의 [친밀함]이 보여야 합니다.

 

우리는 모일 때마다 [진리]를 발견하고,

성령 안에서 진리를 아는 지식이 많아져야 합니다.

 

우리의 인격이 점점 더 귀해 지고, 우리의 내면이 변화되어서,

인격의 열매가 우리의 현실에서. 우리의 삶에서, 나타나야 합니다.

 

[참된 예배]에는 우리의 마음에 변화가 나타나야 합니다.

마음의 변화라는 말은 온전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 줄 알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결론적으로,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자는 어떤 축복을 받습니까?

첫째로, 자기 스스로 변화하는 축복을 받고,

둘째로, 분별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이런 축복을 겸손히 받고, 일평생 하나님만 바라보고,

진정한 예배자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