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월 17일 목요일
32. 성령과 양심 로마서8:16, 9:1 말씀: 이재훈 목사님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할 때, ”인격적인 존재“로 창조하셨습니다.
여기서 “인격적인 존재”라는 말은 “하나님의 형상 중에서 일부를 본떠서, 나누어 만드셨다“는 말입니다.
그것은 다른 피조물에게는 주지 않고, 오직 사람에게 스스로 생각을 하고,
계획하고, 실천하는 기능을 주셨습니다.
”인격적인”이라는 말은 사람에게 “자유의지를 주셨다“는 말입니다.
그 자유 의지의 핵심적은 ”양심“입니다.
이 [양심]은 ”자기 의지를 가진 사람“으로 만들었다는 말입니다.
▶ 인간이 하나님을 알 수 있는 기능은 무엇일까요?
① 첫째는 자연이고, ② 둘째는 양심입니다.
만물을 바라보고 [자연]을 보면서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알 수 있고,
우리의 내면을 파 헤쳐 보면, 거기에는 [양심]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양심]을 주셨기 때문에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죄]는 우리를 무감각하게 만들고, [양심]도 파괴시킵니다.
그러나 “파괴된 양심”은 소멸 되지 않고, 그대로 존재합니다.
[죄]가 들어오면, 양심의 불빛이 희미하지만,
그렇다고 그 빛이 꺼지지 않지만, 거기에 [죄]가 존재 합니다.
그래서 우리 “찌그러진 양심”은 망가진 상태로 존재하고,
하나님은 이런 [양심]을 회복시키려고 노력합니다.
인간은 자신이 이런 [양심]을 회복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타락한 양심”은 하나님이 회복시키고,
[양심]을 통해서 “하나님과 관계”를 유지해야 합니다.
“새 언약의 축복” 중에서 “양심의 회복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디모데전서 4장 2절에, ”화인 맞은 양심”이 나오는데,
”자기 양심이 화인 맞아서, 외식하므로 거짓말하는 자들이라“
쉬운 말로 풀어보면, ”이런 가르침은 양심이 마비된 거짓말하는
위선자들에게서 나오는 것입니다.“(딤전4:2)
아메리칸 인디언들이 양심을 그림으로 표시하는데, 삼각형이 움직이면, 모서리로 찔리게 만들어서,
어린 아이의 양심은 [삼각형]으로 그리고, 어른들의 양심은 [원]으로 그렸다고 합니다.
이것은 ”화인 맞은 양심“을 정확하게 표시하는 말입니다.
[삼각형]으로 그려야 정상인데, 어른들이 양심을 [원]으로 그렸다는 것은,
어느 쪽에도 찔림이 없게 그린 것은 ”그만큼 양심이 없다”는 말입니다.
이사야서 5장 20절을 읽으십시오.
“아, 너희들에게 재앙이 있을 것이다. 나쁜 것을 좋다고 하고, 좋은 것을 나쁘다고 하는 사람들아,
어둠을 빛이라고 하고, 빛을 어둠이라고 하는 사람들아, 쓴 것을 달다고 하고,
단 것을 쓰다고 하는 사람들아”(사5:20)
이 말씀을 보면, 완전한 거짓과 외곡 된 말로, 휩싸여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보혈로 정결케 되지 않은 양심은 스스로를 속이는 말입니다.
우리는 성령으로 거듭났지만, [양심] 자체는 “하나님의 음성”이 아닙니다.
그러나 “양심이 얼마나 정확하게 움직이느냐?“에 따라서
[하나님의 음성]을 제대로 듣게 되기도 하고, 외곡 되어 듣기도 합니다.
사도 바울의 예를 보더라도, 예수 믿는 사람을 핍박하던 자가
”나는 양심에 따라, 예수를 핍박하는 자“라고 하는 것은
성령으로 정결케 된 양심만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자기 양심에 따라 사는 것이 “판단의 기준이 되어야 한다“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를 보여 줍니다.
그러니까 양심을 믿으면 안 됩니다.
우리의 양심은 위선과 거짓과 타협하고, 자기를 속일 수 있으니까
”자기 양심을 믿는다.”는 말은 아주 위험한 말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내 마음에 오셔서, “타락한 양심”을 깨끗하게 변화시키는 것인데,
그분이 [성령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히브리서 9장 14절의 말씀을 읽으십시오.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을 통해, 흠 없는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신 그리스도의 피가 더욱 우리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해,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않겠습니까?”(히9:14)
[성령]을 통해서 우리의 [양심]이 점점 깨끗해집니다.
[더러운 양심]이 [선한 양심]으로, 성령의 역사는 [양심]을 정결케 해 줍니다.
▶ 그럼 [성령 충만]은 무엇입니까?
“매일 매일 정결하고, 깨끗한 양심으로 사는 상태“를 말합니다.
이렇게 사는 것이 ”성령 안에서 사는 삶.“이라는 것입니다.
[양심] 이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누구와 함께 알다“라는 말입니다.
그것은 성령이 임하므로, 그 양심에 빛을 비추어 주는 것과 같이, 제 기능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양심]은 ”해 시계와 같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해 시계는 해가 떠야 알 수 있듯이, [양심]은 해가 떠야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양심]은 해가 비출 때에, 제 기능을 작동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빛이 약하여 희미하면, 창조하신 하나님의 힘이 미치지 못합니다.
모두 다 착한 것 같은데, 방향이 잘못된 경우와 같습니다.
그것은 타 종교에도 “빛이 있어야 한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성령님]과 [양심]은 함께 같이 움직이는 것입니다.
▶ 그렇다면, [성령 충만]은 어떤 상태입니까?
[선한 양심]이 깨어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선한 양심]은 ”신호등의 역할“을 합니다.
우리의 [선한 양심]에 빨간 불이 들어오면, 움직이면, 안 되고,
파란 불이 켜지면 가도 되고, 노란 불이 들어오면 기다려야 합니다.
우리 모두가 양심 안에 있을 때, 깨끗해지는 것입니다.
우리의 양심을 [악한 양심]에서 [선한 양심]으로 변화되기를 바랍니다.
내 마음이 깨끗해지는데, 성령이 들어와서 그 역할을 하게 됩니다.
베드로전서 3장 16절을 읽으십시오.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선한 양심]을 가지십시오.
여러분이 비방을 받을 때, 그리스도 안에서 행한 여러분의 [선한 행실]을 비방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수치를 당하게 하려는 것입니다.”(벧전3:16)
[선한 양심]이 “하나님의 응답”입니다.
[선한 양심]은 ”하나님이 도우라“고 하는 사람들에게 향하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는 [선한 양심]이 작동 하는 것이고,
성령님이 빛을 비추어 주는 것인데, [선한 양심]이 “올바로 가라“하면, 올바로 향합니다.
▶ [선한양심]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약한 행실]을 언제나 배려하고, 품어 주어야 합니다.
로마의 시대의 문제는 ”우상에게 바친 제물을 먹을 수 있느냐?” 따라서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우리나라도 제사 음식을 가져오면, 먹지 않는 분도 계시는데, 제 생각으로는 그냥 신경 쓰지 말고,
맛있게 잡수십시오.
그런 일들이 고린도 교회에서도 나타났어요.
고린도전서 8장 10절에서 12절 말씀을 읽으십시오.
“지식이 있는 당신이 신전에 앉아서 먹는 것을 누가 보면, 양심에 거리낌이 있으면서도
용기를 얻어 무사하게 바쳐진 제물을 먹지 않겠습니까? 연약한 사람은 당신의 지식 때문에,
이와 같이 여러분이 형제들에게 죄를 지어 그 약한 양심에 상처를 주는 것은
그리스도께 죄를 짓는 일입니다.”(고전8:10-12)
▶ 여기서 “지식이 있는 당신”이라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제물을 먹는 것이 “아무 일도 아니라“는 분을 말하고, 믿음이 강한 분 말합니다.
양심이 [연약한 사람]은 약한 양심에 그리스도께 죄를 짓는 일입니다.
약한 양심에 상처가 되면, 그리스도께 죄를 짓는 일입니다
로마서 9장 2절 말씀에서 나옵니다.
”나는 그리스도 안에서 진실을 말하고 거짓을 말하지 않습니다.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내게 이것을 증거 합니다.
곧 내게 근심이 있다는 것과 내 마음에 끊임없는 고통이 있다는 것입니다.“(롬9:1-2)
바울의 양심이 성령 안에서 증언하는데, 고통과 근심을 느끼고 있어요.
▶ 왜, 그럴까요? 바울의 생각으로, 그건 자기 자신의 근심이 아니고,
잃어버린 영혼에 대한 근심과 걱정입니다.
이스라엘이 먼저 택함을 받았지만, ”버려진 영혼에 대해 근심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선한 양심]이 작동되어, 양심의 가책을 받는 거예요.
우리는 온 열방에 얼굴을 알지 못하고, 만나 보지 못한 영혼들에게,
고통스럽게 근심 할 때, [선한 양심]으로 회복되어 근심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이런 바울의 근심이 “하나님의 기적”을 일으킵니다.
[새 생명]을 탄생시키고,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납니다.
저는 “신유의 은사”가 나타난 분들을 만나서 관찰해 보니,
그들은 기도 받는 사람의 몸의 질병을 “기도하는 자신이 아파하는 것을 느낄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런 사람은 기도할 때, 자기가 먼저 아파해요.
▶ 어떤 사람이 이런 은사를 나타내나요?
부모의 심정은 자식이 아플 때,
”차라리 내가 아프고 싶다“는 [긍휼한 마음]을 보인다고 합니다.
[신유의 은사]가 있는 사람은 그들의 아픔과 고통을 함께 느끼는 사람입니다.
이것이 바울이 느꼈던 고통이고, 근심입니다.
우리의 [선한 양심]이 더욱 선해 지고, 정결해 져서, 깨끗해지기를 바라며,
그런 약한 영혼에게, 이 새벽에 기도하는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거룩한 성령님, 나의 더러워진 양심을 깨끗하게 하시고,
더욱 더 [선한 양심]이 되도록 축복하고, 서로 돕는 교회가 되게 하옵소서.
나만 축복 받기 원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를 통해,
믿지 않는 다른 영혼에게 복음이 전달되기를 바라며,
하나님의 축복이 다른 사람에게 연결되는 축복이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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