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12월 21일 금요일
11. 성령을 소멸하지 말라. (살전5:16-23) 말씀: 이재훈 목사님
우리의 [신앙]은 과거의 기록 속에 남아 있는 신앙이 아니고 미래를 생각하는 신앙이 되어야 합니다.
또 자기가 만족하고 자족하는 신앙이 아니고
거룩한 성령의 충만한 삶을 더욱 갈망하는 신앙이 되어야 합니다.
▶ “성령님”을 설명하는 표현에는 어떤 말들이 있습니까?
① 말씀하시는 성령님,
② 갑자기 “바람처럼” 임하시는 성령님,
③ 강하게 “불처럼” 임하시는 성령님,
④ 순결한 “비둘기 같은” 성령님이라고 사용합니다.
------이런 표현은 우리의 이해를 돕기 위해 사용됩니다.
먼저 “말씀하시는”성령님“은 하나님의 ”초월성“을 강조하는 말씀입니다.
”바람처럼 임하시는 성령님”은 소식도 없이, “갑자기 오신다.”는 의미로,사용되고 있습니다.
또 강하고 ”불처럼 임하신다.”고 설명하는데, “불처럼 태워 버린다.“는 의미로 사용합니다.
또한 성령님을 거룩하고, 순결한 ”비둘기 같은 성령님“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이는 예수님이 세례 받을 때 성령이 ”비둘기처럼 내렸다”고 기록되었듯이
성령님은 “바람처럼 불처럼 비둘기 같은 성령님”으로 비쳐지고 있습니다.
오늘은 비둘기의 종류를 살펴보면 여러 종류가 있겠지만
우리들이 주변에서 볼 수 있는 Pigeon이라고 불리는 집비둘기와 Dove라고 불리는 산 비들기가 있고
공원에 가면 흔히 보이는 Pigeon 비둘기가 있는데 사교성도 좋고 사람들과도 잘 어울리기를 좋아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먹이를 주기만 하면 다가오는 비둘기입니다.
또 어떤 비둘기는 고상하고 민감한 비둘기로써 온유하고 평화를 상징하는 비둘기도 있습니다.
Dove는 사람에게 이끌리어 가는 새가 아니고 사람들이 비둘기에게 맞추어 가는 새로
평화롭고 순결하고 온유한 새로 자리 매김을 했으며
소음을 조금만 내도 그냥 조용히 날아가 버리고 마는 특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과 평화를 상징하는 비둘기가 요즘에는 배설물로 인하여
”사람에게 해롭다”는 말도 나옵니다.
어찌되었든 예수님이 세례를 받을 때에 임한 새가 바로 “Dove“라는 비둘기인데 소리와 환경에 민감하여
시끄럽거나 환경이 맞지 않으면 쉽게 날아가지만 순결하고 평화를 사랑하는 의미에서
사람들은 비둘기를 ”예수님”과 비유하기도 합니다.
▶ 이 “비둘기”가 보여주는 이미지는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온유하고 겸손하며 부드럽고 평화로운 분이기에
비둘기와 같아서 성경에 그런 기록들이 나오는 겁니다.
우리들이 “바람처럼 불처럼 비둘기 같은 성령님”이라고 말하는 것은
순결하고 거룩하기 때문에 “성령님을 비둘기 같다”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성령님은 우리에게 인격적으로 역사하시는 분이기에
우리의 마음에 “바람처럼 임하시기도 하고 불처럼 강하게 다가오셔서 태우기도 하고
”완고한 우리의 마음을 깨뜨리기도 합니다.
“성령님”은 우리에게 인격적으로 다가 오시는 분입니다.
그것은 성령님이 “인격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인격적인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님]이 우리에게 들어오면
우리의 성품도 “성령님의 인격”으로 변하여 닮아가게 됩니다.
따라서 “성령님의 인격성”을 우리가 깨닫지 못하면
우리가 성령님과 함께 동행 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성령님의 “민감성”을 미리 알고 대비해야 합니다.
오늘 말씀인 데살로니가 전서 5장의 말씀 중에서 가장 중요한 구절은
“성령님을 소멸하지 마십시오.”라는 19절의 말씀입니다.
여기서 “소멸“이라는 단어는 ”사라지다, 없어지다.“는 뜻입니다.
”성령의 세례“를 받아서 능력이 생겼는데
어느 날 갑자기 성령이 떠난 것과 같은 ”부재감을 느낄 수 있다”는 말입니다.
이 말씀은 기름 부으심을 받은 사울에게 “내가 너를 떠났다”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는 말씀입니다.
삼손에게도 어느 날 갑자기 ”힘이 없어지게 만든 역사“가이것을 증명하는 말씀입니다.
아무리 ”성령의 능력“을 받은 사람일지라도
”하나님이 아니다”라고 생각되면 [성령님]은 조용히 떠나게 됩니다.
그러면, 그 때부터 “하나님과의 관계”는 단절되는 것입니다.
이는 아주 “무서운 얘기”입니다.
우리들도 내 마음에 분노가 일어나면 민감한 비둘기가 떠나듯이 [성령님]이 조용히 떠나 갈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성령님]이 떠나지 않도록 내 마음을 단속하고
[성령님]이 내 마음에 계속해서 머물도록 기원해야 합니다.
우리의 “자유의지” 안에서 그렇게 임재 하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성령님]은 우리를 위로하시는 분이지만 우리가“자기감정”을
앞 세워서 분노를 일으키면 “그래, 너 혼자 잘해 보라”고 떠나십니다.
내 경험과 내 방식을 앞세우고 고집을 부리며 살려고 할 때에
[성령님]은 조용히 떠나갑니다. 이게 “성령님의 민감성“이기 때문에 ”비둘기와 같다“고 표현한 것입니다.
에베소서 4장 31-32절 말씀을 읽으십시오.
”모든 악독과 분노와 화내는 것과, 고함치는 것과,비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내 버리십시오.
서로 친절하고 인자하며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처럼
서로 용서 하십시오.“(엡4:31-32)
이 말씀은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 성령이 언제 떠납니까?
”성령의 인격성“을 무시하고 ”성령의 능력“을 무시하면 [성령님]은 말없이 우리 곁을 떠납니다.
이 말씀을 다른 말로 바꿔서 말하면 ”자신의 의지대로 살라“고 하면서, 성령은 떠납니다
여기서 ”우리에게 버리라”라고 강조하는 전반부의 말씀 “악독, 분노, 화내는 것, 고함치는 일,
비방하는 일은 ”성령을 근심하게 하는 일“이고,
후반부에 나오는 친절하고, 인자하며, 용서하라“는 말씀은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말씀“입니다.
[악독]은 우리 마음의 ”쓴 뿌리”로, 대표적인 마음의 상처가 굳어져서 나타나는 증상으로
처음에는 누군가에게 상처를 받았지만 치료하지 않으면,그 후에 스스로 자신을 미워하고
다른 사람을 멀리하고 배타하게 됩니다.
그런 마음의 상태가 되면, 성령님은 떠나 갈 수 밖에 없어요.
[성령님]은 치료하고 회복시키는 [영]인데 그런 강팍한 마음에는 머무를 수 없습니다.
우리의 “자유적 의지”에 부합되지 않으니까, 성령님은 떠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자유적 의지”를 성령님에게 맞추어 나가야 합니다.
바람같이 나타나고 불같이 강하게 나타나는 성령님은
우리 안에 죄를 이길 수 있는 능력을 주셨지만 “모든 것을 성령님께 맡긴다.“는 말은 싫어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자신이 “의지적인 주권“을 가지고 있더라도 우리는 [성령님]에게 맞추어 나가야 합니다.
일반적인 우리의 삶은 [성령님]이 기뻐하는 삶으로 맞추어 가야 합니다.
우리 안에 비둘기 같은 ”성령의 임재“가 머무를 수 있도록, 우리가 스스로 조절해야 합니다.
그것이 오늘의 말씀인 ”성령을 소멸하지 말라”는 포인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신 성령님”을 조절할 수 없습니다.
우리 자신이, 우리를 조절해서 현명하게 맞춰 가야 합니다.
그것이 성령을 소멸하지 않는 방법이고 지름길입니다.
▶ 성령의 방해자가 아니고 협력자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오늘 말씀에서 가장 중요한 말씀이 “성령을 소멸하지 말라”는 말씀이니까 위에서 읽은 것과 같이
악독과, 분노와, 화내는 것과, 고함치는 것과, 비방하는 것을 없애 버리고
우리의 마음을 친절하고, 인자하며, 용서하는 마음으로 채워 가야 합니다.
이 두 마음은 서로 연결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항상 같이 생각해야 합니다.
잘못하면, 우리가 성령님의 “동역자”가 아니고 “방해자”로 나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성령님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사람은 역시 바로 “나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똑바로 [성령님]을 파악하고, 또 확인하고 내가 올바르게 행동해야 합니다.
이상한 일이 벌어지면 모든 것이 하나님에만 책임 있는 것이 아니고
우리의 “마음 상태”도 중요한 것입니다.
모든 일은 하나님이 해결해 주시지만 우리는 “자유의지“가 있으니까,
그 선택은 우리의 [몫]이고 우리가 결정해야 합니다.
무조건 하나님에게 ”내가 기뻐할 수 있게 해 달라.“라고 기도하면 안됩니다.
성령님도 민감성이 있으니까 우리도 민감하게 반응해야 합니다.
자기 자신의 영혼을 살피고 하나님께 영광스런 기도를 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어릴 적에 예루살렘에 갔을 때 당연히 그곳에 있어야 하지만
”예수님이 그곳에 안 계셔서 찾아 나섰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여기서 우리는 “당연히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내 안에 있는 상태를 먼저 점검하고 밖에 있는 상황을 생각해야 합니다.
“항상 기뻐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고, 모든 일에 감사하지만
그렇게 되기 위해 내 마음의 상태를 먼저 점검하고
그 후에 하나님에게 바람을 기도해야 합니다.
또 빌리 그래함 목사님에게 어느 분이 와서 ”목사님, 이 사람이 술 취하지 말라는 말씀을 어겼는데
징계해야 합니까?”라고 물으니까,
대답하기를 “성령 충만하지 않은 성도에게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라고 반문했다고 합니다.
▶ 이는 무엇을 의미합니까?
외면에 나타난 잘못을 징계하려 하지 말고
“내면에 있는 잘못을 먼저 챙기고, 잊지 말라“는 교훈을 알려 주는 말씀입니다.
빌리 그래함 목사님은 밖에 드러난 잘못도 중요하지만 그것보다 먼저
우리 내면에 나타나지 않은 ”성령 충만하지 못한 것은 어찌 할 것인가?“를 먼저 생각해야 한다는 대답이지요.
성령님의 은사와 성령님의 역사는 계속 이어져서 나타납니다.
이것은 오순절에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고,
그런 역사는 언제나 계속해서 나타나는 일입니다.
▶ 성령을 소멸하지 말고 성령님과 동행하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한 마디로 ”악을 버리리라.”는 말씀입니다.
그것이 “성령을 소멸하지 말라“는 말씀과 같은 얘기입니다.
우리의 삶속에는 [거룩함]이 있어야 하는데,
거룩한 성령님이 언제나 같이 존재하려면 ”모든 악을 버려야 합니다.“
우리가 [거룩]을 유지하려면 모든 ”악“과 결별해야 합니다.
23절 말씀을 읽으십시오.
” 평강의 하나님께서 친히 여러분을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
여러분의 영과 혼과 몸을 다 흠이 없게 지켜 주시기를 빕니다.“(살전5:23)
”평강의 하나님”이 곧“비둘기같이 임하는 성령님”입니다.
[악]이 들어 있는 사람에게는 “평화”가 깃들 수 없습니다.
▶ 우리를 온전히 거룩하게 지키려면 어떻게 합니까?
비둘기 같은 성령님이 우리와 함께 있어야 합니다.
우리 자신도 거룩하고 흠 없이 살려면 비둘기 같은 성령님을 우리 마음속에 모시고
내 안에 [악독함]을 버리고, 항상 기쁘게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비둘기 같은 성령님이 떠나도
그걸 알지 못하는 우리의 “둔감함“을 회개하고
이제 우리의 성령님이 나에게서 소멸하지 않게 하옵소서.
성령님, 저에게 성령이 소멸되지 않도록 저를 붙잡아 주시고
민감한 성령님이 떠나가지 않게 제 마음 속에 있는 악독함을 버리고
성령님에게만 귀를 기울여 거룩하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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