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엘하 QT

왕이 압살롬과 입을 맞추니라(삼하14:25~33)

다이나마이트2 2014. 5. 28. 23:12

2014년 5월 28일 수요일

사무엘하 14:25~33 우리 언행은 내면을 반영합니다.

 

말씀요약:

온 이스라엘 가운데 압살롬 같이 아름다움으로 칭찬 받는자가 없었다.

그러나 압살롬이 2년 동안 예루살렘에 있으나 왕의 얼굴을 못 보았다.

압살롬은 요압을 통하여 다윗을 만나려고 여러번 사람을 보냈으나

요압 조차도 만나주지 안았다.

압살롬의 종들이 요압의 보리밭에 불을 놓아 버렸다.

요압이 항의하기 위하여 압살롬의 집을 방문했다.

압살롬은 왕과 좀 만나게 해 달라고 부탁한다.

요압이 왕에게 고하매 왕이 압살롬을 부른다.

왕이 압살롬과 입을 맞춘다.

 

말씀묵상:

오늘 본문의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은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계신가 하는 마음이 먼저 든다.

오늘 본문에 등장 인물은 3명이다.

압살롬, 요압, 다윗이다.

각자 자기 소견에 옳은대로 행하는 것 같은 마음이 먼저 든다.

 

1. 압살롬이다.

압살롬은 다말의 오빠로서 여동생 다말이 이복 형인 암논에게 강간 당한 일로 인해서

2년간 계획을 세워서 양털을 깍는 일이 있을 때 왕자들을 초대해 형 암논을 살해해 버렸다.

그리고는 외할아버지 집으로 도망가서 3년이나 그술에서 지내고 있었다.

이런 압살롬을 데려오기 위한 계획을 요압이 만들었다.

 

인간적인 요압의 계획이 어느 정도 성공하는 듯이 보여서

그술에서 지내던 압살롬을 예루살렘으로 데려는 왔지만

예루살렘에 있으면서도 2년 동안 아버지 다윗을 한 번도 만나지 못했다.(28)

 

아버지 다윗을 만나고 싶지만 다윗은 불러 주지 않는다.

요압을 통하여 아버지 다윗을 만나도록 주선해 주길 부탁하려고 사람을 보내지만

요압마저 압살롬을 만나주지 않는다(29)

종들을 시켜서 요압의 보리 밭에 불을 놓아 버린다.(30)

아버지 다윗에 대한 거절감이 폭발해 버린 것일까?

살인자의 죄책감이 아직도 쓴뿌리로 작용을 하는 것일까?

요압에 대한 내면의 분노가 노출 된 것일까? 

아마도 아버지 다윗에 대한 엄청난 분노가 쌓이고 있을 것 같다.

이런 부모는 존경 받는 부모이기 보다는 복수 당하는 부모가 될 가능성이 크지 않을까?

 

또 본문에서 보이는 압살롬의 이상한 태도가 마음에 걸린다.

압살롬이 요압을 만나서 요압에게 이야기 하는 가운데

예루살렘에서 이렇게 사는니 차라리 그술에서 마음 편히 사는 게 나았다고 불평한다.(32)

자기 잘못을 뉘우치기 보다는 아직도 원망하고 불평하는 모습이 보인다.

어떤 상황에서도 불평하는 자는 존귀히 여김을 받기가 어렵다.

 

또 내가 만일 죄가 있으면 왕이 나를 죽이는 것이 가하니라(32)라고 말하고 있다.

압살롬의 심리 상태를 보면 아직도 살인한 행위가 의롭다고 착각하는 것 같다.

오히려 지난 5년간 자신을 방치한 아버지 다윗이 더 불의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것 처럼 보인다. 

아직도 압살롬은 멀었다는 생각이 든다.

하나님 없는 인생이 생각하는 수준이 바로 이런 정도 이지 않을까?

 

2. 요압이다.

요압은 다윗의 군대장관이다. 다윗의 핵심 측근 증의 측근이다.

살인자로 3년이나 도망하고 있는 아들을 그리워하는 아버지의 마음을 읽고

드고아에 있는 슬기로운 여인을 선택해서 압살롬을 예루살렘까지 데려왔다.

인간적으로 매우 지혜로운 사람 처럼 보인다. 그러나 인간의 지혜는 한계가 있다.

 

그러나 2년 동안 예루살렘에 있으면서도 압살롬은  왕의 얼굴을 못 보았다.(28)

압살롬은 요압을 만나기 위해서 여러번 사람을 보내어도 아무 대답이 없었다.(29)

자기 밭에 불이 나고 나서야 항의 하기 위하여 압살롬의 집에 왔다.(31)

자기에게 조금의 손해만 있으면 당장 행동하는 인간이지만

남의 부자지간의 어려움과 상황은 애써 외면하는 인간의 모습이 보인다.

요압도 아버지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읽었으면 이렇게 압살롬을 방치하면 안된다.

 

3. 다윗이다.

다윗은 딸 다말이 강간을 당해도 아무런 조취도 안하고 화만 내었고(13:21)

아들 압살롬이 살인을 하고 3년간 도망자로 살고 있을 때(13:38)

아들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많이 있었던 것 같다.(14:1)

요압이 드고아의 지혜로운 여인을 보내어 압살롬을 데려오게 할 때에

예루살렘에 데려오는 것을 허락 했지만 2년 동안 아들 얼굴을 처다 보지도 않았다.

자녀에게 엄청난 거절감을 심어 주고 있는 것 처럼 보인다. 

 

그렇게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자로 살았던 다윗이다.

모든 삶의 기준이 하나님 이였던 다윗도 지금 이 순간에는 방황하는 것 처럼 느껴진다.

아버지로서 어떻게 이렇게 무기력 할 수 있을까?

 

사랑하는 자기 아들임에도 불구하고 범죄하고 도망자로 3년간

예루살렘에 돌아 왔을 때에 2년간 5년이나 아들을 처다 보지 않은 냉정한 아버지이다.

책망할 것은 책망하고 가르칠 것은 올바로 가르쳐야 하는데

자신이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범하고 우리아를 죽이고 하는 과정에서

그 신실하신 하나님을 잊어 버린것 같다.

 

오늘 본문에서 마지막 한가지 희망적인 내용은

왕이 압살롬과 입을 맞추었다(33)라는 내용이다.

예수님과 가룟유다의 입 맞춤처럼 배신의 입 맞춤 처럼 느껴지기도 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왕이 먼저 아들에게 입 맞춤을 한다.

이런 화해의 포옹이 나의 아버지와의 관계에서도 아들과의 관계에서도 있기를 기도한다.

 

하나님 아버지

압살롬을 통해서도 요압을 통해서도 다윗을 통해서도

아버지의 마음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압살롬도 요압도 다윗도 하나님께 기도하는 모습은 보이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묻는 내용도 보이지 않고

자기 이익을 따라 행동하고 자기 욕심을 따라 화를 내는 모습을 봅니다.

내 삶에 이런 혼미한 상황, 내 소견에 옳은대로 행하는 삶이

방치되지 않도록 성령님 인도하여 주옵소서.

사방으로 막히는 것과 같은 상황 주님이 어디에도 안계시는 것 같은 상황에서도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인생되게 하옵소서.

세상의 지혜 인간적인 지혜가 아니라 주님 주시는 지혜로 살게 하옵소서.

거룩하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