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QT

그 집 사람은 하나도 거기 없었더라.(창39:11~23)

다이나마이트2 2013. 4. 2. 23:10

2013년 4월 2일 화요일

창세기 39:11~23 가장 어려울 때 가장 가까이 계시는 분

 

말씀요약:

요셉이 보디발의 집에 노예로 팔려서 가정 총무로 있을 때 여주인의 유혹이 심했다.

집 사람이 아무도 없을 때 보디발의 아내가 요셉의 옷을 잡고 동침하자라고

매우 적극적이고 과감하게 요구한다. 그러나 요셉은 옷을 그 손에 버리고 도망을 간다.

보디발의 아내는 집 사람들에 또 자기 남편에게 두 번에 걸쳐서 옷을 증거 물로 보이며

히브리 종이 나를 희롱했다고 고발한다. 그 결과 요셉은 옥에 갇히게 되었고

옥 중에서도 하나님이 함께 하심으로 요셉은 형통했다.

 

묵상:

아버지의 심부름을 갖다가 형들에게 붙잡혀서 노예 신분으로 은 20에 팔려서 애굽에 간 요셉

바로의 신하 시위대장  보디발의 집에 종으로 팔렸다.

하나님이 요셉과 함께 하심으로 그 형통함을 주인도 알아보고 가정 총무로 세웠다.

 

그런데 문제는 요셉이 너무 잘생긴 것이 문제였다.

요셉은 용모가 준수하고 아담하였다.(6)

여 주인이 잘 생긴 요셉을 가만히 두지를 않는다. 윙크도하고 동침하기를 청한다.(7)

여인이 날마다 요셉에게 동침하기를 청한다. 그러나 요셉은 그녀와 함께 있지도 않았다.(10)

 

그러던 어느날 요셉이 시무하러 갔는데 마침 그 집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11)

그 여인이 요셉의 옷을 잡고 나와 동침하자고 매달린다.(12)

요셉이 옷을 버려 두고 도망을 갔다.(12)

 

어떻게 보면 최초의 성희롱 사건인지 모르겠다.

잘 생긴 요셉과 음탕한 보디발의 아내와는 근본적으로 생각이 다름을 본다.

요셉의 오로지 한가지 생각은 어떻게 하면 죄를 짓지 않는가?에 촛점이 있다.

종이라면 주인이 성 노리개로 사용 할 수도 있었는지 모르겠다.

아마도 문화적으로 그런 문화가 있었기 때문에 요셉에게도 이런 유혹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요셉은 그런 문화가 있다고 하더라도 거부했다.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득죄하리이까?(9)

요셉은 언제나 하나님이 보시고 계신다는 믿음과 생각이 있었다.

이것이 하나님이 함께 하심이고 요셉의 형통함의 비결이였다.

 

그러나 보디발의 아내는 달랐다.

날마다 집요하게 요셉에게 동침하자고 청했다.(10)

그러나 요셉은 동침을 안할 뿐만 아니라 함께 있지도 않았다.(10)

그런데 기회가 왔다. 요셉이 왔는데 마침 그 집사람이 아무도 없었다.(11)

주인의 지위와 신분을 이용해서 위협하고 협박 할 수 있는 좋은 기회다.

왜냐하면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요셉은 어떻게 하면 죄를 짓지 않을까?에 관심이 많았지만

보디발의 아내는 어떻게 하면 들키지 않을까?에 관심이 있기에 절호의 찬스인 것이다.(11)

무슨 짓을 해도 들키지 않을 수 있는 좋은 기회인 것이다.

 

죄를 짓지 않는 것과 들키지 않는 것 작지만 큰 차이이다.

이 작은 차이가 결국은 천국과 지옥의 차이이고 영생과 영벌의 차이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다 밥 잘먹고 잘 사는 것 같지만 작은 생각의 차이가

큰 행동의 차이를 가져오고 사람의 길과 하나님의 길로 나누어 지는 것이다. 아멘. 

 

적용:

작은 관점의 차이가 큰 결과의 차이를 가져 옴을 본다.

나도 하나님 앞에서 아무도 없을 때 보고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고 느낄 때와

누군가 나를 보고 있다고 느끼고 실제 보고 있을 때의 행동과 삶이 다르다.

요셉은 누가 보던지 안보든지 행동이나 일 처리가 한결 같았다.

보디발의 아내는 누가 볼 때와 아무도 없을 때의 행동이 너무 달랐다.

누구를 의식해서 하는 가식적인 행동 말고 누가 보든 안보든 한결 같은 삶

보든 안보든 처음이나 나중이나 한결같은 일관성 나도 유지하고 싶다.

개인적으로 아무도 보지 않을 때 교통신호 많이 무시하고 위반하면서 살았다.

내일부터 아무도 보지 않더라도 교통신호 하나만 이라도 잘 지켜 봐야 겠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어떻게 하면 죄 짓지 않고 살고자 하는 한 사람과

어떻게 하면 죄가 틀키지 않을까 생각하는 한 사람의 대비를 봅니다.

작은 차이 같지만 작은 생각의 차이가 큰 행동의 차이를 가져 옴을 봅니다.

결국 이 작은 차이가 영생과 영벌의 차이를 만듬을 깨닫습니다.

성령님 요셉의 삶과 같이 더 큰 고난 가운데 빠져 드는 한이 있더라도

당신 앞에 사는 삶으로 인도하여 주옵소서.

말씀 앞에 머무는 삶으로 인도하시고 말씀을 행하는 삶으로 인도하여 주옵소서.

거룩하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