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QT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막2:13~22)

다이나마이트2 2009. 1. 9. 23:41

2009년 1월 9일 금요일

마가복음 2:13~22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예수님의 갈릴리 사역본부인 가버나움에서 가르치시고 계실 때에

네 사람이 한 중풍병자를 메고 와서 지붕을 뜯어 구멍을 내고

중풍병자의 누운 침상을 예수님 앞에 달아 내릴 때

예수님은 중풍병 뿐만이 아니라 죄 사함도 선언해 주셨고

일어나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가자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오늘은 5번째 제자 세리 마태를 부르시는 장면이 나온다.

예수께서 지나가시다가 알패오의 아들 레위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14)

나를 좇으라(14)하시니 일어나 좇았다. 할렐루야.

 

다른 사람은 몰라도 레위는 그 사회에서 왕따를 당하던 인물이지 않았을까?

재산은 많았는지 몰라도 존경받는 인물은 아니였고

사회적인 신분은 있었는지 몰라도 부러움을 받는 위치는 더더욱 아니였다.

오히려 매국노로 취급받고 공식적인 죄인으로 취급하던 왕따 마태.

나를 좇으라 하시니 얼른 예 하고 좇았다는 생각이 든다.

왕따에서 해방시켜 주는 우리의 쨩 예수님이 부르시니 기쁘지 않았을까?

 

베드로와 안드레, 야고보와 요한이 그랬듯이

고기잡던 그물을 버려두고, 부모와 삯군들과 깁던 그물을 버려두고 좇았듯이

마태도 모든 것을 버려두고 일어나 예수를 좇았다.

마태는 다른 제자보다 더 기쁨으로 좇았을 것 같다.

그래서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모시고 가서 잔치를 벌린다.

 

레위의 집에서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예수와 그 제자와 함께 앉아 식사를 했다.(15)

 

이 장면을 목격한 한 그룹이 있었다.

바리새인의 서기관들이였다.(16)

예수님께 이야기 한 것이 아니라 제자들에게 말했다.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는가?(16) 질문했다.

 

이 질문을 옆에서 들으신 예수님이 명쾌한 답변을 해 주신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17)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17) 하신다.

 

동일한 한 사건을 다르게 해석하는 눈길이 있다.

예수님의 눈길과 바리새인의 서기관들의 눈길이다.

 

바리새인의 눈으로 볼 때에는

레위는 부르면 안되는 인물이였다.

함께 식사를 해서도 안되는 사람이였다.

 

예수님의 눈으로 볼 때에는

신분이나 계급이나 외모로 보지 않으시는 주님 눈에는 크게 보이는 사람이였다.

형식이나 율법이나 규례나 전통에 메이지 않으시는 주님에게는

함께 기쁨으로 식사할 수 있는 인물이였다.

 

동일한 한 사건에 왜 이런 시각의 차이가 생기는가?

영성의 차이인가? 그렇다고 생각한다.

영성이란? 누구의 시선을 의식하는냐의 차이이다. 아멘.

 

바리새인의 서기관들은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했다.

내가 적어도 이런 사람인데 저 사람과는 어울리면 안돼하는 고정관념이 있었다.

이것이 낡은 가죽 부대이다. 이것이 낡은 옷이다.

 

예수님은 사람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았다.

하나님의 시선을 의식했다.

사람들이 무어라 할까 별 관심이 없었다.

하나님의 관심이 무엇인지에만 집중하셨다.

이것이 새 포도주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으라(22) 하신다.

 

말씀을 보면서 내가 바리새인의 서기관들과 같은 모습을 본다.

나는 하나님의 시선보다는 사람들의 시선을 날마다 의식했다.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는가?(16)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니까?(18)

이 질문들이 중요했다.

 

그러나 말씀을 보면 이 질문은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

예수님은 내가 죄인을 부르러 왔다(17)고 하셨고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 금식할 수 있는냐?(19)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다.(21)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으라(22) 하신다.

 

하나님 아버지

또 한 명의 제자를 부르시는 모습을 봅니다.

불러 주신 주님을 찬양합니다.

동일한 사건을 다르게 해석하는 사람들을 봅니다.

누구의 시선을 의식하면서 사는지 분명히 확인하게 하옵소서.

지금까지는 세상 사람들의 시각을 의식했습니다.

전통과 형식과 율법을 의식했습니다.

이것이 낡은 가죽부대요 낡은 옷이요 의인의 생각임을 봅니다.

이제부터는 사람의 시각보다는 하나님 아버지의 시선을 의식하겠습니다.

예수님 처럼 자유롭게 죄인들을 부르며 함께 식사하며

예수님의 가르침이신 새 포도주를 새로운 부대에 담게 하옵소서.

내 인생 최고의 스승되시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