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직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해 (행21:1-26) 말씀: 이재훈 목사님
우리가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서로 다른 의견”이 있을 수가 있습니다.
그럴 때에,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혹시 [자녀와 부모]가 ”의견이 다를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부모]는 조금은 반대하다가, 결국에는 자녀를 축복해 주어야 합니다.
[자녀]는 ”부모님의 권면 안에, 주님의 뜻이 있는지?“를 헤아려야 합니다.
서로 다른 의견이 다르면, 우리는 [나의 뜻]이 아닌, “[주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생각하면, 그 갈등이 해결될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서로 분열되지 않고, 서로를 존중하며,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되는 길”을 찾을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은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가는 것”에 대한 의견이 서로 나누어지면서,
“어떻게 [주의 뜻]으로 하나가 됐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바울]이 에베소 장로들과 이별의 인사를 나눈 것은 “오순절에 맞춰, 예루살렘에 가는 계획”을 세웠기 때문입니다.
바울의 [이런 계획](= 예루살렘에 가는 계획“)에 반대하여,
주변의 동역자들은 “예루살렘에 올라가지 않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을 피력합니다.
그러니까 그전까지만 해도, 묵묵히 [바울의 결정]을 따르던 [동역자]들이 “올라가지 말라”고 권하지만,
그러나 [바울]은 “이러한 권면”을 따르지 않고, 도리어 “자신이 꼭 가야 하는 길”을 선택합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잘못 분별하고 있는 것일까요?
[동역자들]이 “성령의 감동으로 만류”하고 있는데,
[바울]은 “굳이 가겠다.”고 하는 것은 [바울의 고집]인가요?
그런데 지난주 말씀에, “바울도 성령의 강권하심으로, 그렇게 결정했다,”고 했습니다.
그럼, “누가 진짜 성령의 감동을 받은 것인가요?”
분명히 둘 중에 한 쪽은 “잘못 분별한 게 아닌가?”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대답]은 양쪽 편, 모두, 성령의 감동을 받고, “서로 다른 의견을 표시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성령님]은 인격적인 분이기에, [우리의 판단]을 “하나로 일치시키지”는 않습니다.
때로는 우리의 인격적인 선택을 존중하시며, 또한 “강제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두 가지 [의견]에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바울]이 예루살렘 행을 만류하는 사람들도
①바울을 아끼는 마음에서, ②바울이 오래오래 더 많은 사역을 감당하기 원하는 마음에서,
③예루살렘에서 고난을 생각하며, ④심지어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을 생각하니, “가지 말라.”고 말리는 것이고,
또한 [바울]은 ①예루살렘에서 분명 고난이 있을지언정, ②비록 죽을지라도,
③내가 그 고난을 통해서 은혜의 복음이 예루살렘에서 전해지기를 원했기에, 자진해서 가려고 합니다.
결국에 [바울의 뜻]이 “주님의 뜻으로” 받아들이고, 모두가 함께 축복하는 가운데, 그 길을 떠나게 됩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주의 뜻을 선택했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13절에 [바울의 대답]에서 나옵니다. “그러자 바울이 대답했습니다. 왜, 여러분은 울면서 내 마음을 아프게 합니까?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해, 예루살렘에서 붙잡힐 것은 물론 죽을 각오도 돼 있습니다.”(행21:13)
▶[바울]이 어떤 의미에서 “주의 뜻에 합당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1) 첫째로/ [바울]은 “아파하는 마음이 있었다.”고 고백합니다.
①“가지 말라.”고 권면하는 [동역자들]로 인해, “마음 아파하는 마음”이 있고,
②[동역자들]이 자신의 뜻을 바꾸려고 한 것에 “마음 아팠다.”는 게 아니라,
“자신이 그들의 뜻에 따라주지 못한 것”에 대해, 마음이 아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동일하게 성령 안에” 있으면서도, 때로는 서로 다른 의견으로 나타나서,
“서로의 뜻에 따르지 못한 것”으로 인해, 서로 마음 아파하는 것입니다.
상대방이 “나의 뜻에 따라주지 않은 것“으로 인한 [분노]가 아니라,
”내가 상대방의 의견에 따라주지 못한 것“에 대한 [가슴 아파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어느 쪽이든, ”하나님은 축복하고 인정“ 하십니다
그러므로 “성령 안에서” 결정을 할 때, “[나의 의견]이냐, [상대방의 의견]이냐?“는 싸움이 아니라,
”내가 상대방의 의견에 따르지 못한 것”에 대한 [아픈 마음]입니다.
(2)둘째로/ [주 예수의 이름]은 우리의 죽음도 각오했기 때문입니다.
[바울]에게 있어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은 단지 [힘든 길] 정도가 아닙니다.
그 길은 “죽음을 향한 길”일 수도 있습니다. 돌아보시면 1차, 2차, 3차 전도여행에서 가는 곳마다,
바울을 힘들게 했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누구였습니까? [이방인들]이 아닙니다.
그들은 [유대인들]이고, 여전히 율법을 중심으로 생활을 하고, 예수를 믿은 사람들입니다.
그 사람들이 [바울]을 따라 다니면서 괴롭혔고, [예루살렘]에는 그런 사람들이 가득 차 있기에,
“그런 지역에 간다.”는 것이 인간적으로는 내키지 않은 일입니다.
▶왜, [바울의 선택]이 “더 주의 뜻에 합당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①손해 보는 일, ②희생하는 일, ③자기를 위한 길이 아닌, 인간적으로는 가고 싶지 않지만,
꼭 “필요한 길”이기에 선택한 길이고,
사실 [바울]이 예루살렘에 들어가면, 그들의 문제가 드러나고,
그들이 여전히 율법에 갇혀서 복음의 능력을 체험하지 못하는 상황을 알려주게 되므로, 문제가 생기게 됩니다.
이미 [베드로]와 [야고보]도 거기에 갇혀 있으므로, “바울과 같은 사람”이 예루살렘 교회에 가야만 그 [틀]이 깨지고,
“더 복음적인 교회”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저는 [4차 로잔대회]를 섬기며, [로잔 운동]으로
“한국교회가 세계 기독교의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는 계기가 된다.”는 것입니다.
한국 안에 있는 교회들도, 한 교파 안에 머물고, 한 교회 안에 머물게 되면,
“우리의 신앙도 우리 자신 안에만” 머물게 되어, 세상 돌아가는 것을 모르게 됩니다.
그럴 때는 다른 교파 와 다른 교단의 사람들과 만나서, ”복음 안에서 협력해 갈 때, 무엇이 가장 중요한지?“를 알게 되고,
더 나아가 ”세계 기독교의 복음주의“를 파악하게 되므로, 어떻게 주님을 섬기는지를 보면서,
우리 자신을 객관적으로 보는 [시야]가 열리는 것입니다.
(3) 셋째로/ 서로가 ”주의 뜻이 이루어지기만“을 원했기 때문입니다.
14절의 말씀에, ”바울이 설득 당하지 않자, 우리는 ’주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원합니다.‘라고 말하고서
더 말하지 않습니다.“(행21:14)
대개 한 교회에서 다툼이 나는 것을 보면, 예를 들어 담임 목사를 청빙할 때,
”주의 뜻에 합당한 목회자를 선택한다.“고 기도하고, 회의하고 기도하지만,
투표를 통해 결정이 되면 주의 뜻으로 받아들여야 하는데, 반대하는 측에서는 ”주의 뜻이라고 고백을 하면서,
계속 반대“를 합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에 보면, ”더 말하지 않았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주의 뜻]이라고 생각했으면, 더 말하지 않는 태도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그것은 [주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원했고, 또 [바울이 선택]한 것을 ”주의 뜻에 더 가깝다.”고 분별했기 때문에,
그들이 뜻을 합치하여, 예루살렘에 올라가게 되었습니다.
[고린도전서 9장]에 보면, “바울의 [사역 철학]”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9장 19절부터 22절에, “내가 모든 사람에 대해 자유로우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됐습니다.
이는 내가 더 많은 사람을 얻기 위해서입니다.
유대 사람들에게 내가 유대 사람처럼 된 것은 유대 사람을 얻기 위해서입니다.
나 자신이 율법 아래에 있지 않지만, 율법 아래 있는 사람들에게 내가 율법 아래 있는 사람처럼 된 것은
그들을 얻기 위해서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율법을 떠난 사람이 아니지만,
율법 없는 사람에게 율법 없는 사람처럼 된 것은 그들을 얻기 위해서입니다.
연약한 사람들에게 내가 연약한 사람처럼 된 것은 연약한 사람들을 얻기 위해서입니다.
내가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양이 된 것은 어떻게든지 몇 사람이라도 더 구원하기 위함입니다.”(고전9:19-22)
이 말씀에 “바울의 [사역 철학]이 나타나 있습니다.
율법 없는 곳, 이방인들에게는 율법 없는 사람처럼 되고,
율법 아래에 있는 유대인들에게는 ”유대인처럼 된다.“는 것이 어떤 의미입니까?
더 이상 율법과 상관없이,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 얻는다.“는 복음을 전할 때,
이방인들에겐 당연히 율법을 알려줄 필요도 없고, 전할 필요도 없는 것이죠.
그러나 율법이 전통이 되어, 그런 문화 속에 살고 있기 때문에, 아직 전통과 문화에서 벗어나지 못한 사람들,
그들이 곧 ”연약한 사람들이다.“고 바울이 표현했어요.
율법은 지키지 않아도 되는데, 여전히 지키고 있는 사람들이 있는 것을 [바울]은 ”연약함이 있다.“면,
자신도 연약한 사람처럼 되어서, 그들을 얻고자 복음을 전하고자 했던 거예요.
그러나 앞서 고백한 [바울의 철학]에 의하면, 그걸 지키는 것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유지하고, 구원의 차원이 아니라,
그 유대 사회에서 여전히 답답하고 불필요한 일들이겠지만,
그런 것들을 존중함으로써 ”그들에게도 복음이 증거되는 사역에 참여했다.”는 겁니다.
이유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그렇게 했다.“는 겁니다.
어떤 의미에서 예루살렘 교회 지도자들이 참여하도록 한 의도와 동기하고는 사뭇 다른 것이죠.
이들은 그저 그냥 반대 여론만 잠재우고자 했지만, 바울은 그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반대를 잠재우는 정도가 아니라, 그들에게도 복음이 증거되기 위해서 그렇게 열심히 한 것이죠.
[바울]은 사람들에게 잘 보이려고 한 게 아니라, 예루살렘의 한복판에서 예수님의 복음을 증거하기 위해서,
한 영혼이라도 더 구원할 수 있다면, 그런 것들은 존중하면서 ”그들에게 참여했다.“는 겁니다.
▶기준은 뭡니까?
①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전하기 위해서,
②한 영혼이라도 더 예수님을 믿게 하기 위해서, 그런 선택을 한 것입니다.
[바울]과 같이, ”오직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해 사는 인생”은 고난과 희생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는 어떤 오해와 비난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때로는 “서로 다른 의견도 성령 안에서 하나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의 삶을 통해,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해, 주의 뜻이 이루어지는 선택, 그런 선택을 용기 있게 실천해 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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